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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성경적 상담 - 탈진과 절망으로 인한 분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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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의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 중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거나 '자기 의'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때 우리는 쉽게 탈진하고 절망하고 그 끝에 분노를 쏟아내게 됩니다.  지난 번에 소개한 적이 있는 엘리야의 이야기와 아삽, 그리고 요나를 통해서 탈진과 절망으로 인한 분노가 어디에까지 미치는지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께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지음 받은 우리들의 모든 행위는 영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우리들의 성품 또한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지, 무엇에 대하여 기쁨을 느끼는지,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즐기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영성이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Burn out, Despair and Anger(탈진과 좌절과 분노)에 대하여

1. 먼저 생각하기

        엘리야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 놀라운 일을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왕상 18:21)”고 호통을 칠 때만해도 엘리야는 이제 곧 있을 하나님을 놀라운 역사만 그들에게 보여주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릎 꿇고 회개할 줄로 알았습니다.  아합왕은 또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눈 앞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3년 반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어떻게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강퍅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이세벨은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아예 자신을 죽이겠다고 설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 바알과 아세라가 우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었는데, 어느 누구 하나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갈멜산에서 이적을 보여주고 난 다음 이제는 이 패역한 세대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설 줄로 알았는데 세상은 변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만 더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점점 광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사환도 돌려보냈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애써보아야, 아무리 목숨 걸고 일해 보아야 헛된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리면… 어찌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문득 자신이 죽어버리면 하나님이 참 답답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처럼 열심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만큼 충성했으면 이제 된 것 아닙니까?  이만큼 일했으면 이제 열매를 맛볼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나마저 이렇게 죽어버리고 나면 이제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을 위해 일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텐데, 왜 나를 이렇게 쓸모 없는 사람 취급을 하십니까?”  엘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집니다.  마음 속에 일어나는 말들이 점점 뜨거운 감정을 타고 흐릅니다.  생각해 보면 그 동안 참 서러웠습니다.  참 외로웠습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그렇게 목숨 걸고 싸웠는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이방여인 이세벨이 휘두르는 칼날을 피해 광야로 쫓겨가고 있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합과 이세벨을 향한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 서운함과 답답함으로 바뀌고 있고, 어느새 그 뜨거운 감정들은 그 분노로 변하여 하나님을 똑 바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 누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쓰러지면 들짐승의 밥이 되거나 흙이 되어 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마른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서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차라리 나를 죽여 주십시오.  사람들에게 쫓기고, 배척 받고, 하나님에게서도 버림받은 몸 아닙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 해봐야 아무에게도 인정 받지 못하는 이 몸, 구차하게 더 사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의식이 가물가물해 집니다.  그는 잠이 들었습니다.

2. 주의해서 성경 읽기

        성경은 자기 연민에 빠진 몇몇 사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의 장면들을 통해서 그들의 삶의 절박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1) 엘리야

  a. 왕상 19:4-5,7  포기하는 엘리야와 하나님의 위로
  b. 왕상 19:9  네가 어찌하여….
  c. 왕상 19:10, 14  엘리야의 자기 연민
  d. 왕상 19:11-18  엘리야와 하나님의 차이
  è.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19:12)        
  f. 하나님은 어떻게 준비하고 계시는가?(19:15-18, 19-21)

    2) 아삽(시편 73편)

  a. 시 73:1-3  아삽의 삶의 현실
  b. 시 73:12-14  내 삶이 헛되도다
  c. 시 73:16-17  저희의 결국을 내가 깨달았도다
  d. 아삽의 세가지 삶의 초점의 회복

     / 피조물 -> 창조주
     / 현실 세계 -> 영적 세계
     / 현재 -> 미래

    3) 요나(욘 4장)

  a. 욘 4:1-3  요나의 절망
  b. 욘 4:2  요나의 절망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 : 분노
  c. 욘 4:9  요나의 절망의 정체

3. 깊이 생각하기

        엘리야와 아삽과 요나의 공통점이 있습니까?  한번 찾아 봅시다.

        첫째, 그들은 스스로를 열심 있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엘리야의 시대에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결심하는 것, 요나의 시대에 복음을 들고 이방의 땅으로 길을 떠나는 것, 아삽의 시대에 하나님의 의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훌륭한 신앙인들이요, 하나님의 능력있는 일군들입니다.

        둘째,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각각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기대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셋째, 그들의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지금 낙심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의 낙심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무엇에 대해 낙심하고 있습니까?  

        또한 분명한 것은 그들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분노의 대상은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고 있습니까?  왜 그들의 분노가 움직이고 있을까요?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세 사람이 자신들의 감정을 정당화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공격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한번 고민해 봅시다.

        넷째, 결국 그들의 열심의 motive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의 motive와 결과 사이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두 가지 구체적인 준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첫번째는 아합왕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사람을 준빟시고 일 하시는 분입니다.  한치의 어긋남도 없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이미 새로운 시대를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오직 자신만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19:10, 14), 하나님은 7,000인을 남기셨다고 했습니다(19:18).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데리고 한 사람을 소개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엘리사였습니다.  엘리사는 이제 엘리야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지키기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낙심하고 탈진하고 분노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철저한 준비를 보여주십니다.  역사는 엘리야의 열심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세밀한 바람처럼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르게 평가하고 자신을 바르게 드리는 사람은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패배했지만 하나님은 승리하셨고, 아삽은 넘어졌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성도의 피난처로 살아 계시고, 요나의 낙심과 분노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엘리야와 아삽과 요나의 열심과 충성을 인정하십니다.  그들을 벌하시고 징계하시기 보다 가르치시고 위로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가르침과 위로는 그들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심령의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4. 적용하기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일하면서 낙심하거나 포기해 버린 경험은 없습니까?  혹은 일의 결과를 놓고 고민하면서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한 경험은 없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일하지 않겠다고 손을 털어 본 일은 없습니까?

        그 경험을 엘리야와 아삽과 요나의 경험과 비교해 봅시다.  우리를 탈진케 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의 감정을 격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결국 왜 우리는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까?  결국 왜 우리는 손을 털고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시편 37편에서 다윗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히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3-7)”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대한 강물 위에 우리의 삶을 맡길 수 있다면 결국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계획과 뜻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과 뜻으로, 우리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승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필라델피아에서 가일 아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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