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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경계시의 바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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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메시지는 궁극교회 주일예배 설교 중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태복음 11장 25절~27절)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신령계와 물질계를 만드셨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 인간을 영과 육의 결합체로 만드셨고, 만드시되 하나님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도덕성과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자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을 도덕성자로, 감염성이 있는 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마음먹고 행하고 사는 대로 성격 성질 취미 소원 목적이 그렇게 닮아지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을 도덕성과 자유자로 만드신 것만이 아니라 훗날에 가서 영원히 심판성이 있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자기가 알건 모르건, 깨닫건 못 깨닫건 인간 자기에게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전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이라도 이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시공세상에 두어 육해공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을 태어나게 해서 인인관계적으로 연관관계를 맺게 했고, 크고 작은 환경을 경험하고 인식하게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일까요?  이렇게 하신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영원 궁극적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런고로 인간 자기에게는 이 물질세상, 현세뿐만이 아니고 영원 무궁한 미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 궁극적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 나라를 당신의 택자가 당신과 같은 차원으로 영원히 누릴 수 있도록 해 주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본 교회 발행의 전도지 11호 ‘성도의 의무와 책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생긴 이후로 없어지는 그날까지, 인간이 출생해서 죽는 그날까지 인간은 인간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왜 사는지, 왜 살게 하시는지, 자기에게 환난 역경 모든 시험을 왜 몰아 붙이는지, 사시사철을 왜 돌아가게 하는지, 왜 태어나고 죽게 하는지, 왜 살아생전에 눈물 고통 한숨을 겪게 하는 건지, 내가 왜 이런 경험을 다 겪고 가야 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또는 온 인류에게 어떤 마음으로 그와 같은 사건 환경을 세상에서 겪게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뭘 요구하시는지, 나에게 대한 당신의 뜻이 뭔지 그런 등등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바로 알고 그 아는 대로의 삶을 살아갈 때 나에게 영원 궁극적 구원이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 인간에게 세밀히 알게 하는게 계시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인간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계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계시는 땅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성경을 성문계시(成文啓示)라고 하는데 이 성경, 즉 성문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뜻과 영원 궁극의 그 세계를 알게 하시려고 이 계시를 받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람들이 쓰는 용어와 문자를 빌려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이 성문계시(성경) 속에는 많은 인물들의 활동 이력 역사들이 기록돼 있는데 특별히 역사 속에는 과거적 역사, 현재 진행되는 역사, 미래적으로 다가올 역사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개인적이던 단체적이던 국가적이던, 또는 용이나 뱀 마귀 귀신 사단 천사 인간 등 그 어떤 존재의 말이건 행동이건 그 모두는 인간 자기의 영원 궁극적 구원도리와 진리이치의 깨달음을 주고자 등용한 것입니다.
성문계시로 나타나 있는 것은 표면적이요, 눈에 나타나 보이는 활동이요, 생활이요, 역사지만 그러나 이것을 이면적(裏面的)으로 보면 나와 관계된 하나님의 영원 궁극적인 뜻과 의지(意志)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특별계시입니다.
‘성경은 특별계시다’ 라고 할 때 성경은 다른 일반 책과는 다르다는 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특별계시다’ 라고 하는 것은 성문계시 속에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들어 있으니 그 면을 보고 특별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은밀계시 의지계시라고 해도 좋습니다.
특별계시인 이 성경은 내가 태어나기 전이건 그 이후건 나에 대해 과거 현재 미래를 알려 주고, 인류에 대해 과거 현재 미래를 알려 줍니다.  또 교회에 대해 과거 현재 미래를 알려 주고, 세상에 대해, 천국에 대해, 심판에 대해 과거 현재 미래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셨으며, 어떤 마음으로 인간 나를 만드셨으며, 또 나의 미래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심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게 특별계시를 아는 것입니다. 
