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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도의 의무와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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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
하나님께서는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무슨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아무 목적이나 뜻도 없이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런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도 여러 만물들을 짓다보니 그 만물 가운데 인간도 있어야 하겠기에 그 만물들 중에 하나로 인간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원인과 동기와 목적 하에서 인간을 지으신 것이다. 

1. 인간창조의 원인(原因).
하나님께서는 절대자요 완전자요 선성(善性)과 애성(愛性)이 충만한 분이신데 이 선성과 애성은 그 속성(屬性)상 상대성(相對性)을 가지는고로 이 애성은 필연적으로 상대성을 찾게 된다. 
이 인격적 속성에 의해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누리시던 쾌락과 향락의 극치인 천국을 당신과 함께 누릴 존재를 만들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인데 바로 이 하나님의 인격성이 원인이 되어 인간을 지으시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격성을 가지지 않으셨다면 인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2. 인간창조의 동기(動機).
자존자요 독존자요 영원자요 생존자요 인격자요 무한자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 나라는 무한한 곳이요, 영원히 새로운 곳이요, 완전한 신령계로서 하나님께서 그곳을 최고의 극치의 쾌락과 향락을 완전하고도 충만하게 누리고 계셨기 때문에 당신 혼자 그곳을 누려도 족하지만 하나님의 속성인 애성과 선성의 발작으로 인해 그 좋은 신령계를 당신 혼자 누리길 원치 않으시고 타 존재와 함께 인격적 애정적 수수 관계적으로 누리고 싶으셔서 그 대상자로 인간을 짓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3. 인간창조의 목적(目的).
대개는 인간타락 후부터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본격적으로 된 것으로 보는데 이렇게 주장을 하게 되면 하나님은 좀 모자라는 인격자가 된다.  왜냐하면 굳이 타락 후에 구원사역을 할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에 인간을 지으실 때부터 타락하지 않도록 지었다면 복잡하고 힘들게 두 번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인간이 타락할 것을 하나님께서 예상하지 못하고 지어놨는데 인간이 그만 타락을 해서 할 수 없이 구원사역을 다시 수행하셔야 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은 만물을 짓기 전, 인간타락 이전, 영원 전부터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자요 완전자요 세밀하신 분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시던 목적이 없는 일을 행하실 리가 없다.  인간창조 역시 분명한 목적 하에 하신 것이다.

(1) 후사(子)를 삼으려고(엡1:5, 3:6~).
하나님은 모든 면에 완전 무한 충만하신 분이므로 신령계에서 독존자로 계신다고 해서 부족이나 불행이나 고독함이나 쓸쓸함이 있는게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인격성과 애성과 선성으로 인해 그 좋은 천국을 당신 혼자 누리시기에는 인간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너무나 좋고 아까워서(?) 함께 누릴 어떤 상대를 지어서 그로 하여금 그 나라를 당신과 함께 누리고 다스리고 즐거워할 수 있는 후사로 삼아 당신이 현재적으로 그 나라를 통치 지배 활용 사용하며 누리는 것처럼 당신의 애성의 상대자도 함께 누리도록 하려고 인간을 지으신 것이다.(하나님의 子권 주권 소유권 활용권을 줘서)  여기서 후사라는 말은 하나님 당신이 죽고 나면 대를 이어 어떤 일을 맡기신다는 의미에서의 후사가 아니다. 

(2) 영원한 사랑의 대상자를 삼기 위해서.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각이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으로는 아가페 사랑을 계시하고 있다.  이 아가페 사랑은 단어학 사전학 원어(原語)학적으로는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이라고 하지만 성경이 계시하는 아가페는 생명적 무조건적 다양적 복합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 한 분에게서 이런 여러 사랑의 맛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부모 형제 친구가 필요 없이 모두가 한 형제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사랑의 관계로 신령계에서 주님과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로써 극치의 기쁨을 영원히 누릴 수 있게 해 주실 목적으로 인간을 지으신 것이다.

