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1-4)

첨부 1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1-4)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1.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100km 정도에 해안도시 가이사랴가 있습니다. 당시 고넬료라 하는 로마의 백부장(중대장)이 이곳에 주둔군으로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분명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지고 유대 회당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식민지 통치하는 로마의 주둔군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배척을 받기 십상이지만,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고넬료의 경건한 삶이 구제와 기도로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식민지 통치 아래 있는 궁핍한 유대인들 상당수를 구제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고 또한 무엇보다 기도생활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때그때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루에 오전 9시와 오후 3시, 두 번씩 정한 시간에 기도하여 경건생활에 깊이를 더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경건한 기도생활하던 중 하루는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행10:4)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보좌에까지 올라갔다는 뜻이고,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것은 고넬료의 신앙과 행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 행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었다는 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경건한 생활의 고넬료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어야 기도이지, 아무리 많은 기도와 감동적인 기도, 그리고 논리적인 기도일지라도 상달되지 아니하면 기도의 열매가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기도가 아니라 주문에 불과합니다. 상당수의 교인들 중 자신이 기도하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지 않거나,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불신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기도 응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거나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여러분이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요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의 자녀가 된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셔서 예수께서 시행하시는 응답받는 능력있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수’는 헤아리지 아니하시나 그 ‘무게’를 다시고, 기도의 ‘길이’는 재지 아니하시나 그 ‘깊이’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구제 역시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은 구제를 베풀었다 해도 하나님께 상달되어야 상급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야 영원한 축복이 되는 구제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는 구제와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구제와 기도라야 영원한 복이 될 수 있습니다. 

2. 예수께서 경건한 신앙생활 세 가지 구제와 기도, 금식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6:1-18) 똑같이 ‘은밀한 중에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밀한 중에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구제도 은밀하게 해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마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기도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해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도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보이게 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은밀하게 해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마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선생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많은 율법 지식을 가르치고자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자 한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마침 저녁 식사시간이 되어서 두 사람이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음식이 다 차려지자 율법 선생은 제자에게, “자, 이제 식사 기도문을 외우고 음식을 들자.”라고 말하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절반 정도 외웠을 때 제자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율법 선생은 눈을 뜨고 그를 보며 말했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나? 무슨 일이지?” “....” 율법 선생은 제자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물었습니다. “왜 대답이 없는가?” “저, 실은 기도문을 끝까지 외우지 못했습니다.” 제자는 머리를 푹 숙이고서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슬그머니 화가 나기 시작한 율법 선생은 그가 이때껏 가르친 율법들을 하나 둘씩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자는 시종일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자네는 이제까지 무얼 배웠는가! 집에 가서 책도 읽지 않고 무얼 했단 말인가!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율법 선생은 소리를 쳤고, 제자는 얼굴이 땅에 붙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문을 나서고 말았습니다. 즐거워야 할 식사시간이 기도문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뒤, 율법 선생은 회당으로 가는 길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상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장사는 잘 되나요?” “예,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요즘 우리 마을에 떠도는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아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아주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누가 무슨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글세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품이 아주 고운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아! 글쎄 지난번 혼자 살고 있는 대장장이가 팔이 부러져 자리에 누워 있을 때 저녁때마다 그 집에 가서 밥도 지어주고 병간호도 해주었다지 뭡니까! 그 뿐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아랫마을에 홀로 아이들 셋을 데리고 사는 부인이 있지 않습니까? 글세 그 부인이 아이들 돌보랴, 돈 벌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머니 대신 일을 해서 돈을 갖다 주었답니다. 정말 보기 드문 사람이지요.” 

상인은 침이 마르도록 율법 선생의 제자를 칭찬했고, 율법 선생은 어리벙벙한 상태로 그와 헤어져 회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마침 문 앞에서 제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율법 선생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선행을 행한 제자가 누구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름 아닌 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던 바로 그 제자였습니다. 순간 율법 선생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구제나 기도, 그리고 금식 등은 이미 세상으로부터 그 상급을 다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구하려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구제와 기도 등은 오히려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마태복음 23:5,27을 보겠습니다. 

