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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구별 순환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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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환(동화작가)

기차는 달렸다. 안내 방송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의자에 기대어 졸고 있고, 어떤 사람은 큰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낡은 스피커에선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행가 가락에 발을 맞추는 사람도 있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젊은 남녀가 길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모자 쓴 남자 아이가 엄마 무릎에 앉아 울고 있었다. 차장 밖으로 광장이 보였다. 비둘기 떼가 하늘로 흩어지고 있었다. 소란한 기계음을 내며 기차가 멈췄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기차에서 내렸다. 머리카락 흩어진 할머니 눈빛이 처연했다. 햇살이 다람쥐 꼬리 만큼 남아 있었다.

기차에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차는 높은 빌딩이 나무 숲 처럼 서 있는 시내를 지났다. 멀리 강물이 보였다. 기차는 강물 출렁이는 긴 다리를 지났다. 강물 위로 저녁 노을이 부서지고 있었다. 입을 맞추었던 청년이 손가락으로 노을을 가리키며 웃고 있었다. 다리를 지나자 청년이 내릴 준비를 했다. 청년은 가방을 매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운동화 한 쪽 끈이 아무렇게나 풀려 있었다. 청년의 얼굴이 슬퍼보였다. 기차가 멈췄다. 청년은 물끄러미 여자를 돌아보더니 기차에서 내렸다. 청년의 뒷모습이 휘청거렸다. 수척한 들고양이 한 마리가 청년의 뒤를 쏜살같이 따라갔다.

기차는 들판을 달렸다. 차장 밖 억새풀들이 바람에 수런거렸다. 바람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기러기들은 머리를 돌렸다. 모자를 쓴 남자 아이가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키 작은 아이 얼굴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아이는 울고 있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도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이가 버스에서 내렸다. 앞칸에 앉아 있던 백발의 할아버지도 아이 뒤를 따라 내렸다. 엄마는 차창 밖에 있는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차창 밖 독수리 한 마리가 송곳 같은 눈빛으로 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엄마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기차는 굽이굽이 산고개를 넘었다. 산 길을 따라 안개가 자욱했다. 고개방아를 찧던 갈대들이 안개 속에 지워지고 있었다. 길고 긴 터널을 지났다. 창 밖엔 어둠이 내려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골 마을에 불빛이 가물거렸다. 기차에 남은 사람은 아직 많았다.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피곤한 눈을 감았다 떴을 뿐, 내릴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점점 굵어졌다. 희뿌연 하늘 위로 까마귀떼가 날아 올랐다. 온종일 달렸지만 기차에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구별 순환기차는 내리는 사람뿐이었다. 한 번 내리면 다시는 탈 수 없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언제 내리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신도 나도, 지금 이 기차에 타고 있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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