4. 인간을 특별도모로 지으신 이유.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서 분명한 원인과 동기와 목적 하에서 인간을 지으시되 다른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지으셨는데 성경에 계시한 대로 보면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특별도모가 없이 지었지만 인간을 지으실 때는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 특별도모(圖謀) 하에서 지으셔야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되 직접 천국에서 지어서 그 천국을 당신과 함께 영원히 누리도록 하시지 않고 세상을 만드시고, 이 땅에서 인간을 지어 살도록 하신 후에 그 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인간이 보기엔 번거로운 일 같고, 불필요한 일 같이 보이지만 완전한 분이요 선이요 사랑이신 분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천국에 데리고 가서 살게 하시는 것이니 만큼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요, 인간에게 가장 유익이 되므로 이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 독존하시던 그 신령계를 인간에게 영원히 유업으로 주셔서 그 인간이 하나님의 자권(子權)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적 총애를 받으며 천국을 마음껏 누리며 영원히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좋기 때문에 이 방법을 택하셨다는 말이다.

(1) 인간을 인격자로 지으신 이유.
어떤 사물을 보고 기쁨과 만족을 누린다거나, 무슨 일을 계획하거나 추진하는 것은 지정의(知情意)를 가진 인격자만이 가능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 인격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천국을 지으시고 그곳을 통치하고 누리고 기뻐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께서 당신이 속성적으로 가지신 선성과 애성에 의해 인간을 지으시되 그 인간이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천국을 당신과 같은 차원으로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신과 같은 인격자로 지으셔야만 했던 것이다. 
천국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 천국을 돼지에게 준다고 하면 이 돼지에게는 천국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적응이 되지 않아 온통 고통뿐인 것처럼 인간을 지어서 천국에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그 천국을 만드시고 통치하시고 누리시는 하나님의 그 인격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인간에게는 천국이 아무런 기쁨도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천국을 하나님 당신처럼 누리고 통치하고 기뻐하도록 하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애정적 수수관계를 가지도록 하려면 하나님의 그 인격성을 닮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을 지으시되 하나님의 인격성을 닮은(닮을 수 있는) 인격성자로 지으신 것이다.