(마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마23:27)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예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거듭 거듭 화(禍)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들에게 화, 저주를 선포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외식(外飾)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헬라어로 탈을 쓴 배우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일반 사람들과 구별된 복장, 소위 성직자임을 나타내는 복장을 하고 다녔는데 그 목적은 경건을 가장(?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참된 성도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며, 자신은 십자가에 죽이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게 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드러내고자 온갖 치장을 다하며, 항상 상석(上席)과 상좌(上座)를 즐겨했던 것입니다. 속에는 온갖 더럽고 추잡하며 사악한 것들이 썩어 문드러진 채 악취로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치장하는 외식주의자들의 실상을 예수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무덤에 회칠했다고 무덤이 아닙니까? 회칠했어도 무덤은 여전히 부패한 시체들로 가득한 무덤에 불과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실로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내면에는 각종 불법과 부정부패가 득실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거룩함을 드러내는데 혈안이 되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목적은 간단합니다. 

자신의 거룩함을 빙자해서 교권 장악을 수호하고 이권을 챙겨 축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거듭 화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금식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아니하는 이유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18:9-14을 보겠습니다. 

(눅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금식 등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하는 이유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두고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들입니다. 죄인을 의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의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고자 하면 그 대가(代價)를 치루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값을 십자가에 치루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인간은 죄값을 치루고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같은 죄인인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정말 가증스럽게 짝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써만 의롭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 ‘서서 따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 기도 모습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영혼의 기도가 아니라 하루 세끼 밥 먹듯이 습관에 매인 형식적인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따로 기도했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만 의롭게 여기며 다른 사람, 특히 세리같은 죄인을 멸시하며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세리들과 같지 않은 것을 감사드렸다고 했는데, 이는 자신들에게는 전혀 불의가 없고 깨끗할 뿐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태도입니다. 또한 금식기도할 때는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날, 다시 말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날 얼굴을 희게 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구김살이 간 옷을 입고 큰 거리에 나와 자신의 금식하는 모습을 자랑했습니다. 십일조 드리는 것까지도 대놓고 자랑했던 것입니다. 

십일조가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시오 자기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고백하는 행위임에도 까발리며 자랑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십일조를 자신의 의로 여기는 가증스러운 태도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가식적인 태도 등은 결코 그들의 기도와 금식 등이 전혀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세리는 죄인 중에 죄인임을 깨닫고 마음을 치는 깊은 참회와 애통하는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지난 날 죄 많은 생활들을 청산하고자 하는 결연한 뜻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어떠한 벌을 받아도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만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관대하신 처분만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호소할 뿐입니다. 

이러한 세리의 기도는 열납되었고 바리새인의 기도는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은 그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사람에게 과시하고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 앞에 영원한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는 항상 사람들의 눈을 더 염려했고, 또 그렇게 해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상으로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들에게 보이며 행한 것이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데는 전혀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헛된 영광의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기도와 금식, 그리고 구제가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영원한 축복이 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도와주며 이 둘은 항상 함께 일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이 왼손이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은 자신이 베푼 구제를 도무지 기억하지 말고 의식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베푼 구제 등의 선행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듯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말없이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일을 해놓고 왼손으로 그 결과를 거두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선행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얻어내지 못할가봐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베푼 선행과 사랑이 그 댓가를 얻어내지 못하게 되면, 그 해당되는 사람에게 간섭해서 억지로일지로라도 사랑을 강요하거나 그 사람을 지배하려고까지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사랑과 선행으로 변장한 사람들로 그 선행과 사랑은 모두 거짓된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은밀한 구제이겠습니까? 