인간을 특별계시로 통해 볼 때 인간 한 존재가 생각하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에는 산(生) 생각과 마음이 있고, 죽은(死) 생각과 마음이 있습니다.  또 활동성에도 산 것이 있고, 죽은 것이 있습니다.  천국에 해당되는 생각과 활동이 있고, 지옥에 해당되는 생각과 활동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존재적으로 ‘천국 간다, 지옥 간다’를 놓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입은 활동이 있고, 입지 못한 활동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보면 내가 예수 믿고 뜯어 고쳐진 마음과 정신이 있고, 아직까지 주님의 성품대로 고쳐지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나 한 인간을 성분적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또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한 부분이 있고, 마귀에게 속해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적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 인간에게 다 알게 해 주려 하니 계시가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영원히 후회 없이 사는 것이다’ 하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계시입니다.
앞에서 말한 인간에게 향하신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뜻과 의지를 성문계시(성경) 속에 담아서 주셨습니다.  이런 것을 아는게 특별계시입니다.  그러니까 성문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 하나의 활동 생활 역사 속에는 그런 것이 다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의 영원 궁극적 구원과 직결이 되는 것인데 우리가 아무리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라고 말한다 해도 바로 이런 인간의 궁극적 구원에 관한 것을 모르게 되면 계시를 주신 효력을 보지 못하고 가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흔히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라고 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앞에서 말한 그런 계시의 개념이 아닌 다른 개념으로 계시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역사적 계시개념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문화된 문서계시인 이 성경을 시대적 역사적으로만 연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계시의 개념은 그런 것을 아는 것이 계시라고 하는 것이지요.  성경에 있는 인간의 나이와 시대적 연대를 계산해 가지고 ‘이 시대 다음에는 무슨 시대가 온다, 어떤 나라가 어떻게 된다’는 식으로 역사적으로만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 시대 이후에 어떤 시대가 온다’고 하는 것을 미리 알아 맞추는 것을 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우상의 꿈을 꾼 것이라든지, 다니엘이 환상을 본 것 등을 역사적으로 많이 연구합니다.  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한 역사라든지 그 연대를 계산해 시대적 역사적으로 펼쳐 내는 이것을 계시라고 하는 거지요.  이것은 성경을 역사적 계시개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성문계시인 성경에는 이미 있었던 역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역사 자체를 알려 주려는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역사는 역사로되 그 역사를 들어(그 역사를 일으켜서) 거기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구원도리와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역사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들어서 계시를 발견하라고 그 역사를 일으켜 기록케 해서 우리에게 준 것이니까 우리는 그 역사 속에서 구원도리를 붙잡아야 하는데 이 영원 궁극적 구원도리는 놓치고(모르고) 단순히 역사적 계시개념만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도 성경을 그렇게 역사적 계시개념으로 연구를 하면서 하나님을 닮기 위해 그렇게 연구를 하고 열심을 낸다고 말들은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는 혹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게 한다거나, 사역 면에서 큰 일을 이루어 놓을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문제는 그렇게 해서는 주님으로 닮아질 수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그렇게만 봐 버리면 거기에서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 궁극적인 뜻과 의지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니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나의 것으로 삼아 나에게 다가오는 사건과 환경과 마찰과 충돌과 대립을 통해 천국을 하나님처럼 마음껏 누리고 다스릴 수 있는 실력인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자체화 인격화 실상화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역사라고 하는 표면 속에는 사상적 정신, 혹은 사상적 흐름이 있습니다.  미래가 현재 되어 나에게 오는 어떤 사상적 흐름이 있고, 그런 환경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을 통해 잘 깨달아서 영능의 실력을 진리의 자체화로, 진리의 사상화로, 진리의 인격화로, 진리의 실상화로 진리이치대로 만들어 나가는게 옳은 믿음입니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좋으나 거기에서 궁극적 구원을 놓치면 큰 일입니다.  사단 마귀의 역사는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표면적인 역사를 모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성도를 인격적 성품적으로 주님처럼, 하나님처럼 만들어지지 못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보지 못하도록 하려고 성경을 단순히 역사적 계시개념으로 보도록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 마귀는 성도를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못하게 합니다.  