(2) 인간을 이 땅을 거쳐서 천국에 데려가시는      이유.
인간을 인격자로 지어서 이 땅을 거쳐가도록 하신 것 역시 당신의 선성과 애성에 의해서인데 모든 인간을 똑같이 지어 바로 천국에서 살도록 한다면 그 인간에게는 천국의 기쁨성 쾌락성이 축소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애성과 선성의 속성상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지으시되 이 땅에 살면서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실력을 닦아 오도록 하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격차성(格差性)이 생기게 되는데 이 격차성은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 스스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 되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을 쉬운 예로 든다면 남이 그냥 줘서 얻는 것보다 내가 노력해서 얻는게 더 기쁘고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그리고 모두가 100점을 받아 다 같이 1등상을 타는 경우와, 내가 남보다 더 노력을 해서 나 혼자만 최고 점수인 100점을 받아 혼자서 1등상을 타는 경우가 있다고 할 때 같은 100점을 가지고 1등 상을 타는 것이라도 경쟁을 해서 여러 사람 앞에서 나 혼자 1등상을 받는 것이 더 기쁘고 보람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선(善)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천국을 누리되 가장 극치로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을 인격자로 지었고, 이 땅에 살게 했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신앙의 격차가 생기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신앙싸움을 싸우지 않아 남보다 주님을 많이 닮지 못했고, 그 결과로 천국에서 다른 성도들보다 뒤떨어진다 해도 남 탓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기본구원, 즉 중생에 관한 말이 아니고 중생한 자로서 성화구원 면에서의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되 특수한 목적이 있으셔서 특수도모로 지으신 것인데 특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인격자로 지음을 받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격성 중에도 특별한 것은 인간이 성품과 속성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을 닮을 수가 있고, 마귀를 가까이 하면 마귀를 닮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닮던지, 마귀를 닮던지 하는 그 관건은 인간에게 주어진 절대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살면서 닥치는 모든 사건 환경 속에서 내가 하나님 쪽을 택하느냐, 마귀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자에게 있어서 옳은 교훈을 받고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인간이 천국에 간다고 무조건 그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닮아야 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처럼 그 세계를 누리고 다스리고 기뻐할 수가 있는 것이며, 많이 닮으면 닮을 수록 그 기쁨은 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늘 하나님 쪽을 택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3)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신 이유.
이런 인간으로 창조하셔서 아무 곳에서나 살게 하지 않고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거기에서 살도록 하시고, 앞에서 말한 바대로의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목적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의무와 책임을 주셨는데 이렇게 하심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도록 하심도 아니고, 또한 인간을 부려먹고 이용해 먹고 영광이나 받아먹으려고 하신 것도 아니고 이 에덴동산에 살면서 신령계인 천국을 하나님처럼 마음껏 누리고 다스리며 하나님과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실력자가 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이라고 했으니 지상 최고의 좋은 곳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곳에 살면서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할 텐데 그것은 모른 채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겠지’ 하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이 그렇게 생각하는 세상 그곳(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곳)이 하나님께서도 최고의 좋은 곳이냐 하는 점이다.  아담 자기 생각에 최고의 곳일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그 에덴동산이 영원한 신령계를 계시적으로 가장 잘 깨달을 수가 있는 최고로 좋은 곳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즉 내가 누리기에 좋은 곳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대로의 인간이 최종적 궁극적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장소로써의 최고로 좋은 곳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신 것이다.  옛날 아담에게만이 아니고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최고로 좋은 곳을 다 주었으니 우리들에게 있어서 에덴동산은 곧 자기의 모든 현실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면 그곳이 에덴동산이니 나의 모든 현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곧 에덴동산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불행한 사건이요 현실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 세상 어느 곳이 건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면 그곳이 곧 에덴동산이다. 
앞에서 생각해 보았듯이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죽음이 없이 영원히 살게 하려고 한 것이 인간창조의 본래 목적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그러했었는데 인간에 의해 그것이 파괴되었다면 하나님의 전지성과 완전성은 파괴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쩌면 인간만도 못한 하나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도록 하신 것은 후대 모든 인간에게 주실 계시목적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덴동산)에 살게 하신 그 본래의 목적을 바로 알고 그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二.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인간의 의무.
에덴동산을 막연히 주신 것도 아니고, 막연히 살라고 한 것도 아닌 거주함에 있어서 의무가 있는데 인간이 이 의무를 모르면 낙원과는 영원히 상관이 없는 자로 살게 된다.  그러나 이 의무성을 깨닫고 이 의무대로 살면 그것이 자기의 현재적 미래적 낙원이 되는 것이며, 이렇게 살게 될 때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천국을 하나님처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실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원 목적대로 사는 것이다.

