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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이름은? (마 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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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은? (마 27:3-8)

여러분, 이름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아십니까? 누군가의 이름에서 향기를 맡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지금 여러분의 이름에서는 어떤 향기가 납니까?
  
이름에서 향기가 난다는 말은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들을 때에 그 이름에서 나는 나름대로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테레사 수녀’ 그러면 여러분 어떤 향기를 느끼십니까?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말하는 슈바이처라는 이름에서는 어떤 향기가 납니까? 이름에서 나는 향기는 그 사람의 삶에서 나는 향기요, 그 사람의 인격에서 나는 향기입니다.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처처럼 생각만 해도 아름답고 가슴 따뜻해지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그 이름을 들으면 몸서리가 쳐지는 이름도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그렇고, 히틀러가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악취가 나고, 그 이름을 들을 때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악취 나는 이름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참 한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가롯 유다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평가한 평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사람”(마태복음 26:24)입니다.

가롯 유다를 생각하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에 위대한 이름으로 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그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당시로 말하면 엘리트였습니다. 욕망도 있었고, 야심찬 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11명은 모두 북쪽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사람’ 그러면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천민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가롯 유다만 남쪽 지역 출신입니다. 

가롯이라는 말은 그의 출신지역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8명이나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유다라는 이름의 뜻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미’ ‘하나님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유대인은 유다라는 이름을 참 좋아했고,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이름 앞에 출신 지역을 붙여서 ‘가롯 유다’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성경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쪽지역 출신인 그가 북쪽 출신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커다란 꿈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정치적인 야망입니다. 예수님께서 뭔가 큰일을 하실 분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뭔가 큰일을 해서 이 민족의 지도자가 된다면 자신도 당연히 한 자리 할 것으로 기대하고, 고향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했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늘나라의 비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처음 가졌던 욕망 대신에 복음으로 변화되어 참으로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전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공동체의 회계 역할을 맡았을 정도로 예수님께서 믿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롯 유다는 수치스러움만 남긴 채 그의 생애를 끝내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스승을 팔아먹고 만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가롯 유다라는 이름에 따라다니는 ‘배신자’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은 오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종말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을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롯 유다는 그의 인생 자체가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얼마만큼 인생을 잘 살았느냐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죽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슬퍼해 주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합니다. 그러나 헛되이 인생을 산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아무도 슬퍼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롯 유다는 어떻습니까? 그의 출발은 참 좋았습니다. 죽기 3년 전에는 참 큰 꿈도 있었고, 용기도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뭔가 큰 꿈을 펼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큰 세상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스승인 예수님으로부터도 큰 신임을 얻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자기 스승을 배신하고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스승을 가장 치욕스러운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버린 다음, 그는 굉장히 후회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정죄하고 사형집행을 위한 최종적인 재가를 얻기 위해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 때서야 “스스로 뉘우쳤다”고 했습니다. 

뉘우쳤다는 것은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때서야 ‘왜 내가 스승님을 팔았나’ 후회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자살로 그의 인생을 마감 짓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자살로 자기의 생명을 끊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연예인이나 사회 저명인사들 가운데도 많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뭘 그런 일을 가지고 그 귀중한 생명을 스스로 버리나’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큰 절망과 상처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도무지 대책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앞날을 생각하면 캄캄하기만 합니다. 현실도 어렵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에도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살하게 됩니다.

