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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마가 요한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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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준비를 하다가 생각이 나서 두서 없이 한번 옮겨 봅니다.
제대로 정리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저의 성품이 베드로와 많이 닮았거든요.

          
나는 마가요한입니다.
얼마전까지 삼촌인 바나바와 새롭게 사도로 인정받고 있는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바울에 대한 거부감과 분노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 집안은 초대 교회에서 꽤 유력한 편입니다.
우리 집 다락방에서 목숨을 걸고 모임을 시작했던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릴 적부터 나를 예쁘게 여겼습니다.
그는 화통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살가운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나를 안고 뺨을 부빌 때마다 싫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실은 그의 수염의 감촉이 참 좋았습니다.
나는 커서 결국 그의 제자가 되었으니까요....

베드로는 삼촌 바나바를 참 존경했습니다.
사실 삼촌은 신앙에 있어서 우리 집안의 기둥과도 같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유대인들이 위협에 흔들릴 때마다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권면으로 신앙을 붙들어주었습니다.
스승 베드로는 그런 바나바 삼촌에게 저를 선교 여행에 데려가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다음 세대의 교회는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사역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삼촌과 함께 선교의 경험을 쌓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했던 안디옥에 스승 베드로가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방문했습니다.
많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들뜬 마음으로 마치 예수님을 만나듯 베드로와의 만남을 준비했습니다.  
나 역시 삼촌 바나바와 함께 스승을 만나러 갔었습니다.
그날 장소를 제공한 안토니오는 안디옥 지역의 유지로 얼마 전에 신앙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까지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막 식사를 시작하려 할 때 누군가 짧고 긴장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베드로 선생님, 예루살렘에서 아마시아 선생과 그 제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순간 베드로 스승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 내의 유대주의자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유대주의적 사고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지,
그들의 교회 내에서의 기득권에 대한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다는 원칙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되었지만
그 결정을 시행함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세계 교회의 중심지로서의 예루살렘 교회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 스승은 함께 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 저들과 지금 싸울 수는 없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 정말 미안합니다.... 길게 설명드릴 시간은 없고...
   먼저 가겠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집을 제공한 안토니오의 당황하고 억울한 얼굴을 뒤로 하고
배드로 스승과 제자들이 자리를 떠났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의논할 일이 있었던 바나나 삼촌도 황급히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뭔가 미안한 마음으로 나 역시 그곳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오건 말건 자신은 전도를 하겠다고 말하면서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삼촌 바나나와 스승 베드로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성난 얼굴로 말했습니다.

  "당신 두 사람의 비겁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상처를 입은 줄 아시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복음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그 복음을 받아들이겠소!
   그러고도 당신이 교회의 지도자요?
   그러고도 당신이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란 말이오!!!
   당신들의 그 애매한 태도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큰 시험에 빠지고 말았소!"

많은 사람들이 그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제자요 조카였던 저도 그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쿵쾅거렸습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꼭 그 말을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해야 했습니까?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입니까?
그때에 바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신은 그 유혹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왜 스승 베드로의 고뇌에 찬 결정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요?

사실 아직도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는 아직도 삼촌에 바나바에게 배울 것이 많은 사람아닙니까?
그런 그가 어떻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초대 교회의 흔들림없는 두 지도자를 비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더이상 그와 함께 선교 여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세가 등등하게 날뛰는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스승과 삼촌을 보면서  
더더욱 그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보면 스승과 삼촌은 그저 잠시 잘못 판단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때의 상황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감히 바울이 스승과 삼촌을 무참하게 밟았습니다.
이제 갓 사역자로서의 위치를 인정받고 있는 그가
초대 교회의 두 기둥을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나는 그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더이상 사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버렸습니다.

괴롭습니다.
스승 베드로로 부터 많은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다소 급하게 생각한 것도 같습니다.
나의 분노 때문에 선교를 포기한 것 같아서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나는 여전히 인정하기가 힘이 듭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초대 교회 가족을 한 사람이었고,
스승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삼촌 바나바는 존경받는 초대 교회의 교사요 바울을 가르친 사람 아닙니까?
비록 그가 이방인 전도에 많은 열매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 역시 예루살렘에서 그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의 결과로 예루살렘에서는 더이상 살 수 없기 때문아닙니까?

이제 곧 계획된 선교 여행이 끝나면 삼촌 바나바와 바울이 돌아올 것입니다.
나는 그를 어떻게 만나야 합니까?
나는 계속 그와 함께 일해야 합니까?
나는 선교 여행을 계속 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쩌면 내 평생에 내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결정 앞에 내가 서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힘이 듭니다.



필라델피아에서 가일 아빠



P.S. 이거 생각나는대로, 기억나는대로 주우욱~ 써내려와서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목사님들, 혹은 형제 자매님들... 읽고 사실과 다르거나 지나친 상상력이 적용된 부분이 있는지
     자세히 읽고 좀 지적해 주시겠습니까?
    
     사실 성경을 이렇게 풀어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 또 상상력이거든요.  

     안디옥 교회 사건에 대해서는 말씀드린대로 정말 관심이 많습니다.
     마가의 관점 외에도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도 이렇게 갑자기 생각이 풀리면
     조만간에 써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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