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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은사의 목적과 사용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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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교회는 근친상간의 음행과 성도들끼리 세상 법정에 서로 고소하고 다투는 등 참으로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특별히 여러 문제들에 대해 진단해 가는 중에, 고린도전서 12, 13, 14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았지만, 그들은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고전 1:5~8,4:8), 예배 때 그것을 경쟁적으로 과시함으로서 예배가 질서 정연하게 나가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가지 문란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성령의 은사 문제도 서로 대립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은사의 목적과 사용 원리를 망각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진단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성령의 은사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으로 세우기 위해 선물로 주어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고전 12:7,27).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에 대해 유익하게 하려는 것(고전 12:7)임을 밝힘과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한 성령으로부터 각자 받은 다양한 은사에 따라 다양한 직책을 감당하여 공익을 도모하고, 교회를 세워야함을 가르치기 위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을 그 몸의 지체로 설명합니다(고전 12:27).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려면 여러 지체가 필요합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안됩니다. 어느 것이 더 귀하거나 덜 귀한 것이 없습니다(고전 12:29~30). 다 사도이겠습니까? 다 선지자이겠습니까? 아무리 머리가 중요한 것 같아도 머리만 달랑 있으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양한 은사를 주심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러한 은사는 결코 참 교회의 표지라든지 또는 일류 성도의 표시로 의도된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주어진 것입니다(12:7,25). 그러므로 각자 받은 은사를 통하여 부족한 지체를 돌아보고, 또 도움을 받음으로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존귀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고전 12:24).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그 생명력과 가치를 최고로 드러내는 것은, 지체로서의 성도 개개인이 받은 은사를 가지고, 그 은사가 없어 부족한 다른 지체들의 부족한 부분을 서로 메꿔주고 섬길 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약하게 보이는 지체도 요긴하고 귀한 법입니다(고전 12:22).

   따라서 어떤 은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교회를 세우는데 공헌을 하는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참 성도는 교회를 세우는데 희생을 많이 하는 성도입니다. 스스로 이익이나 챙기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일류 성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예언이 방언하는 것보다 귀하다고 한 것입니다.

   방언은 혼자 하나님께 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도 무슨 말 하는지 모르고 하는 경우가 많고, 혹 자기 자신에게는 유익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유익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기도원에 가보면 어떤 사람들은 방언으로 막 소리지르며 기도하는데, 신경이 쓰여서 기도를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내 기분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항상 연약한 지체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기본정신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고린도전서 8장에서 말한 우상제물 먹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먹으면 죄가 되고 안 먹으면 죄가 안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먹는 것임에도 죄가 될 때가 있고, 죄가 안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상제물에 대한 지식을 소화할 수 있는 지체가 곁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율법을 그대로 지킨다고 해서 "나는 내 할 일 다했다, 나는 죄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이지만, 율법 자체가 사랑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킨다해도 사랑의 정신으로 행하지 않을 때는 그 선한 율법이 나를 범죄케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제물을 먹어야 되느냐, 먹지 말아야 되느냐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많은 이들이 은사하면, 방언하고,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것만 생각하고, 또 신유의 은사를 받아서 병 고치는 목회자를 참 목회자요 능력 있는 목회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섬기는 은사가 최고입니다. 말씀을 통해 미국 교회의 각성운동을 주도했던 조나단 에드워드가 그의 책 <사랑의 열매>에서 말한대로, 참 성도의 표지는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이적을 행하는 능력에 있지 않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요즘엔 교회 안에서도 머리만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섬기는 것이 최고의 은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은사는 사랑의 원리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고전 12:31~13:3).

   흔히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
   아무리 교회에서 큰 일을 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엄청난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랑이 없이 은사를 사용할 때 오히려 어둠의 세력의 목적을 성취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꿰뚫는 지식을 지녔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려는 교만으로 사용될 때는 그 지식이 연약한 지체들을 넘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은사는 철저히 사랑의 정신으로 사용될 때만 본래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것을 보이리라"(12:31)하고서 13장에서 은사들을 사용하는 절대적인 원리로서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령의 사역 중에서 지극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랑 안에서 하나되게 하고, 그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어 서로 섬기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은사를 사랑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으며,  은사를 사용하는 원리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자신을 과시하거나 남을 정죄하는데 사용할 것이 아니라, 교회를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으로 세우는 일에 온전히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현대 교회가 새로운 빛으로 민족과 사회를 밝게 비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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