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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생존자 이순옥의 증언(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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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자 이순옥의 증언

생존자 : 이순옥----------북한 죄수캠프에서의 7년간의 고문

이순옥은 북한의 개천교도소의 죄수였다. 그녀는 최근에 자신의 체험을 발간했으며 미국 의회에서 겪은 일을 증언했다. 또한 미NBC뉴스에게 자신의 개천에서의 시간들을 말했다.

저는 평안북도 개천에 있는 정치범교화소에 7년동안 투옥되었습니다. 저는 1987년부터 1993년 1월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투옥시 제 나이는 39이었습니다. 저는 중앙 물자보급소에서 일했으며, 저는 그 곳에서 관리자였으며, 북한에서 우리는 주민들에게 식량과 물자들을 배급했습니다. 북한경제가 침체되고 물자배급 상황이 나쁘다는 이유로 저는 투옥되었습니다.

개천교도소에는 6,000명 이상의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전부 정치범이었고 그들은 꼭 짐승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 간수들은 죄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인간이 아니다. 너희들은 짐승들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모든 죄수들이 사상적으로 반정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식량부족때문에 비참하게 되었고, 한마디 불평을 중얼거렸을 때에 그들은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간주되었습니다. 7,000명의 죄수들 중 2,000명은 집에 아이들이 있는 주부들이었으며, 죄수생활한 지 한 달만에 그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습니다.

저는 5살, 7살의 아이들을 둔 젊은 주부를 보았습니다. 그녀가 교도소에 끌려 왔을 때 “나는 아이들이 있고 남편도 교도소에 있는데 이제 내 아이들은 집에서 굶주릴 것이다”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6,000명의 죄수들이 보는 앞에서 그 여자가 처형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여성이라고 달리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 독재정권 아래에서, 저는 쇠기둥에 가슴, 배, 다리가 묶여 있었습니다. 총알 3발씩을 가지고 있는 6명의 사형집행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부 18발의 총알을 심장에 쏠 것입니다. 비인간적입니다. 저는 너무나 슬펐고, 우리가 전쟁범죄자들도 아니고, 적도 아닌데, 아이들의 어머니인 젊은 여자를 그렇게 처형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교도소에는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6.25전쟁 이후로 제1의 적은 하느님입니다. 김일성은 하느님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1956년과 1963년 사이에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투옥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은 별도의 교도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개천교도소에서 저는 하느님을 믿게 되어서, 저는 간수들에게 걷어 차이고, 철공소에서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일들은 고열 속에서 해야 하기에 제 등골이 오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키는 120-130센치가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동물처럼 취급 당했습니다. 제 등은 축구공처럼 휘게 되었고, 제 심장과 위장사이의 간격이 좁아졌습니다. 제 어깨와 뼈들이 튀어 나왔습니다. 저는 기이한 동물처럼 보였습니다.

제 어깨 뼈가 너무나 튀어 나와서 저는 머리가 두개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외계인처럼 느껴졌고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바로 짐승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동물처럼, 노예처럼 취급 당했습니다. 10센티 넓이, 1.5미터 길이의 가죽혁대로 맞았습니다. 군화발에 차였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생긴 동물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교도소생활동안 이 잔악함을 겪었으며, 7년동안 매 끼니로 100그람의 강냉이만 받았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다른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강냉이과자는 쵸코파이의 크기인 100그람짜리입니다. 그리고 소금물 작은1컵을 주었습니다. 일일 정량을 다 먹지 않는 사람은 50그람으로 줄였습니다.

저는 단지 독재치하의 죄수였습니다. 이러한 독재치하에서는, 우리는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웃지도 못하며, 눈물을 보일 수도 없고,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도 없으며, 우리는 하루에 3번만 화장실에 가도록 강요되었습니다. 저는 총칼의 압박아래서 제 신체적 기능을 유지하면서 그런 엄격한 통제 밑에서 살아 남은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개천교도소의 6,000명의 죄수들 대부분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으며, 그들은 정치범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런 말 한마디를 중얼거렸습니다. “왜 우리가 굶주려야 하는가. 지도자인 김정일이 있다면 왜 우리가 굶주려야 하는가.” 이런 불평 한마디가 우리를 교도소로 집어 넣습니다. 저는 공개처형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이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지구상의 인간지옥입니다.

