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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위가 온전한 교회 (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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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 두 질문은 쉽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대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사람이고 또 지금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선뜻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어렵다.
교회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 두 가지 질문 역시 쉬운 질문 같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선뜻 무어라고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어느 날인가 평생 목회하신 선배 목사님 두 분께 제가 이런 질문을 했다. “목회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두 분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대답을 안 하시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목회가 무엇이라고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그 질문은 즉흥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25년여를 목회를 해왔었는데 목회가 무엇인가 하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일에 설교를 하고 평일에 심방을 하고 여러 가지 행사들을 하는 것이 목회인가? 결혼식 주례를 하고 장례식을 인도하고 아기 돌잔치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축하해 주는 것이 목회인가? 성도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처 난 마음을 위로해주고 낙심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인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된 배경과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세월이 가도 신앙이 자라지 않고 변화가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설교를 하고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심방을 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지만 전혀 그 인격이 변하지 않고 신앙이 자라지 않고 생활이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캠벨 몰건이라는 대설교가가 은퇴했을 때에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주일마다 꼬박꼬박 나와서 설교를 들으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설교자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고민이다. 

물론 신앙생활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의 인격과 성품이 변화된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 때문에 정말로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을 살아가는 변화된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보는 것이 목회생활의 보람이고 또한 기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삶이 변화되었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왜 여전히 죄악 투성이고 문제투성인가? 이 땅에 교회가 많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이 사회는 달라지지 않는가? 왜 오늘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비판을 당하는가? 도대체 교회가, 우리가 무슨 큰 잘못을 했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살려고 애쓴 것 밖에는 잘못이 없지 않은가?

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비판하고 비난하는가? 그들이 괜히 이유 없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비난하고 비판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높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만은, 예수 믿는 사람들만은 다르기를 바라고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기대에 맞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대에 맞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기대에도 맞게 될 것이다. 교회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 목회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심정으로 오늘 사데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함께 들어보자.

사데는 두아디라 동남쪽으로 48Km 떨어진 언덕에 있는 도시로 주후 17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호의로 36년에 재건되었다. 이곳은 옛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을 정도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대도시였고 무역이 발달하고 일찍부터 양털가공업과 염색공업이 시작되어 경제적으로도 크게 부유했다. 그래서 이 사데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사치와 향락을 일삼기로 유명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으나 요한사도 당시는 다시 번영하여 부패로 치닫는 도시였다. 도시의 타락한 풍속이 교회에 스며들어서 안일과 부도덕으로 떨어져서 껍데기만 남아 있는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호된 책망을 받았다.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와 함께 주님께 책망만 받은 교회이다. 그리고 라오디게아교회보다 더 심한 책망을 받았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하셨다. 사데 교회는 자신들은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사실은 죽은 믿음의 교회였다. 

이러한 사데 교회에 나타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자. “1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명목상의 신앙을 가진 교회에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나타나셨다. 일곱별은 교회를 가리킨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늘의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주님을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죽어 있는 땅의 교회에게 하늘의 교회, 참교회의 모습을 아는 것이 필요하기에 주님께서 이렇게 나타나신 것이다.