제1의무: 은밀계시를 잡고 살아라(하나님의 목            적성).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성문계시(성경)를 통해 깨달아야 한다.  즉 에덴동산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나를 왜 여기에(이 세상에) 살게 했는가’ 하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아는 것이다.  누릴 목적으로 살라는 말인가?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라는 말인가?  나의 기능적 지능적 인격적 온전을 위해 살라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에덴동산을 주셨는가, 왜 이 현실을 주셨나’ 하는 이것을 아는 것이 은밀계시를 아는 것인데 그것은 구원을 이루라고, 영적 실력을 배양하라고,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닮으라고 주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기 전에는 나에게 처해진 현실이 나의 믿음실력을 키우라고 준 것임을 몰라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좋아했고, 미워하는 사람이 오면 원망 불평했고, 현실이 내 마음에 안 맞으면 원망 불평이 나오고 남에게 탓을 돌리고 했었다면 예수 믿는 지금은 어떤가?  사건 환경이 오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 즉 나를 하나님을 닮게 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최고의 극치의 기쁨을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적 실력을 키워 주시려는 하나님의 그 은밀하신 뜻은 모른 채 나 좋도록, 내 계획대로 사건 환경을 바꾸어 주고, 갖다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이것은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잡지 못한 것이고, 하나의 패역일 뿐이다.  오늘날 기독자들 대부분이 이런 식의 신앙을 지지하고 있고, 이런 식의 신앙이 팽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2의무: 거처의 의무.
이 낙원(자기의 현실)은 구원을 이루기에는 세계 어느 곳보다 가장 좋은 곳이므로 자기의 현실에 불만을 가지지 말고 이 현실 속에서 제 1 의무인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잡고 살아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밀계시(의지계시)를 저버리면 불만이 나오게 된다.(누리는 주의)  아담은 첫째 의무(은밀계시를 잡고 살아라)를 저버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두 번째 의무도 저버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입어가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누리는 목적으로 살다보니 현실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정적인 동기는 인간으로서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사는 것에 대해 만족이 아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여기(에덴동산)서 살아라’ 한 것은 영원히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 온전자가 되어 천국에 오라고 하는 은밀계시가 있는 것인데 이 은밀계시를 버리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까’ 하고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나온 것이다. 
우리는 ‘에덴동산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시는 계시적인 면을 알아야 한다.  에덴동산(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서는 심신(心身)이 하나님의 영에게 결합이 되어 살아야 하는 것인데 몸은 에덴동산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에덴동산을 떠나 다른 곳에서 만족을 누리려 한다면 이는 제 2의 의무수행을 어긴 것이다.  오늘날 나에게 마련해 주신 이 환경, 현실이 에덴이다.  여기에서 은밀계시를 붙잡지 못하고 마음이 이탈하면 에덴에서 살 자격박탈이다. 
현실불만 죄, 이것은 죄가 최초로 들어온 과정이요 순서이다.  이것을 통해 범죄의 과정의 순서를 깨알아 사전에 죄를 차단해 나가야 한다.  죄의 기원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사건으로부터가 아니고 그 이전에 하나님의 은밀계시(의무성)를 버린 것에서부터이다. 
거처의 의무를 다하라는 말은 현실에 대해 만족하라는 것인데 자기 자체에 대한 만족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현실에 대해 은밀계시를 깨달아 만족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좋은 환경을 달라고 하지 말라!  구원을 이루는데는 현재 처해진 그 현실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그 현실은 각자에게 가장 잘 맞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 은밀계시를 붙잡고 자기 자체를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하나님의 성품을 닮아라)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왜 이 환경을 나에게 주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하던, 어떤 일을 만나던 현실에 불만을 가지면 그 자체가 타락이다.  현실에 불만을 가지면 현실에서 맺을게 다 날아간다.  마귀의 속셈은 현실을 다 날려버리는데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주어져 있으니 그것은 천국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체적 자기를 잘 만들어 오라는 것인데 그것을 다 까먹게 하는 것이다.

제3의무: 통치하라(다스려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다른 그 어떤 존재에게도 순종도 의존도 동화도 지배도 받지 말고 통치하라고 했다.  통치하라고 할 때는 통치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 것이다.  이 통치를 하는 것이 순종이요, 반대로 통치를 받는 것은 불순종이요 죄다.  하나님의 온전성을 입어 가는데는 이 낙원동산(현실) 이상 없다.  그럼에도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은 통치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은밀계시를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모르면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나온다.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의존적 피동적으로 살면서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에게 통치를 받는 것 자체가 죄이다.  ‘다스리라’고 했지만 현실에 대한 불만이 나오면 그 명령에 불순종하게 된다.
다스리는 순서로는 (1)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2) 몸을 다스리고→ (3)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됨→ (4) 이렇게 되면 만물을 다스리게 됨.

(1) 마음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자기가 자기를 다스려야 하는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이것만 다스리면 딴 것은 다스리기가 쉽다.  이게 안 되면 남을 못 다스린다.  자기 마음을 가만 내버려두면 자기 몸은 막 돌아다닌다.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능력자요 유능한 사람이다.  마음이 진리를 따라야 하는데 돈을 따라다니고(목적이) 세상을 따라다니면 우리 마음은 쓰레기통이 된다.

(2) 몸을 다스려라.
눈 코 입 손 발을 잘 다스려라!  자기 마음을 안 다스려 놓으면 마음이 몸보고 가자고 한다.  눈도 발보고 가자고 한다.  이렇게 되니 입을 징발(徵發)하고, 귀를 징발하고, 자꾸 죄 짓는 대로 나간다.  그러니 행동 이전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자기 자신을 못 다스리면 만물을 못 다스린다.

