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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송 문제에 대한 성도의 자세 (고전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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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문제에 대한 성도의 자세 (고전 6:1-8)

오늘 본문은 교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법정소송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도들 간에 구체적으로는 무슨 문제 때문인지 서로 다투었는지는 모르지만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고소한 것입니다. 8절 말씀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라고 한 것을 보면 성도 간에 금전문제로 소송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오늘날도 가끔씩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 금전 거래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는 금전 거래는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자칫 사람과 신앙을 둘 다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성도 간에 분쟁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지금 고린도교회는 분쟁을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법정에 호소하여 해결 하고자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교회의 성도 간에 발생한 문제를 가지고 세상법정에 소송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발한 것에 대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 성도 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서 해결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2절에 보시면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3절에 보시면 성도는 천사까지도 판단할 수 있는 대단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까지도 판단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의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할 특별한 지위를 가진 성도들입니다. 마 19: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존재가 성도 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성도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요, 성도의 수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책망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여기에서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 이란 ‘교회가 멸시하는 자들’, ‘교회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 ‘존경하지 않는 자들’로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재판을 받느냐는 책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보다는 한 수 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세상 사람과 구별하신 거룩한 무리입니다. 영적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법률보다 높은 하나님 말씀, 도덕과 윤리의 통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신령한 지혜가 있는 자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여 진리와 비진리, 의와 불의, 영원한 것과 멸망 받을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성도 간의 문제나 교회 문제를 영적 장님에 불과한 자들로부터 판단 받으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성도 간의 문제나 교회 문제로 어떠한 경우에도  세상 법에 고소하는 자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일어난 성도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5절 말씀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교인 간의 문제가 생기면 우선적으로 교회 안에서 지혜 있는 자가 나서서 중재함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른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문제든지, 그것이 가정 문제나 형제간의 문제든, 아니면 서로 싸웠든, 무슨 심각한 문제이든 간에 성급하게 세상의 법정으로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제일 먼저 회당의 랍비를 찾아갑니다. 그러면 랍비가 쌍방의 이야기를 다 듣고 서로 간에 조정하여 화해를 시킵니다. 그러면 대부분 유대인들은 랍비의 말을 듣고 서로 화해하여 거기에서 해결을 본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 문제가 생기면 먼저 목회자나 장로님들, 아니면 교회 어른에게 해결을 요청함으로 잘 화해하여 원만히 해결해야 합니다. 조금은 언짢더라도 서로 양보하여  교회의 화평과 덕을 위해서 화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교회 당회에 중재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노회, 총회까지 상소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의 '권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에는 교회법이 있습니다. 교회의 법은 세상의 법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통하여, 교회의 문제나 성도 간의 문제로 세상 법정에 소송을 벌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며 그 정결함과 화평함을 이루도록 노력할 것"을 서약하고서 세례교인이나 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간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교회 안에서 해결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적어도 양자가 진실한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세상법정으로 가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명예와 신앙인 정체성을 적어도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보다는 더 귀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만 진정한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가장 신앙적인 해결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이 말씀은 한마디로 성도 간에 서로 분쟁이 생기면 세상의 법정에 나가지 말고 차라리 억울함을 당하고 손해를 보라는 권면입니다.  

여기서 "허물"이란 단어는 헬라어에서 "패배"를 의미합니다. 이기고도 망하는 것이 재판입니다. 재판에서 이긴다 해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상처뿐인 승리입니다. 재판하면 사람을 잃습니다. 우정을 잃습니다. 형제를 잃고 가족을 잃습니다. 이웃을 잃습니다. 신앙을 잃고, 영적 재산을 잃습니다. 승리 같은 패배가 바로 재판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섬겼던 대구의 어느 교회는 교회가 한참 성장하다가 반주자 문제로 교회가 분쟁에 휘말려 극심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교인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서 서로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려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세상의 법정까지 가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교회문제를 교회가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의 법정으로 까지 가게 되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된지 아십니까? 교회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6백여 명 되던 교인들이 다 떠나고 겨우 2백여 명만 남았습니다. 충성된 일꾼들이 떠나가게 됨으로 일할 성도가 없게 되었고, 성도간의 갈등과 아픔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주변의 불신자들도 “교회가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고 너나없이 비방함으로 전도의 문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간 세상 법정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재판 비용으로 엄청난 물질적 손해를 입는 동시에 결국은 한 쪽이 교회를 떠나 개척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성도 간에 왜 싸움이 일어납니까? 사랑과 이해가 없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지지 않겠다는 교만한 마음에서 생깁니다. 그러나 바울의 권면은 서로 고발해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좀 푸대접을 받아도, 억울함을 당해도, 좀 손해가 나도, 좀 상처를 받아도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에 맡기고 서로 지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사이에서 재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서로 분가하게 됩니다. 그 때에 아브람은 먼저 롯에게 땅의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창 13:9절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은 조카인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양보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아브라함이 손해를 봤습니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먼저 선택했던 롯은 소돔성에 들어가 살다가 망했고, 아브라함은 축복을 받아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과 블레셋 사람들 사이의 우물 싸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물이 귀합니다. 그래서 우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삭이 그랄 땅에 거하면서 우물을 팠습니다. 지금처럼 우물을 파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삭은 힘들게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자기네 땅이니 자기네 우물이라고 생떼를 썼습니다. 그때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순순히 그 우물을 내줬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에도 천신만고 힘들게 판 우물을 또 내 놓으라고 합니다. 두 번째 양보했습니다. 세 번째 우물을 또 팠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우물을 파고 나니 그곳 사람들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창 26:28-29절에 보시면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 말은 이삭이 이방사람들이 봐도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 분명하니 이제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패배 같은 승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양보하는 것은 그냥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자는 결코 양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일 믿음으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양보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삶이요, 이삭의 삶이요, 요셉의 삶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구약시대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시대입니다. 이웃은 사랑하지만 원수는 미워하는 시대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손해를 준만큼 그 사람에게 갚는 것이 삶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 5:39-4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라고 하십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교훈도 마찬가집니다. 롬 12:17-21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자리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패배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를 이긴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정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재판으로 이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십자가 정신으로 양보하고 이기는 성도들입니다. 이긴 것 같으나 지는 것이 세상 재판입니다. 당장은 손해를 보고 지는 것 같으나 결국 이기는 것이 믿음의 양보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손해 보면 주님이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주십니다. 

우리는 세상 원리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리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재판으로 세상을 이기려 하지 마십시오. 세상 재판은 이겨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소송입니다. 

우리는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 이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임을 기억하시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의 삶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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