물론 자살하는 것을 잘 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 전통적인 윤리로 본다면, 자살은 다른 사람을 죽인 살인과 같은 범죄로 취급합니다. 옛날 유럽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은 살인자와 똑같은 죄목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자살한 사람은 그 시체를 말에 매어 온 동네를 끌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재산을 몰두 몰수해버렸습니다. 자살을 그만큼 중한 범죄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자살하는 사람의 입장 또는 자살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고 비참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죽했으면 자살했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자살한 사람들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전쟁을 치르고 난 다음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과 같습니다.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푸르른 나무나 풀과 같이 생명력이 있는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게 부서지고 깨어지고 엉망진창입니다. 자살하기 전에 그 사람의 마음은 이미 죽어 있습니다. 희망도 죽어 있고, 마음속의 생명도 죽어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가롯 유다가 자살했다는 것 자체도 비참하고 수치스럽지만,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의 마음도 얼마나 비참했을 지 짐작이 갑니다.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미 그의 인생은 모든 게 실패로 끊나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몇 십 년을 살아온 모든 인생이 한 순간에 다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뭔가 희망을 안고 예수님을 따랐던 지난 3년도 모두 헛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모든 생애가 다 실패요 헛된 것이었습니다. 오직 부끄러움과 수치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살하고 난 다음의 그의 모습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사도행전 1:18절에 보면, 목매어 자살한 유다의 시체는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말씀해 줍니다. 쉽게 표현하면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그렇게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죽을 때 잘 죽어야 합니다. 모양새가 있고, 명분이 있고, 고상하게 죽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집니다.
  
사도행전 6-7장에 나오는 스데반은 비록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돌에 맞아 죽었지만, 아무도 그의 죽음을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 때문에,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라는 아주 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평소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경을 자세하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단지 초대교회가 7명의 집사를 선택할 때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사람”을 뽑았는데, 스데반이 그 중에 한 명이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교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 나가 다 한 번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우리의 인생을 잘 살았는지, 헛되이 살았는지’ 판가름해 줄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죽어야 합니다. 나이 드신 분만 죽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고 아이이고 할 것 없이 알지 못하는 때에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죽음이 수치스러운 죽음이 되지 않고, 명예스러운 죽음이 되도록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다 죽었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또 어떻게 죽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고, 무엇을 위해 죽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죽고 나면 누구에게나 유산이 남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가롯 유다가 남긴 유산은 무엇입니까? 가롯 유다가 남긴 물질적인 유산은 은 30세겔이었습니다. 은 한 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4일 품삯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가롯 유다는 노동자의 4개월 치 품삯에 스승을 팔아버렸고, 그 돈이 그가 남긴 유일한 재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드는 것은 그 ‘은 30세겔’이라는 돈이 당시에 황소가 노예를 받아서 죽이면 배상해 주는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고작해야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자기 스승을 팔아먹고 죽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나 종교지도자들이 죽이기 위해서 혈안되어 있던 예수님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몸값입니다. 자기 스승을 고작 노예 한 사람 정도의 가치로 밖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3년 동안 따라다닌 예수님의 가치가 고작 노예의 몸값 밖에 되지 않습니까?

가롯 유다는 나중에 스승을 팔아먹은 게 양심에 가책이 되었는지, 스승을 판 대가로 받은 돈 은 30을 다시 가지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돈을 그들 앞에 던져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벌인 일이니 네가 그 벌을 받아라.” 

그래도 한 때는 내통했던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은밀하게 만나고, 작전을 짜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 때까지는 한 패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가 은 30세겔을 가지고 다시 찾아갔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가롯 유다를 무시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까지 가롯 유다는 철저하게 외톨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을 매 죽고 말았습니다. 
  
가롯 유다가 자살하자 종교지도자들은 가롯 유다가 던져놓고 간 그 돈을 꺼림직하게 여겼습니다. 가롯 유다는 분명 그 돈을 성소에 던져 넣었습니다. 성소에 드려진 돈은 6절에 말씀한 것처럼 성전고에 들여놓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거나 선행을 베푸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그 돈을 부정하게 생각해 성전고에 넣지 않았고, 나그네를 위한 공동묘지를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피밭’이라고 붙였습니다. ‘스승의 생명을 팔아 피를 흘리게 한 돈으로 산 밭’이라는 뜻입니다. 그 공동묘지마저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러지고 말았습니다.
  