그리고 저는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생화학 무기를 만들어 적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유로 동물이 아닌 인간을 상대로 실험하는 것에 대해 정말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김정일의 지시였습니다. 그들은 동물 대신에 죄수들에게 테스트했습니다.

저는 불쌍한 희생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생화학 실험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1987년에 투옥되었으며, 1988년부터 석방된 1993년까지 사이에 저는 실험감독관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기대 이상으로 생화학무기의 효과가 나온 것을 즐기고 있었으며 그들은 실험이 성공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를 회상하며 저는 아직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다시피 제 얼굴이 이렇게 쪼그라든 것이 저는 정말로 슬픕니다. 제 얼굴은 쪼그라들었고, 제가 할 일을 안했다는 이유로 저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 얼굴의 왼쪽은 이렇게 기형이 되었으며 본모습으로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 교도소에는 6,000명의 죄수들이 있었고, 북한에는 전부 20만명의 정치범들이 있습니다. (울기 시작한다) 우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는 정권치하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정치범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렇게 많은 정치범들을 가두고 있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북한에 이렇게 많은 정치범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이쪽 편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자유롭게 자기의 좋아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옷과 먹을 것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북한에서의 죄수생활을 회상할 때엔 그 곳에는 2,000명이 넘는 주부들과 임산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정치범들은 3대를 멸하는 법이 있습니다.

세대를 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를 낙태시키도록 강요받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이 임신 8개월이나 9개월이 되었어도 태아를 죽이기 위해 커다란 주사기로 임산부의 자궁에 소금물을 집어 넣었습니다. (운다). 그리고 가끔 산 아이가 태어나면 간수들이 핏덩이의 아이를 발로 차서 죽입니다. (운다). 그리고 저는 갓난 아이가 고통으로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운다). 저는 이러한 비인간적인 지옥을 목격한 것을 이렇게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운다). 저는 86년 10월에 붙잡혔으며, 87년과 88년 5월에 투옥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잊을 수 없읍니다. 간수들은 군화발로 저를 찼으며, 해보지도 못했던 노동을 강요받았습니다. 한번 그들이 우리들 중 50명을 뽑아서 강당에 넣고 그들에게 삶은 배추 조각을 주었고, 그들이 그것을 먹자마자, 그들의 입과 항문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그들이 이렇게 20분 내지 30분만에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저는 마음을 둘 곳이 없었습니다. 이게 생시입니까 악몽입니까. 그 때 저는 비명을 질렀고 강당 밖으로 쫒겨 났습니다. 그것은 생화학실험이었으며, 10,000분의 1이라는 지극히 소량만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건강한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 있습니까.

1990년, 91년, 92년에 걸쳐 그들은 기독교신자들을 더욱 가혹히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별도의 작업장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때, 30명의 죄수들이 간수들의 군화발에 차여 죽었습니다. 2명의 간수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 주님.”하고 주님을 찾아 울 때, 그들은 끓는 물을 그들에게 부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잿더미로 되었습니다. 북한같은 지옥은 또다시 없습니다. 우리는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가장 열악한 상태인 3등급 영양실조에 달하면, 물이나 빵을 먹으면 곧바로 항문을 통해 배출되어 버립니다. 교도소에는 쥐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가죽제품들을 만들기에 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쥐를 붙잡으면 그 날은 행운의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쥐를 잡는 것이 발각되면 우리는 별도의 독방에 쳐 넣어집니다. 쥐를 잡으면 우리는 요리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먹었습니다.

우리가 한조각의 빵과 소금기 있는 물을 마시고 이렇게 1년을 지내면, 인간은 짜든 날것이든 무엇이든지 그 맛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쥐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맛 없이. 저는 머리를 발로 걷어 차여서 종종 두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시력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제 어께는 휘어 있습니다. 어깨 양쪽이 똑바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물고문도 당했습니다. 저는 물 속에서 물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저는 드러 누어서 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그 때 제 위장이 물로 가득찼을 때 그들은 제 위장을 밟아서 물높이와 제 몸 높이를 같게 하고, 물이 제 입과 항문으로 쏟아져 나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물높이와 제 몸 높이가 같아질 때까지 짓밟았습니다.