기본구원을 입지 못하게가 아닌 성화구원 이룰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귀가 절대로 방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령 성경을 역사적 계시개념으로 보아서 ‘어느 시대가 지나면 어느 시대가 온다’고 알고 있었고, 더 나아가 알고 있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해도 자기가 현실에서 주님처럼 진리자체화로 만들어지지 못했다면 자기는 그 사건에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자기가 어떤 사건을 만나서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넘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것보다도 더 나아가 영원 궁극적 구원을 놓친 상태로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이것을 놓친 것이 넘어진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진리에서 이탈되어 세상사상화로 되어 있는 것이 넘어진 것인데 그런 상태로 넘어져 있는 자기를 볼 줄 모르는 것이 불쌍한 자기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진리자체화로 자라지도 못하고, 지혜지식성이 도덕성이 능력성이 진리실상화로 온전히 자라지도 못하고, 자신의 신앙사상이 성분적인 면에서 넘어져 있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충성 봉사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건물에 목표를 둔 신앙열심이라든지, 교인을 많이 모으자는 열심이라든지, 또는 일반도덕성에 대한 열심이라든지, 일을 많이 해서 상급을 타자는 열심 등 진리에서 이탈된 잘못된 열심들을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애굽 왕 바로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붙잡았고, 신약의 마태복음 4장에서는 마귀가 그러한 세상을 이루려면 그 세상을 돋보고 절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마귀는 진리이치와 구원의 가르침과 사람이 주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자라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이런 것을 바로 가르치는 빛된 교훈 앞에서는 자기의 가면이 벗겨지고 자기의 본성이 드러나니까 이런 진리이치를 아주 미워하며 죽이려 드는 겁니다.  주님이 받으신 고난이나 선지사도들이 받은 환난에서 이런 사단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역사적 개념으로만 알고 영원 궁극적 구원을 발견하지 못하면 현실에서 이룰 구원을 다 놓치게 됩니다.  계시록에서 이런 것을 다 보여 줍니다.  이런 자들은 역사의 큰 바람이건, 자기 개인에게만 부는 사건의 바람이건 그런 바람이 부는 날에는 그 자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역사적 계시개념만 알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즈음 그렇게 가르치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이 있고, 그것을 따라가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앞에서 말한 역사적 계시개념이 아닌 다른 개념으로 계시를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성경에 하나님께서 꿈이나 음성이나 환상 등으로 나타나신 사실들이 기록돼 있으니 자기에게도 그와 같이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를 바라고, 보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식의 계시개념은 이미 완성해서 준 성문계시인 성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본질적으로 다르고, 본성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성경의 성문계시 속에는 성령님의 감화로 된 구원도리와 진리이치가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성문계시로 주는 선지사도들의 꿈이나 환상, 또는 바로 왕이나 느브갓네살 왕이 본 것이나, 당나귀의 말 등 전부는 우리의 구원도리 진리이치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성경에서 나오는 것과 똑 같은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 등을 보고 들었다고 해도 거기에는 구원도리 진리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도리 진리이치를 깨달아야 참 신앙이요, 주님처럼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게 아니니까 자기가 아무리 환상을 보고, 꿈을 꾸고 해도 거기에는 주님처럼 인격이 성장하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가 본 것은 특별계시가 아닙니다.  성문계시인 성경은 만인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자기가 꿈이나 환상 등으로 보고 듣는 것은 자기 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신앙상태에 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도리와 진리이치에 대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게 기록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 자기 자신이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을 보거나 듣거나 했다면 그것은 남에게 자랑할 일이라거나 믿음이 좋은 증거가 아니고 ‘내가 오죽 성경을 못 깨달으면 그런 것이 보여질까’ 하고 회개를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 것을 보거나 듣거나 하지 않고도 이미 기록완성해 놓은 성경에서 깨달아 옳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또 음성을 듣고, 꿈을 꾸고 했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두 명입니까?  그런 것을 보고 듣고 했다는 사람마다 각자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성경처럼 말하고, 성경 시 주장하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이미 완성된 성경 뒤에 또 추가를 하고, 또 추가를 해야 될텐데 그렇게 된다면 성경이 얼마나 커지겠습니까? 