가롯 유다가 남겨놓고 간 것은 은 30세겔로 산 공동묘지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명예스러운 것이 아니라 치욕적인 이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남기고 갔느냐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가롯 유다는 ‘피밭’이라고 불리는 불명예스러운 유산을 남기고 갔습니다.
  
유산을 얼마나 남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재벌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줍니다. 그러나 그 많은 유산 때문에 자식들끼리 원수처럼 싸우고,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재판을 합니다. 여러분! 그게 유산을 잘 물려준 것입니까? 그런 유산은 결코 아름다운 유산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유산입니다.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뜻이 있고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진정 가치 있는 유산은 많은 재산을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참되게 살아가도록 하는 유산입니다. 그래서 신앙 유산이 최고의 유산입니다.

가롯 유다에게서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 영원토록 치욕스런 이름의 대명사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가롯 유다’ 그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배신자’라는 말입니다. 가롯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가롯 유다도 귀한 집의 자식입니다. 그는 -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 남쪽 지역 출신입니다. 당시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북쪽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쪽 사람들은 북쪽에 비해서 귀족이고 점잖은 사람들입니다. 많이 배웠고 부유했습니다. 가롯 유다도 그랬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다의 부모가 그를 낳고는 이름을 ‘유다’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유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찬미하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이름입니까? 그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에는, 그 부모의 마음에 큰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장성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집을 떠나올 때 그의 부모는 적지 않은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름처럼 크게 성공해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공은 고사하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스승을 팔아먹은 배신자란 꼬리표를 남겨놓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가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는 그가 쓴 대서사시 『신곡』(La divina commedia)에서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는 두 사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먹은 가롯 유다이고, 다른 한 사람은 로마의 황제인 줄리어스 시저(Gaius Julius Caesar, BC 100-44)를 배반하고 그를 죽인 브루터스(Marcus Junius Brutus, BC 85-42)입니다. 스승을 배신한 자 그리고 친구처럼 가까이에서 모신 황제를 배반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참으로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의 동생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 가인,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애굽왕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메시아를 죽이기 위해서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헤롯,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준 죄로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신앙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본디오 빌라도,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의 이름이 치욕스런 이름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이름을 남긴 사람은 단연 가롯 유다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 주시면서 전도하러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복음을 전할 때, 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이 쫓겨났습니다.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큰 능력이 그들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신이 나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자랑스럽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병자도 고쳤고요, 귀신들도 내쫓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누가복음 10:20)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가장 가치 있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귀신을 내어 쫓을 만한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인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잠언 10: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의롭게 살다간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에 칭찬과 영광이 더해집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드신 분일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렸기 때문에 그 이름은 들으면 들을수록 그분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이완용이란 사람은 아무리 좋게 들으려고 해도 좋은 감정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일제에 우리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기분 좋은 이름이 아닙니다. 잠언의 표현대로 한다면 ‘그 이름은 썩은 이름’입니다. 
  
가롯 유다는 ‘배신자’란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롯 유다라는 이름을 들으면 좋았던 기분도 달라질 것입니다. 듣기를 싫어하는 이름 - 썩은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다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똑같은 시간과 똑같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이 인생을 정말 가치 있고, 귀하게 그리고 멋있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치 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정말 보람되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허비하며 헛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마지막 역시 그렇게 끊나버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얼마나 어리석은 삶을 살았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는 인생 자체가 수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남겨놓은 유산도 수치스러운 것이었고, 그의 이름 자체가 수치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삶을 살다가 수치스러움만 남기고 간 사람이 바로 가롯 유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남지 않도록 사십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자처럼 사십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답게 사십시다. 그러면 우리의 이름이 복되고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욕심만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멋진 이름이요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을 수 있도록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조용히 여러분의 이름을 가슴으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이 나에게 자랑스러운 이름입니까? 그 이름을 듣는 내 주변의 사람에게도 자랑스러운 이름입니까?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내 이름을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자랑스럽게 부르실 수 있는 이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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