그리고 데 갈비뼈와 등뼈 그리고 제 다리는 정상상태가 아닙니다. 북한에서의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부작용은 아직까지도 굉장합니다. 저는 남한에서 위수술을 받을 수 있었지만 물고문때문에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물고문을 할 때 그들은 특별히 고안된 10리터짜리 주전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죄수들의 입에 주전자꼭지를 넣으면 목구멍이 자동으로 열렸습니다.

그 때 제 얼굴에 이렇게 상처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여기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를 천장에 두 손과 함께 매달고 저를 때렸습니다. 제가 매달렸을 때 제 몸의 무게때문에 수갑을 찼기에 손목에 부상을 입고 살점이 떨어졌습니다. 제 어깨 오른쪽은 덩어리채 튀어나왔고, 뼈가 위로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이 쪽은 그들이 짓밟았기에 움푹파였습니다.

그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고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사무실에서 이유도 모른채 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제 책임이 아니고 지도자 (김정일)의 책임이었는데도 그들은 주민들에게 식량이 공급되지 않은 것이 제 책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로부터 제 책임이라는 시인을 받기 위해 저를 고문했습니다.

그들이 저를 고문할 동안, 어쩔 때엔 이틀씩, 저는 의식을 잃었고,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제 등에 상처가 난 것을 보았고, 커다란 파리들, 어쩔 때엔 구더기들이 피묻은 부분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하나 밖에 없는 아들과 내 사랑하는 남편이 나의 투옥과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강제노역소로 가야만 했던 것 때문에 제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체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오직 북한에만 존재합니다. 그 때 제 유일한 아들은 김일성대학 대학생이었고, 제 남편은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그들은 강제노역소에서 노동을 해야했으며, 저는 아직도 제가 북한에서 태어난 것과 제 남편이 그러한 상황에서 죽은 것 때문에 마음이 안 좋습니다. 제 아버지는 북한에서 고위직이었고, 제 자신도 대학을 나왔으며 노동당 당원이었고, 그 전에는 아무런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심한 고통을 참을 정도로 제가 강하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교도소에서 그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 분명 기적입니다. 지금은 완전 180도 달라졌습니다. 바로 지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느낍니다. 저는 마치 제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느낍니다. 당장은 2,300만 북한주민들이 해방될 수 있는 날이 더 가까워진다고 희망합니다.

저는 북한으로부터 신체적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비인간적인 자입니다. 저는 그러한 잔혹함을 겪었고 그것을 세상에 알렸으며, 그래서 김정일은 수백번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생명이 희생되어도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내가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는지의 이유입니다.

저는 세상사람들 모두가 북한에서의 그러한 잔혹함을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이 없는 곳--- 오직 북한에서만 그렇습니다. 아직까지 그곳에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가족교도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두사람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있었던 곳 같은데서 살아 남은 사람은 제가 유일합니다. 이것은 비밀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들은 미국 의회와 미국 정부, 그리고 UN에서 알아야 하며, 그들은 김정일이 죄수들을 해방시키게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북한주민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저는 이것을 진심으로 요청합니다.

제가 그곳에 있을 때, 24개의 교도소가 있었습니다. 그 후, 저와, 제 아들, 그리고 강철반, 안혈, 안영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들을 UN을 포함한 세상에 알렸으며, 저는 김정일이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지금은 교도소 숫자가 반으로 줄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수들의 숫자 20만여명, 그리고 다른 형태의 죄수들 20만 --- 전체 40만명의 죄수들이 교도소에 있습니다. 지금은 몇명이나 교도소에 갇혀 있으며 몇명이나 죽음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북한은 매년 죄수의 숫자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죄수들이 만드는 제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북한사람들, 3살짜리 아이들도 죄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아이가 울다가도 교도소에 보낸다고 하면 울음을 멈춥니다. 그들은 잘못 말하면 언제 붙잡혀 교도소로 보내질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의견을 표현하는데에 매우 조심합니다.

저는 고문때문에 제 눈 왼쪽에 상처자국이 있고 제 이빨들은 부러졌습니다. 제 얼굴 왼쪽은 마비되었습니다. 그들이 제 몸을 너무나도 심하게 짓밟아 제 이빨이 부러졌고 제 눈알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눈알을 다시 집어 넣고 손으로 며칠동안 주물렀습니다. 그리고 눈이 부풀러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파인 곳을 보십시오. 제가 의식을 차린 후에 발견했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무엇인가로 찔림을 당했음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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