제4의무: 지켜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통치를 하게만 한 것이 아니고 또 수호적(守護的) 의무를 명령했다. 
(1) 외계의 것이 내계로 침범하여 들어오는 것을 막고.
(2) 내계의 것이 생명권 외계로 나가는 것을 막고.
자기가 자기를 적극적으로 통치하게 되면 염려가 없으나 이 일이 중단이 되면 지킬 힘도 없어지고, 통치권도 박탈이 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들어와서는 안될 그 어떤 존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하는데, 뱀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하는데 지키지 못 했다.  지키지 못하면 죄다. 
내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내 소원 취미 모두는 생명외계로 탈출을 하게 되니 이것이 못 나가도록 지켜야 한다.  자기의 자체의 것이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외부의 잡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고, 특히 정신적 신앙 면에서 옳은 신앙정신이 나를 다스려야 하고, 또한 내 속의 옳은 것이 나를 떠나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  그리고 밖의 잘못된 정신 사상 소원 목적(세상 것)이 내 속에 들어와 자리잡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내 속에 진리말씀이 충만하고(은밀계시) 그것으로 만족해야 인격적 면이 고상하고 깨끗해진다. 

제5의무: 따먹어라(생명과).
하나님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부터 말씀을 한다.  ‘다스려라 따먹어라’ 하는 것은 긍정적 적극적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구원 까닭이다.  생명과와 일반과를 먹고, 신앙양심에서 나온 아름다운 생각 미덕 행동을 하라는 말이다. 
제 1 의무를 지키면 2, 3, 4, 5의 의무는 자연적으로 지키게 된다.  내가 먹기 좋은 과실을 먹을 때는 영이 진리가 양심이 방해치 않는다.  기독자가 영원히 먹을 것은 생명과이다.  우리는 나의 영에 양심에 방해가 안 되는 것, 영이 찬성하는 것을 먹어야 한다.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영이 자라나고 튼튼해지고 지혜지식의 깨달음이 자란다.

