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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내인생을 역전시킨 황홀한 만남(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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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후 삶의 허무와 우울함과 부끄러움을 안고 소극적이고 웃음을 잃은 생활을 이어왔다. 그런데 초등학교시절 8.15 해방을, 여학교 시절 6.25를 겪으면서 내 인생에 소용돌이는 폭풍우처럼 밀려왔다. 어느 날 서울에서 피난 온 친구의 소개로 성당을 한번 가봤다. 키가 크고 눈이 파란 불란서 신부님이 주신 천주교 교리 문답과 기도서를 어머님이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태워버렸고 처녀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면 모두가 수녀가 되는 줄 알고, 죽으면 몽달귀신이 된다며 성당에 못 다니게 극구 반대 했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강요로 결혼한 남편은 군인으로 천주교 신자었다. 남편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으나 지극히 소심하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나는 덜렁대며 성질이 급하고 적극적인 사람이어서 성격 차이가 났다.

물과 불이요 N극과 S극 같이 차이 나는 성격이 제일 괴로웠다. 특히 남편은 여름에도 그 냄새나는 군화에 양말을 두 켤레씩 끼워 신어 그 땀 냄새가 견디기 힘들었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이라 그것을 빨려면 힘들었고, ‘내가 이집에 식모살이하려고 왔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다니던 큰 애는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는 그때에 맞추어 귀가하는 것이 익숙해 있었고 술에 찌드는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였다. 감사와 기쁨, 평화라고는 한 푼도 없었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니 매사가 짜증의 연속이었다. 이것이 내가 사는 것인지 남의 인생을 살아주는 것인지 마음의 가닥을 잡기가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아들은 주일학교교사로 모범생들이나, 내가 완벽주의자요 내 자신이 기준이다 보니 매사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이 속상했고 짜증스러웠다. 이렇게 인생의 회의가 깊어만 갔다.

작은 아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에는 절에 가서 부처 앞에 촛불을 켜놓고 빌고 성당에서도 기도를 계속했다. 양다리 걸치고 살던 겉모양만 신자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온 가족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주일을 지키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범적인 성가정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에는 가면을 쓴 이중 인격자였다.

내가 얼마나 미신을 좋아하고 우상을 숭배했는지! 아들 대학입학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박 도사에게 부산까지 점치러 간적도 있고, “기분”이란 이름이 나쁘다고 해서 작명가를 찾아가 “유혜원”이란 이름으로 부적을 받아서 품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매년 정초에는 점을 치러 갔는데 어느 새벽 과천시 문원리 문천사 여스님이 신통하다기에 가서 점을 치고 집에 돌아와 같이 점치러간 개신교 친구와 천주교신자인 내게 똑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심장에 담이 붙은 것이다. 죽을 진통을 겪으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친구도 같은 증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무서운 체험을 하고는 하느님 다시는 점치러가지 않겠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시고 살려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회개했다. 그날 이후 점치고 절에 가는 것과 우상 숭배하는 일은 딱 끊었다.

20년을 성당에 다니면서도 속죄의 감격도, 구원의 확신도, 기도의 응답도, 성령의 현존하심도, 천국의 소망도 없이 그저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행위만 했던 엉터리 신자였다. 체면으로, 벌 받을까봐 믿음생활을 했다.

기쁨도 감격도 없던 죄인에게 팔자를 고치고 운명을 바꾼 사건,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에 헤매던 죄많은 인생에게 생명을 살리는 빛이 들어왔다. 1978년 11월 28일 하늘 문을 여시고봉천동 성당의 “은혜의 밤” 에 성령님이 임하시던 날. 오! 외치고 싶은 말. “지가요! 주님을 만났거든요!” 그 놀라움, 그 황홀함, 그 두려움과 그 기쁨! 하느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니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다! 은혜로다!

그 곳에 도착하니 이미 찬미는 시작되어 성전은 사람들의 찬미소리로 꽉 차있었다. 나를 안내하는 봉사자가 이층 맨 뒷줄 중간에 내가 비집고 앉을 만한 자리를 하나 마련해 줬다. 하느님의 찬미로 가득한 성전에는 기쁨으로 회개로 충만한 은혜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내려오고 있었다. 찬미가 끝나고 사회자가 통성 기도를 시켰다. 이 거룩한 성전에서 기타 치고 손을 번쩍 들고 손뼉을 치며 야단법석을 치니 이것은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북새통 시장바닥이라고 되 뇌였다.