사데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
“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들의 삶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믿음은 좋은데 생활은 엉망이라는 뜻이다. 겉모습으로는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는데 속으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자기 자신이 보기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것은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이다. 시편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2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이는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행위가 사람이 볼 때에 온전하게 보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하지 못하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가? “1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들의 믿음은 이름뿐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믿음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도 예수 믿는 사람인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이지 실제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2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들의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즉 하나님의 기준으로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았더니 온전한 것이 전혀 없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것은 ‘충만하다’는 뜻이다. 아무 잘못도 없는 완전하고 완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충분한 분량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믿음의 행위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행위”가 무엇인가? 행위란 삶을 말한다. 삶이란 사람이 행동하는 모든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삶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씀은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삶과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만 우리의 믿음을 평가하거나 인정하시지 않고 우리의 행위를 보고 우리의 믿음을 평가하시고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즉 사데 교회는 마음으로 믿는 믿음도 좋고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도 분명하지만 그들의 실제 생활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교회생활과 입술의 말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 같은데 그들의 실제 생활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 같은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사람이 보기에 겉으로는 살아있는 믿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의 영혼과 삶을 들여다보니 사실은 죽은 믿음이라는 충격적인 주님의 말씀이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신앙”, 행위가 온전하지 못한 신앙의 특징이 무엇일까? 첫째, 믿음과 삶이 연결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만 실제 자신의 생활에서는 그것을 실천하려 하지 않는다. 감동을 받고 결단을 하지만 실제 삶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여전히 좋은 교인이지만 생활에서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둘째, 좋은 소리만 들으려 하는 어린 신앙이다.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이나 참고 인내하라는 말씀이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말씀 그리고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라는 말씀은 듣기를 싫어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말씀을 들으면 불편해하고 심지어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멀리하려고까지 한다. 
히브리서 5:13 “너희가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오래 믿었어도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면 어린 신앙이다.

셋째,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를 행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복과 은혜를 받기를 원하고 좋아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고 가진 것을 드리는 희생과 헌신은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것은 좋아하고 즐기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려 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과 교회가 주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 누리려 하지만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놓거나 헌신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힘쓰지 않는다. 10년이 지나도 신앙이 자라지 않고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주일에 한 번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 외에는 평소에 생활 속에서 신앙유지나 신앙성장을 위해서 힘쓰는 것이 없다. 그러기에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영적 능력이 없다. 죄의 유혹과 공격을 분별할 지혜도 없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는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한다.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린다. 사람들과 웃으면서 인사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힘들지 않게 적당하게 교회봉사도 한다. 그래서 자신들은 믿음이 꽤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일이 지나면, 교회를 벗어나면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

이런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그들은 자기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한다. 주일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헌금도 많이 들어오고 여러 가지 재미있고 유익한  행사도 많이 한다. 그래서 교회 분위기도 좋고 교회에 대한 주위의 평판과 소문도 좋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교회는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들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능력이나 영적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나, 성령의 능력이나, 성령의 충만이나, 성령의 열매 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환난과 고난이 오면 쉽게 믿음이 흔들리고 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사데 교회 같은 믿음이 아닌가? 우리 교회가 사데 교회 같지 않은가? 오늘의 한국교회가 사데 교회 같지 않은가? 우리가 스스로 속고 살고 스스로 속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심각한 병에 걸렸는데 자신은 그것을 모르고 건강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 병을 알고 있으면 고치려고 애를 쓸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나의 신앙을 다시 생각해보라.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점검해 보아야 한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만약에 우리가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사데 교회처럼 잘못 알고 착각하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6:3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그러므로 내 믿음을 보시고 죽어가고 있다고 하시는 주님의 선언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내 신앙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약을 먹고 치료받고 수술을 받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권면
주님은 그들의 죽은 믿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첫째, 깨어나야 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일깨라”는 것은 깨어서 일어나라, 깨달으라. 정신을 차리라는 것이다. 죽은 자라고 했지만 아직은 죽지 않고 잠자는 상태와 같다는 것이다. 깊은 잠에 빠져 있으니까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잠에서 깨어서 일어나라는 말씀이다. 

무능한 사람이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면 유능해질 수 있다. 미련한 사람이 자신의 미련함을 인정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약한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면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나라. 내 믿음이 지금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고 잠에서 깨어나라. 그리고 나의 현실을 깨닫고 돌이켜 일어나라. 
둘째, 남은 것을 굳건하게 하라. “너희의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그들의 믿음은 이름만 남아 있고 실제는 죽은 믿음이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고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죽어가고 있지만 아직 다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죽은 믿음이라고 했지만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는 말씀이다. 불에 타다 남은 나무에 아직 조금 남아 있는 불을 다시 일으켜 불길을 일으키듯이, 아직 남아 있는 믿음을 굳게 해서 다시 살아나게 하라는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주께 대한 사랑, 아직 남아 있는 순수함, 아직 남아 있는 선한 성품과 착한 마음, 아직 남아 있는 진실함 등을 확실하게 붙잡고 일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믿음을 굳게 잡고 깨어 일어나서 살아나야 한다.