마태복음25:31-36을 보겠습니다. 
(마25:31-3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예수께서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해 그들의 구제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앉은 자들은 놀라서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느냐고 반문합니다. 

(마25:3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아무리 자신들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예수께서 주릴 때에 먹을 것을 드리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해드리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해드리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드리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드리고,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드린 일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마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른편에 앉은 자들’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선행과 사랑을 베푼 것이 ‘가장 큰 자’이신 예수께 행한 것인 줄 모르고 묵묵히 이웃 사랑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오른편에 앉은 자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25:41-43)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자 왼편에 있는 자들도 예수께 ‘우리가 주님을 돌보지 않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들의 반문에 예수께서는 “(마25:4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며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 다시 말해 소외받고 궁핍하며 고통받고 살아가는 사람 하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모르고 외면해버렸던 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바로 오른편에 앉아 있는 자들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아니하고 이웃 사랑을 베풀었다는 것이고, 왼편에 있는 자들은 티도 나지 않은 작은 자 하나는 외면해버리고 생색내는 데만 신경을 썼다.는 것입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나팔을 불어가며’ 행했기 때문에, 즉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고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모르신다.’는 것이었고, ‘오른편에 앉는 자들’은 사람에게 선행과 사랑을 베풀었지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아니라 오직 은밀한 중에, 묵묵히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칭찬을 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지극정성으로 대접했습니다. 

(히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아브라함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인줄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마음과 정성을 다해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환송을 받으며 이들이 떠나기 전, 1년 후에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예언하자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창세기 18:17-19입니다. 

(창18:17-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웃들에게 선행과 사랑을 베푸는 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선행이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이 되도록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마음 중심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B.C. 850년경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였습니다.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 부유한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엘리사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 해서, 엘리사는 그 곳을 지나칠 때마다 거기에 들러서 음식을 먹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여보, 우리 집 앞을 늘 지나다니는 그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내가 압니다. 이제 옥상에 벽으로 둘러친 작은 다락방을 하나 만들어서, 거기에 침대와 상과 의자와 등잔을 갖추어 놓아둡시다. 그래서 그가 우리 집에 들르실 때마다, 그 곳에 들어가서 쉬시도록 합시다.’ 며 하나님의 사람을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엘리사가 거기에 갔다가, 그 다락방에 올라가 누워 쉬게 되었습니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부인, 이처럼 우리를 정성껏 대접하는 부인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드리면 좋겠소? 부인을 위하여 왕이나 군사령관에게 무엇을 좀 부탁해 드릴까요?’ 그러나 그 여인은 ‘저는 저의 백성과 한데 어울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며 사양했습니다. 엘리사가 자기 시종 게하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 부인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 게하시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남편은 너무 늙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그 여인을 다시 불러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내년 이맘때가 되면, 부인께서는 한 아들을 안을 것이오.’라는 말씀으로 축복했습니다. 이에 그 여인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선생님! 하나님의 사람께서도 저 같은 사람에게 농담을 하시는 것입니까?’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남편도 늙어 그 나이에 자식을 생산할 능력도 없는데 헛된 소망으로, 헛된 꿈만 부풀게 하지 마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엘리사의 축복대로 그 여인은 임신했고, 엘리사가 말한 대로 다음해 같은 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왕하4:8-17)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봉사에 대해 어떤 것이든 보상을 해주고자 했지만 그 수넴 여인은 극구 사양했습니다. 다시 말해 수넴 여인은 자신이 엘리사를 대접한 행위가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받고자 행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수하게 베풀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그 가정에 사람의 힘으로 채울 수 없는 부족함을 아시고 채워주신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자식이 없는 것은 모욕과 수치로 생각되었는데(창 30:6;삼상 1:6,7;눅 1:25)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에게 베풀었던 것인데 꿈에도 생각지 못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오른손이 일을 해놓고 왼손으로 그 결과를 거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선행과 사랑, 그리고 기도생활을 통해 금세와 아울러 내세에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