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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랑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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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사람을 감동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일은 참으로 진지한 일입니다. 어떤 인생일지라도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인생은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때로 상대방에게 과도하게 요구하는 경향이 있어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단어는 변화무쌍한 단어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를 내릴 필요도 없고 연구할 필요도 없으며, 사랑하는 일이 어떠한 일이며 어떤 결과로 드러나는지에 관해서 연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간 선배들은 말했었습니다. "그저 사랑하라. 사랑의 의미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랑을 추구하는 인생은 그 사랑을 추구하는 일에 의해 수반될지도 모르는 눈물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싫어서 사랑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이 적은 자는 사랑의 기쁨으로부터 찾아오는 삶의 보람이 또한 적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우리들은 사랑하고 사랑 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은 그 사랑에 부여된 엄숙한 질서와 법칙을 인하여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삶의 주제들이 숭고하면 숭고할수록 그 주제는 더욱 엄격한 질서와 법칙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보다 더 숭고한 주제가 존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이 숭고한 것이라고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 사랑이 요구하고 있는 아름다운 질서와 법칙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은 고삐 풀린 망아지의 방종을 미소로서 관망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칭송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질서와 법칙을 준수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칭송을 받는 것입니다. 공자 허문편 35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리마는 그 힘으로 칭찬 받는 것이 아니고 조련이 잘된 보람으로 칭찬 받는 것이다."

질서와 법칙이 무시된 사랑은 어떤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까? 2차 세계대전 중 강자의 논리를 앞세운 독일이 6백만 이상의 유대인, 심신병약자, 공산주의자,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심지어는 집시까지 학살했었습니다. 그 학살 계획을 주도한 두 명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들은 게슈타포 사령관이었던 '히믈러'와 정치 보위군 사령관 '보르만'이었습니다.

히믈러는 어느 날 20만 명의 집단 수용자들에 대한 학살 명령을 내리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새를 기르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기술과 정열은 독일 사람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새를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천사 같은 마음씨의 소유자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한 마리의 새가 먹이를 먹지 않고 한 구석에 웅크려 병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세상이 무너진 듯 놀라면서 먹이를 권했으나 끝내 그 새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새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면서 슬퍼했습니다. 새 한 마리의 죽음에 통곡하는 마음과 20만 명의 살아있는 인간을 학살하면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수 있는 정신! 그는 사랑의 대상이 무엇이어야 하며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를 몰랐던 탕자였습니다.

보르만은 장미꽃의 아름다움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장미꽃에 입맞추고 나간 후 수용소 사령부에서 몇십만 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몰아넣어 학살해버렸습니다. 장미꽃에 대한 사랑과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증오심! 그도 사랑의 질서와 법칙을 어지럽힌 난폭한 탕자였습니다. 히믈러와 보르만은 사랑의 왜곡이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 극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인생들의 기본적 모토가 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사랑을 위한 첫 계단을 오른 것이다."

사랑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 위대성을 빌려 수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자기의 허물을 덮기 위한 사면장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자기의 이익을 꾀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말은 아주 애매하고 혼동된 뜻을 가진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단순히 사물을 좋아하는 것이나 가벼운 동정심에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심지어는 소유욕도 사랑이라는 말을 빌려 합리화시키는 경우가 많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혼동되어져서는 안됩니다. 삶의 감미로운 신비로 마법처럼 다가오는 사랑의 모습을 왜곡시키거나 혼동스럽게 만드는 일은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청년 시절에 어떤 분에게 "사랑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자욱한 안개에 휩싸인 하나의 별이라고 대답하고 싶어!"라고 하는 기막힌 대답을 들을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욱한 안개에 휩싸인 인생 길에 빛과 소망과 아름다움을 가진 별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랑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 이한규 목사 (분당샛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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