그 뿐인가. 휠체어 탄 사람 목발 짚은 사람 각종 병자가 발디딜 곳 없이 제대 앞에 누워 환자들로 가득 메웠다. 생전 처음 보는 장면과 상황에 이것은 말로만 듣던 광신들이 아닌가 생각했다. 손뼉을 치고 알렐루야를 부르며 논에 개구리우는 소리 같이 악을 써가며 울고불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미친 사람들이야! 내가 왜 왔던가! 내가 잘못 왔구나! 정신을 차려야지. 생각했으나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맨 뒷줄 중간에서 벽을 등지고 앉았으니 진퇴양난이었다. 그저 고개만 숙이고 우리 천주교 이제 망했구나.

내 옆 이상한 말을 하는 봉천동 자매의 코에는 찐득찐득한 흰 코가 우동가락처럼 늘어져 그 코가 고개를 흔들 때 마다 흔들거리고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불결스러웠다. 왼쪽의 여의도 자매는 손뼉을 치고 의자를 두드리며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 같았다. 이런 광신자들 틈에 끼어 있는 내 자신이 싫었다.

고개를 들어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온통 와글와글 나처럼 구경꾼은 없었다. 이들은 아버지 앞에 나와 살기 힘든 인생고와 죄와 악과 허물들을 털어 놓고 하소연하는데 나는 무엇인가? 왜 나는 구경꾼인가? 하는 생각을 하던 그때 살기가 힘든 인생길 아버지 앞에 나와 “너는 나를 불러라 내가 대답하리라. 나는 네가 모르는 큰 비밀을 가르쳐 주리라.”(예레미야33:3) 고 한 말씀이 떠올랐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두 번쯤 반복한 나는 주님의 강한 힘에 사로잡혔다. 절대 저항할 수 없는 그 힘! 누군가의 큰 손이 내 등에 얹혀졌다. 순간 활활 타는 불길에 얼굴과 온몸이 타는 것 같았다. 두려움과 무서움이 엄습하고 가슴은 두근두근 방망이질 쳤다.

누가 내 등에 손을 얹었을까? 이렇게 큰 손이라면 덩치도 클 텐데 누구일까? 뒤돌아볼까? 말까? 갈등의 한 순간이 지났다. 그리고 교만하고 미심적은 생각으로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아무도! 없었다. 다시 제대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조금 전까지 거룩한 척 하며 옆 사람을 비난하고 판단하던 벙어리 같은 내 입술에서 죄인이라는 진정한 고백과 함께 눈물과 콧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주님의 사랑의 손이 나를 만진 것이었다.

내 인생의 B.C. 와 A.D. 의 분기점이 된 그날 밤 휠체어를 탄 사람이 일어나 걷고 28년 된 벙어리가 아빠! 아버지를 부르는 온통 생명을 살리는 천국의 축제였다. 나는 우느라 은혜의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집에 돌아왔을 때 마침 남편은 출장 중이었다. 넓은 방안에서 통회자복이 시작되었다. 그 밤 오만가지의 죄가 들춰졌고 주님의 빛이 나를 비추고 내 죄를 회개하게 은혜를 베푸셨다. 어릴적 시냇가 빨래터에서 돌멩이를 들어올리면 우글우글한 벌레가 들어나듯 내 죄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죄를 회개하고 울부짖는 동안 새벽 먼동이 터왔다.

야곱의 야뽁 강 나루터가 우리 집 안방이었다. 야뽁 강에서 환도 뼈가 부러지며 야곱이 이스라엘(하느님께 정복당한 자)이 되었고 죄인인 내가 하느님께 정복당한 자 되어 이스라엘이 되었다. 방문을 열고 밖을 바라본 순간 온 천지는 나를 위해 있는 것 같았다. 온 산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울까! 그때부터 기도가 재미 있었고 성서를 보면 그리운 사람 만나듯 흥분되며 회개가 나오고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아! 하느님 그렇습니까? 예! 하느님 그래요! 하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느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느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시편 42:1-2)
나는 상사병에 걸렸다. “당신의 약속은 말부터가 혀에 달아 내 입에는 꿀보다도 더 답니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시편 119장103-105) 그때부터 천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살아 역사하시는 이 말씀은 나의 버팀목이요 내 인생의 길이 되었다.

유기분

          
제가 받아보는 신앙잡지에서 옮겼습니다.
은혜가 되어서요. 저도 언젠가 동성고등학교 금요철야성령세미나에 가서 믿기지 않겠지만
목걸이가 떨어진줄도 모르고 춤추고 찬양한적이 있었어요.
오래전에 개신교 김인수 장로님이신가 하는분 고려대학 교수님이라고 하셨는데.
그분도 저희 천주교 성령세미나에 자주 오셔서 설교해주시고 했지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는것의 정도를 이땅에 사는동안은 알수없을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저는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 얼만큼이나 날 사랑했냐고 졸졸졸 따라다니며 물어볼겁니다.
주님의 평화 찬미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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