제6의무: 먹지 말라(선악과).
이 과실은 선과 악이 함께 들어있는 과실도 아니고, 과일 자체 속에 선이 들어 있다거나 악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과일을 따먹으면 그 결과가 선을 아는 일에 주관적이요, 자율적으로 되는 것이니 이 열매는 과연 금단의 열매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체보다 따먹기 이전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버린 그것이 죄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에덴동산에 두신 목적을 잊어 버렸다.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버리고 나면 현실을 왜 주었는지를 모르니 현실에 대한 불만이 나오게 된다.  불만이 나오는 것은 현실에서 누리려고 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현실불만은 현실태만이 되는 것이다.  다스리지 못하면 지키지 못하고, 그렇게 되어지면 뱀(마귀)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면 여자가 다스리게 되고, 여자는 뱀에게 다스림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다스려야 할 자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타락이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아담에게 주었는데 그 때 아담은 어디 가서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아담이 딴데 안 가고 하와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옆에 있었던 없었던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마음이 강하게 있었다면 하와가 주는 것을 받아먹었겠느냐?  결국 선악과를 따서 건네준 하와 탓이 아니고 자기 마음을 못 다스려서 주는 것을 받아먹은 아담 자기 탓이다.
내가 세상 사는 목적을 선악과에 두지 말라!  세상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을 취하려고 하지 말라!  이런 세상 것을 취하면 나의 삶의 기준과 척도가 하나님의 것이 아닌 아담 타락 이후의 인간의 타락된 주관에서 나온 하나님과는 이질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게 되니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 되어버려 자기의 궁극적 영원한 영광과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5대 의무를 수행치 못하면 필연적으로 제 6대 의무인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이것은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한 성문율(成文律)을 어기는 것이다. 
우리는 성문율을 어기는 물행(物行)만 죄로 여길 것이 아니고 주님 말씀에 비추어 무형행(無形行), 심행(心行)에서부터 죄가 되는 것임을 알고 그 죄를 짓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생명과를 따먹으며 살아야 한다. 
‘따먹어라, 따먹지 말라, 에덴동산에 거처하라, 다스려라, 지켜라’ 하는 것은 모두가 성문계시이다.  이 성문계시 이면에는 은밀계시가 있다.  이 은밀계시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성문계시를 표면적으로 지킨다 해도 바로 지키는 것이 못 된다.  성문계시 이면의 은밀계시를 붙잡고 성문계시를 하나 하나 지켜 나가면 은밀계시를 지키게 된다. 
흔히 보수계열에서 성경에 기록된 액면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성경에 할례를 받으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도 할례를 받아야 하나?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액면 그대로 지키려면 지금도 그 치수대로 방주를 지어야 하나?  오른 손이 범죄 시 손을 잘라야 하나?  고로 우리는 성문계시 이면의 은밀계시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三. 에덴에 흐르는 네 강.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인간으로서 이 6대 의무를 다 행하게 되면 이제 그 앞에는 강(江)이 있으니 이 강을 통하여 수입(은혜)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네 강(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을 기록한 것은 지형적 위치를 가르칠 목적이 아니며, 낙원의 위치를 가르칠 목적이 아니다. 
성경은 계시목적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계시적으로는 조금도 오류가 없이 가장 적합하게 기록이 되었지만 역사적 지리적 사회학적으로는 맞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 중 8절에 ‘요람이 웃시야를 낳았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아마샤가 웃시야를 낳았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는 맞지 않으나 계시적인 면으로 기록을 하자니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1. 비손강.
이 강을 첫째 강으로 이름한 것은 강이 크기 때문이거나 다른 강의 원줄기이기 때문이 아니고 계시 때문이다. 
이 강 바닥에는 정금 베들리엄 진주 호마노 등의 귀중한 보배들이 있지만 그 위로 물이 흐르고 있으므로 바닥에 있는 그 보석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자들은 그 강속에 있는 보배를 채취할 것이다.  이 강을 그냥 보면 하나의 흐르는 강일 뿐이지만 그 흐르는 물 속에서 이 진주를 캐낼 수가 있는 것이다.  비손강의 이 보물은 6대 의무를 다 마친 자가 가지게 된다.  흐르는 세월, 흐르는 사건 속에 정금 진주 호마노가 있다.  이것을 무진장 캐내서 자기의 황금보석 진주 집을 지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인생의 사건 환경 속에서 강물이 흐르듯 세월이 흐르는데 이 세월은 한 번 흘러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  강처럼 흐르는 이 세월 속에서 하나님께서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통치하라’고 하신 6대 의무를 잘 행하고 나가면 금이라고 하는 것은 값도 비싸고 인간이 최고로 치는 것인데 이 금을 얻게 되면 그 사람은 큰 수입을 보는 것처럼 그 흐르는 사건 현실 속에서 자기가 최고의 신앙의 수입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자가 은밀계시를 잡은 자이다.

2. 기혼강.
이 강은 둘째 강으로 급류로 흐르는 강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이 강에 빠지면 전부 강물에 떠내려가기 마련이다. 
인생의 6대 의무를 다하여 비손강으로 살지 못하는 인생은 그의 시간도 정력도 경제도 자기의 모든 소유도 기혼강처럼 세월의 급류에 다 떠내려가니 자기의 영광된 미래는 없는 것이다.
흐르는 세월 속에 나의 보석들이 빠져 달아나는 것은 영원히 사망계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급류로 흐르는 물에 무엇이던지 빠지면 건지지 못하듯이 한 번 세월에 떠내려간 것은 다시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도 정력도 경제도 흘러가고 다 떠내려간다.  마지막에는 죽음이 찾아온다.  그러나 6대 의무를 지켜 나가면 흐르는 세월 속에서 금을 캘 수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열두 진주문의 믿음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면서 옳은 말씀의 깨달음을 받으면 떠내려가지 않게 되지만 잘못된 곳에 들어가거나 잘못된 교훈을 받게 되면 자기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충성 봉사한다고 하지만 충성 봉사하는 그 지식이 빈약하고 이치가 틀리므로 자기가 한 모든 충성 봉사는 다 도둑을 맞은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열심히 충성 봉사하는 그 자체는 좋은데 교회와 교훈을 분별하는 지식이 없으므로 자기는 한다고 했는데 그 나라에 가서 보면 전부 다 사망계로 흘러가 버린 것을 알고 자기 가슴을 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원한 후회만 있을 뿐 그 나라에서는 다시 회복할 기회는 없는 것이다.

