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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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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구(월간목회 발행인)

그 젊은이가 서 있던 시대는 불의했다. 미래는 먹구름이었다. 절망적이었다. 그의 시야로 펄펄 끓는 가마가 들어왔다. 재앙의 징조다. 앗수르로부터 이스라엘에 닥칠 미래 재앙의 환상이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불신의 이방 족속이 어찌 하나님의 백성을 칠 수 있는가? 수없는 세월,수없이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이스라엘이 아닌가? 감히 앗수르 따위가 우리를 넘보다니.

그랬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징계하고자 이방 족속을 그의 진노의 막대기로 사용하셨다. 이는 수차 반복된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패턴이다.

불의한 시대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한결같이 그 민족공동체의 미래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의 미래 통찰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텍스트였다. 시내산 언약에 근거하여 공동체의 미래를 예측했다. 그렇다. 말씀에 정갈하게 깨어 있는 자에게 미래는 그 신비로운 베일을 열어준다. 겸허하게 말씀 앞에 서는 것,정직하게 그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미래 통찰의 바른 길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많은 사람이 끓는 가마를 본다. 그리고 흥분한다.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격앙된 목소리로 무성한 해법을 제시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어느 상황이나 위기극복의 해법에는 오류가 있었다. 그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안전수칙이 있다.

첫째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인간의 힘으로 역사를 바꾸어놓으려는 돈키호테 같은 행동파들이다. 그들은 인위적인 해법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류다.

둘째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지 못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역사를 섭리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의 관심은 미래가 아니다. 오직 눈앞의 이해관계에 집착할 뿐이다.

불의한 시대에 멜랑콜리하게 서 있던 젊은이,그가 예레미야이다. 역사의 섭리자는 그에게 두 갈래의 메시지를 준다. 뽑아내고 파괴하게 하며 또한 건설하며 심게 하겠노라. 무엇을 뽑아낼 것인가? 무엇을 무너뜨리며 파멸시킬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세우고 무엇을 심을 것인가?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신상(神像)을 누가 무너뜨릴 것인가? 어떻게 파멸시킬 것인가?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다. 다만 사람의 손으로 다듬지 아니한 뜬 돌만이 가능하다. 역사를 섭리하시는 그분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를 선한 도구로 쓰신다. 그러므로 미래는 역사를 섭리하시는 그분께서 새 일을 행하시는 시간적 공간이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뜻을 펼치심에 있어서 우리 인간에게 여러 모양으로 미래를 열어 보이신다. 때로는 자연을 통해서,때로는 역사를 통해서,때로는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신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다시 물으신다.

너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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