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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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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포스터 (국제 레노바레 대표)

레노바레( Renovare)의 주제 구절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여기에서 '새롭도다' 라고 번역된 단어가 라틴어 성경의 renovare).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 구절을 좋아한다. 우선 그 강인함이 좋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또 그 현실성이 좋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그 낙관주의가 좋다. "새롭도다." 그 진보성이 좋다. 우리는 "날로" 새로워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이 구절이 영적이고 불가시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일에 우리는 인생을 바쳐야 한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새로워짐은 사람의 내적이고 영적인 본성이 새로워진다는 뜻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외부 인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부 인간이다. 대부분의 경우 영적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구절 바로 아래서 바울은 말한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4:18). 그리고 좀 더 지나서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5:7)

영적 세계가 이처럼 육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덫에 걸려 물질 세계가 전부인 줄로 착각할 우려가 있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를 궁극적 실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십계명의 둘째 계명은 이런 유혹을 경계하고 있다. 현대 문화와 접촉하는 우리는 거의 매일 그런 유혹을 받는다. 현대 문화에는 경험주의적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의 불가시성(不可視性)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 숨을 수 있게 해준, 어떤 영구적 장치나 마찬가지이다. 아침마다 전능자의 얼굴이 빤히 보인다고 가정해보라.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그렇게 고정해 놓으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와 협력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세계를 볼 수 없도록 안배해 놓으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영적 현실을 보기 원할 때까지, 마음을 다해 보기 원할 때까지, 목마른 사슴이 냇물을 찾듯 그것을 갈망할 때까지(시42:1),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온 몸과 마음으로 부르짖을 때 적절한 시간이 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때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던"(히11:27) 모세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이 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현실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영적 현실을 신뢰하며 인생을 거기에 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불가시적 영적 세계를 알고 그렇게 아는 대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규칙적이며 지속적으로 이런 삶을 살 때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워짐"을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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