3. 힛데겔강.
이 강은 굴곡이 많아서 강물이 급류로 흐르지는 않지만 급류가 아닌고로 물이 맑지 못하고 많은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다.  오물이 강물에 떠내려 가다가 강굽이에서 걸리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는 가라앉아 썩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썩은 것이 없는가? 
사람이 비손강으로 살지 못하고 힛데겔강으로 살면 겉으로 보기에는 비손강이나 힛데겔강이나 맑게 보이고 똑 같은 강처럼 보이지만 힛데겔강 속에는 오만 찌꺼기가 쌓이고 썩어 냄새가 나듯이 내 속은 썩어 뭉그러지는 것이다. 
내 속에 썩은 것(세상적인 정신 사상)이 들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종교생활 잘 하고, 교회 일에 열심이고, 충성 봉사를 잘 하니 모든 교인들만이 아니고 심지어는 세상사람들까지도 칭찬을 한다 할지라도, 그래서 믿음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어둑침침하고 냄새가 나고 썩은 것들뿐이다.
내 속에 세상정신과 사상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나에게 세상명예 영광 부요 권세를 갖다주었다 할지라도 이런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관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세상 것이요 물질적인 것이요 언젠가는 썩고 냄새나고 불타질 것들이므로 천국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이 내 속에 있으면 모두 걷어내 버려야 한다.

4. 유브라데강(그발강).
이 강은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언약으로 주신 경계의 강이다.  이 강을 표준하여 이남(以南)은 이스라엘이고 이북(以北)은 이방나라 앗수르이다.  그래서 이 유브라데강은 분명히 하나이지만 이름도 둘이며 소유자도 둘이다.  그러니까 이 강은 이스라엘 강도 되고 앗수르 강도 되지만 두 나라를 경계하고 있는 강이므로 어찌 보면 두 나라의 강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범죄를 하면 그 백성을 강 건너에 데려다 놓는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를 하니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해서 70년간 종노릇하게 만드셨다. 
우리는 천국과 세상, 영과 육, 영원과 임시, 참과 거짓을 명확히 가르고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행동적으로 죄를 짓기 이전이라도 사상과 정신적인 면에서 명확히 가르며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을 죄로 알지 못한다. 
이 강은 ‘생명과 사망의 경계를 지으라’고 하는 강이다.  이 경계가 뚜렷하지 못하면 이방세력에 잡아먹힌다.  혈통은 유대인인데 겉으로는 이방인과 같아서는 안 된다.  뚜렷한 경계를 짓고 살아야 한다.  겉으로는 예수 믿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의 정신 사상 습관 전통을 보면 불신자와 같은 자들이 많다. 
내가 만물을 다스려야 하는데 범죄를 하게 되면 만물이 나를 다스리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머리로 하고 우주만물을 발로 밟고 살아야 하는데 만물이 내 머리 위에서 나를 다스리게 되면 나에게 무슨 행복이 있겠는가?  종(縱)적으로는 우리의 머리는 하나님이요, 만물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데 이용하는 발등상이고, 횡(橫)적으로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이웃의 구원을 이루는 면으로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인데 순서적으로나 순위적으로 이것이 바뀌거나 경계가 희미해지면 타락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생명과 사망의 경계를 바로 지으며 살아야 한다. 

四. 결론.
이상과 같이 인간 모두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 자신이 알건 모르건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지으신 궁극목적이 있고, 이를 위한 의무와 책임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인간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궁극목적을 바로 알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행복한 삶이요 영원한 미래를 바로 준비하는 삶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해야할 일도 바로 이것을 알려주고 선포하고 목적적으로 이 일을 위해 모든 가견적인 활동이나 사역들이 진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닌 것은 모두가 거짓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로 세상에서 아무리 인정을 받고 이름을 날렸다고 해도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에 모두는 언젠가는 반드시 날아갈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그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대신 반드시 배신을 하고 자신을 통곡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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