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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고향생각나는 수필 한 편 - 마리지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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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고 고맙구 영광입니다.
갈릴리 마을에 제 글방(최기훈)을 만들어 주셨더군요
그림도 부담을 느낄만큼 아름답고...

한 번 이 컬럼을 천천히 읽어 주시고 제 글방에도 다녀가세요
그리고 복되고 풍성하고 따뜻한 설명절 보내세요
저는 설날 당일에야 고향에(충남 태안) 다녀올 것 같습니다.

          

(고향 생각나는 수필 한 편)

마리지 고개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형(兄)이라는 인식을 했던 것 같다.

삭풍에 눈보라가 휘날리고 귓불을 사정없이 할퀴는 겨울날이었다. 집에서 읍내에 있는 학교까지는 시오리 길, 그 길에는 만만치 않은 두 고개가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첫째 고개는 서낭당 고개라 불렀는데 마루에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한 그루가 서 있었고 등하굣길에 나무를 올려다보면 나무의 몸통은 언제나 붉고 푸른 깃발이 몇 가닥 나부끼고 있었다. 또래 친구들은 그 나무 밑에서 밤이며 떡을 주워 먹기도 하였지만 나는 겁이 나서 한번도 그런 기억이 없다. 행여 나무에게  잘 못 보이면 화를 당할 것 같은 위압감을 풍기고 있어서 심약하기 만한 나는 아예 나무를 거들떠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둘째 고개는 마리지 고개였다. 그 고개에 올라서면 비로소 확 트인 시야에 읍내가 보이고 이마에 솟은 땀을 팔 소매로 훔치면서 이제 학교에 다 왔다는 안도감으로 가슴이 뿌듯해지곤 했었다. 이제는 순풍에 돛단배 가듯이 가뿐한 걸음으로 시작되는 내리막길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고개의 유래를 아직 알지 못한다. 누군가 그럴 듯 하게 꾸며 얘기라도 해주면 곧이 들었을 터인데, 추측컨대 말[馬]이 오르기도 힘들어 아마 달구지를 팽개쳐두고 달아났다는[離]데서 유래가 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 가늠해보아도 경사도가 족히 사십 도는 넘었으니까.

이 마리지 고개에 얽힌 추억 가운데 하나는 국민학교 5학년 시절이었다. 고학년인지라 도시락을 싸 가지고 등교하는 길이었는데 같은 마을에 사는 짓궂은 또래 상선이가 돌멩이를 던진 것이 내 머리에 맡고 말았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따라오던 친척 형이 급히 내 도시락 보자기를 풀어 머리를 싸매 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도시락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아, 그 순간의 창피함이라니! 새까만 꽁보리밥이 왜 그렇게도 부끄럽던지, 머리가 터진 아픔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 고개는 어찌보면 가난한 그 시절 막바지 보리고개였다는 생각도 든다.

현재 그 고개는 다 깎인 채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예전처럼 가파른 고개의 위용도 사라져 버렸고 그나마 새로 난 길에 밀려나 어느덧 옛길이 되고 말았지만 나에게는 코흘리개 국민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추억 그 이상의 아픔과 눈물이 스며있기도 하다. 그 때 아우는 중학교 일 학년,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토요일로 기억되는데 그날따라 얼마나 추웠던지, 귀를 두 손으로 감싸고 종종걸음으로 내달려와 버스를 타기 위해 차부 근처에 어물거리는데 아우와 맞닥뜨린 것이었다. 내 호주머니엔 달랑 20원이 남아 있었다. 아우는 그나마 가진 돈도 없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아우에게 20원을 꺼내주었다. 형은 조금 있다 갈 테니 먼저 가라고... 아우는 뻔히 내 사정을 알고 있는 듯 쭈뼛거렸지만 아우가 만원 버스에 오르고 출발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자리를 떴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이번엔 반대편 고개를 오르는 길이었다. 고개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고개를 넘자마자 둔덕에 쌓인 눈 더미를 쓸어 내리며 한 폭의 그림이듯 눈보라를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두 볼에 흐르는 눈물, 콧물이 범벅된 채로 달리다가 자빠지기 일수였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아우를 위한 뭔가 한 가지 선행(善行)을 하였다는 자부심에 뿌듯하였으니... 어머니는 내게 자주 내가 '맏이'임을 강조하셨다. 동생들이 잘못했어도 맏이에게 우선 책임이 있고, 맏이니까 더욱 행동이 모범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나는 맏이로서의 구실이 그리 온전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우 만한 형이 없는 것처럼 성숙한 아우들의 모습을 자주 느꼈던 것이 나의 늦은 고백이다. 더러 형제들끼리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싸움의 발단이 맏이인 내게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름대로 맏이의 권위를 세워 주기도 하였다. 형 만한 아우가 없다고, 형은 너희들을 위하여 양보하고 돕지 않느냐고...

고향을 떠난지도 훌쩍 20년이 넘게 흘렀다. 그렇게 싸움질하면서도 의좋게 컸던 네 아우들은 장성하여 각기 제 길을 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그렇게 추운 날 내 대신 버스를 탔던 셋째는 수의학을 전공하여 고향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유독 그 아우가 더 자랑스러운 것은 어쩌면 맏이인 내 대신 고향을 지킨다는 생각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그 셋째 아우가 근년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는 맏이로서 무능을 또 한번 곱씹었는데 사고를 수습하느라 고향까지 오르내리길 십여 차례, 한 날에 나는 일부러 막차가 떠난 읍내 차부에서 고향집까지 어릴 적 그 길로 걸어가 보았었다. 때마침 어둑해진 밤길에는 눈보라 대신 이슥한 는개가 내리고 그 마리지 고개를 오를 무렵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보는 이도 없겠다. 눈물을 감출 필요도 없이 나는 멈춰서 한동안 울고 말았다. 그 눈물은 아우에 대한 내 사랑과 기도가 부족했음을 통회하는 눈물이기도 했고 또한 어릴 적 애틋한 그 추억이 되 살아나 울음이 더 길어 졌는지도 모른다.
둘째는 사범대학을 나와 교직에 있다가 지금은 장학사가 되었고 넷째는 법대를 나와 농협에서 보험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출가한 막내 누이 또한 두 아들을 둔 야무진 살림꾼이 되었다. 그리고 맏이인 나는 소외된 이웃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교도관으로 소임을 다하고 있다.

나는 이제 어릴 적 그 애틋한 추억의 단면을 통해 지금의 나에게 무엇을 남겨야 될 것인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가슴은 미래에 살고 가버린 추억은 마음에 소중하다고... 시인은 말하지만, 삶은 언제나 현재에 있는 법! 형제우애를 유일한 철학처럼 가르친 농부이신 부모님의 뜻을 어찌 가슴에 담지 않을 수 있으랴. 그 어릴 적 우애의 절반의 절반이라도 내가 먼저 나누었으면.

- 사랑하는 아우들아, 부족하기 만한 맏형을 더 위해주고 감싸주려무나.

* 나는 이 글의 초고를 쓰던 며칠 전, 또 눈물이 흘렀다. 주책없게시리...
* 독자로 초대합니다.

최기훈/'교도관이 쓰는 민들레편지'(http://column.daum.net/daman1004/)컬럼지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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