이러는 그들은 죽어도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을 성경 시 한다거나, 성경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지만 그들이 어떤 식으로 말하건 보고 들은 그런 것을 주장하는 것은 이미 완성된 성경 외에 다른 무엇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성경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기에 부족하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것이니까 그 자체가 곧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성경 이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또한 보고 듣고 하는 것을 성경 시 하게 되면 사람들이 보고 들었다고 하는 것 중에는 마귀가 보여주고 들려주고 한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마귀가 장난한 것도 성경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되니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깨달아 질 수가 있겠습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보고 들은 것을 다 계시라고 한다면 계시의 기준이 없어집니다.  성경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고 한 것에 대해 회개는 하지 않고 성경처럼 말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주장을 하고, 그것을 근거를 하고 예수를 믿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자는 악령이 들린 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이런 악령이 들린 자들이 판을 치며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완성시켜 준 성문계시인 성경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하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다시 정리해 봅시다.
먼저는 역사적 면으로만 보는 역사적 계시개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역사연구도 좋으나 영원 궁극적 구원을 놓치면 사람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를 않습니다.  그 다음에 성경 외에 무슨 음성이나 환상이나 꿈 등을 보고 들은 것을 주장하며 그런 것을 보고 듣는 것이 계시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영원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모두 기록된 성문계시를 이미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것 외에 무엇을 더 보고자 하고, 듣고자 하고, 거기에서 힘을 입어 신앙하고, 그것을 성경 이상으로 주장하고 간증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계시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본질적으로 성경의 계시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계시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은 성문계시 속의 구원도리 진리이치를 깨닫게 하고 주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뭘 보고 듣고 해도 거기에는 구원도리 진리이치가 없습니다.  만들어지는게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로 닮아지는게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문계시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를 깨달아 영원 궁극적 구원을 잘 이루어 갈 수 있는지를 본문을 중심으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는 땅으로부터,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 또는 세상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기독교 종교적으로 인간 잔머리 잘 굴리고 잔꾀 쓰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는게 아닙니다.  이런 자들은 도리어 자기의 교만으로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계시를 자기가 자기에게 받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계시를 나타내 주실까요?

25절: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아이들은 나이상으로나 경험상으로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상태이지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신앙적으로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계시를 주시면 그 사람은 딴 것은 아는 것이 없으니까 받은 계시만을 받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 것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을 말한다 그 말입니다. 

26절: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세상 것을 소원하거나 목적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영원 궁극적 구원만을 잡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을 잡고 사는 자들에게 계시를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그 말입니다.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께서 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을까요?  아들이니까! 
그러나 아들도 아들 나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 할 때는 단순히 그냥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의 마음을 잘 알고,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는 상태가 원칙적으로 바로 된 아버지와 아들 사이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 목적이 무엇인지, 취미가 무엇인지, 아들이 늘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잘 아십니다.  반면에 아들 역시도 아버지의 소원 목적을 잘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늘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아들 자기에게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지금 나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인지 아버지의 그 마음을 아들이 잘 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의 그 마음이 좋고, 아들은 아버지의 그 마음이 좋으니 뜻이 하나가 되고, 마음이 하나가 되고, 소원 목적이 하나가 되고, 모든 것이 단일(單一)이더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신령계와 물질계,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시더라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아버지의 좋은 것을 얻으려면 어디로 가면 되지요?  그 아들에게 가야 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안다는 것은 존재적으로 안다라기 보다도 인격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아들과 아버지를 알면 계시를 받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을 알면 계시를 주십니다.  계시를 받음으로 아버지를 압니다.  계시를 받지 못하면 아들과 아버지의 뜻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계시란 깨달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받지 못하면 신앙성장은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 목적성을 따라 가는 자가 계시를 받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우리에게 향하신 소원은 하늘나라 신령천국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로 그 신령천국을 하나님 아버지처럼 활용하고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영원 궁극적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니 지금 현재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를 진리자체화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려면 인간 자기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그 소원성과 같은 소원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 자기가 만들어집니다.  