셋째, 처음 믿음을 끝까지 지키라.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받고 들은 것’은 사도들과 복음증거자들이 전하고 가르쳐 준 복음의 진리를 가리킨다.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이 무엇인지, 그들이 전에 사도들로부터 어떻게 복음을 받고 듣고 믿게 되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처음 믿음을 다시 회복하라는 것이다. 처음 복음을 듣고 믿고 배운 그때의 사랑과 열심과 기쁨과 진실함과 순수함을 기억하고 처음의 그 순수한 믿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 말씀을 지키며 살라는 것이다. 

넷째, 회개하라.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회개란 죄에서 돌아서고 돌이키는 것이다.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더럽게 여기고 돌아서는 것이다. 죄의 잠에서 깨어나고,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즉시 주님께로 돌아서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실 때에 죽음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가서 살아 있는 믿음으로 변화되라.

주님의 심판과 상급의 약속
주님께서 깨우실 때에 일어나지 않으면,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주님께서 심판하신다. “3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지금 즉시 깨닫고 돌이켜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생각지 않은 때에 갑자기 오셔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예고 없이 갑자기 오실 것이다. 세상의 마지막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임할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즉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키라.

주님이 약속하신 상급은 무엇인가?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아무리 타락한 세상에도 끝까지 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함을 버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소수의 성도는 반드시 있는 법이다. 주님께서 입혀주신 구원의 세마포 옷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이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주님께서 항상 그와 동행해 주신다. 이런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들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옛날에는 죽은 자들뿐만 아니라 죄지은 자들은 임금이 시민의 이름을 기록한 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깨끗하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흰 옷을 입혀주시고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고 남겨두신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의 이름을 인정하시고 천국에 받아주신다. 이 주님의 약속을 믿고 죄에 빠지지 말고, 형식적 신앙에 빠지지 말고 살아 있는 믿음이 되라.

2004년에 소아시아 성지순례를 하면서 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을 찾아 들려보았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기둥 몇 개 또는 빈 터만 남아있었고 86세에 순교한 폴리갑 감독이 섬겼던 서머나 교회만 지금도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주일 아침에 사데 교회 터를 찾아가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가졌다. 사데 교회는 건물뼈대는 남아 있었는데 바로 뒤에는 이방신전이었고 교회는 그 뒤에 조그맣게 붙어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신앙상태를 보여준다. 안내하는 분이 그들이 주일에는 교회에, 월요일부터는 이방신전에 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배가 끝나고 씁쓸한 심정으로 교회를 나서는데 한 목사님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을 불렀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서신 주님.” 그래서 저도 함께 두 손을 들고 큰 소리로 찬양을 했다. 이곳 무너진 사데 교회 자리에 다시 주님의 영광이 임하고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찬양을 했다. 살아 있다고 하나 실제는 죽은 것 같은 우리 믿음이 다시 살아나기를 기도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떤가?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지만 실제는 죽은 믿음이 아닌가? 성도라는 이름은 있지만 삶과 행위에는 믿음이 없는 상태가 아닌가? 믿음이 죽어 있어서 죄와 세상을 이길 능력이 없는 상태가 아닌가? 그래서 날마다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행위가 온전한가? 

우리 교회는 어떤가? 우리 교회는 정말로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교회인가?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있는 교회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충분한 믿음의 열매를 맺는 교회인가? 한국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눈으로 나의 신앙을 돌아보고 우리 교회를 돌아보자. 우리를 살리시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책망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자. 그리고 깨어나고 돌이키고 회개해서 믿음을 바로 세우자. 그래서 주님께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행위가 온전한 믿음이라고 인정받자. 우리 교회가 주님께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행위가 온전한 믿음의 교회라고 인정받는 교회가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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