의사단일이 되지 않으면 맞추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고, 두 번째는 예수는 믿되 자기 소원대로 세상 것을 이루어 달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찌 계시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것을 이루어 주시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겠습니다’ 라고 해도 그 말하는 것이 진심에서 하는 말이건, 거짓으로 하는 말이건 간에 이것은 세상 조건적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다 세상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것에 많은 기독자들이 속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계시를 받지 못하면 모릅니다.  알 길이 없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아들과 아버지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곳입니다.  즉 성경을 깨닫게 하는 곳입니다.  성경을 통해 구원도리 진리이치를 깨닫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인간들이 모여서 ‘일 크게 하자, 종교적 활동적으로 우리 교회의 이름을 날리자’는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교회가 가질 소원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사람이 질적으로 사상적으로 소원적으로 아들과 아버지의 소원과 단일이 되어지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성경이 깨달아 지겠습니까?  깨닫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들과 아버지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이치와 성도의 구원도리를 교회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모여서 단체 만들어 일 크게, 활동 크게 하자’ 이런 것은 교회 밖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이치대로 바로 깨달아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것은 오로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아들과 아버지의 계시가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아들과 아버지의 계시가 없는 교회가 많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종교일 뿐입니다.  이런 가르침에는 물질강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많이 내면 세상에서 복 받는다’ 이런 강조가 있고, 또는 ‘하나님 앞에 충성 봉사를 많이 하면 천국에서 큰 상 받는다’ 라는 강조가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 기본구원을 받았다 해도 이룰 구원은 중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에는 계시가 없습니다.  구원도리 진리이치의 깨달음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모릅니다.  모르니까 사귐이 되지 않습니다.  사귐이 되지 않으니 의사가 통하지 않습니다.  의사가 통하지 않으니까 의사단일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그 날에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것처럼 부끄러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도, 또 모든 소원 목적의 활동들도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는 후나 속 사람이 신앙 인격적으로 신앙 사상적으로 바꾸어지고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예수 믿기 전보다도 예수 믿은 후가 옛사람의 주격성이 더 단단하게 굳어져 버립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은 졸지에 깨어질 날이 있을 것입니다.  본 장 21절부터 23절까지를 보면 ‘차라리 두로와 시돈에서 권능을 행했더라면...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고, 또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 날의 심판이 불신앙자들이 받는 심판보다 이질적인 신앙자들이 받을 심판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안 믿는 사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안 믿는 사람을 들어서 ‘네 속에 이런 것이 들어 있지 않느냐’ 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한 말처럼 돼 있는 것입니다.  소돔땅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었지요?  그런데 그 소돔사람들에게 ‘심판 날에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믿는 자 보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옛사람으로 깡깡하게 굳어져서 그것이 깨어질 줄 모르고, 사람이 바꾸어질 줄 모르고 예수 믿는 자는 그 시간이 얼마나 갈런지 모르지만 아예 심판의 도마에 올려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버나움아 벳새다야 고라신아’ 라고 하시며 이 고을들에게 심판의 말씀을 하신 것은 그 고을들이 심판을 받기 전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심판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 고을 사람들의 신앙성분을 가진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동일한 말씀으로 그 심판의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심판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심판을 받지 않은 것이니까 그래도 큰복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이 소리를 듣고 속히 회개를 해야 합니다.

25절: 그 때에.
심판의 선언을 하신 때, 즉 불신사상적 신앙을 가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믿지 않았지요?  선지자의 특별한 생활과 그의 말을 듣고 깨달아야 할텐데 흠만 잡으려고 했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도성인신(到聖人身)해서 오셨으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존재성도 안 믿었고, 말씀도 안 믿었고, 예수님의 표적의 뜻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표적을 그렇게 많이 행했는데도 도리어 헐뜯고 훼방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은 죽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 때 뿐만이 아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며,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을 받는다고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미 되어진 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때 당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정신의 흐름과 사상의 흐름이 있었는데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날 나에게서, 교회에서 흐르고 있지 않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오늘날 자기에게 흐르고 있다면 여지없이 심판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볼 줄 안다면 계시를 몰라서 심판을 받았던 당시의 그들의 사상이 오늘날 교인과 교회 속에 만연해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본질적인 계시가 아니면 아들과 아버지의 소원 목적을 모릅니다.  모르니 깨닫지 못하고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구원도리와 이치는 모른 채 역사만 알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영원 궁극적인 구원이 없는 신비체험만을 따라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독교는 신비 자체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자체가 신비 아닙니까?  그러나 ‘신비주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신비주의에 속해 있으면서도 ‘나는 신비주의가 아니다’ 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참으로 불행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되 헛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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