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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유 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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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유 1:20-23)


1. 유다서

1) 진리에 대한 도전

유다서는 主後 70년에서 80년 사이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 40여년이 지난 시점에 기록된 성경이란 말이죠.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 외에 대부분의 제1세대 제자들은 세상을 떠났고, 그들의 자리는 사도들의 제자들이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의 숫자는 상당히 많아졌고, 그 지역도 소아시아와 유럽 등으로 넓어졌습니다. 그러면서 문제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는데요. 그 중 가장 우선적인 문제는 바로 진리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도전, 즉 당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성도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사상은 ‘영지주의’로서 그 파괴력은 엄청났습니다. 헬라 철학의 눈으로 성경과 신앙을 해석하는 영지주의는 우선 영과 육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상당히 위험한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영적인 것은 선하고 아름다우며 덕스럽지만, 반면 눈에 보이는 세계와 이 세상과 육신은 추하고 악하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먼저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교리를 부인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영이신 예수가 이 더럽고 불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을 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최고의 진리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 즉 “성육신” 아닙니까? 예수님은 10달 가까이 여인의 태속에 계셨다가, 자궁의 양수가 터지면서 온 몸에 피가 묻은 채 세상으로 나와서 울음을 터뜨리면서 탄생했습니다.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을 입고서 우리처럼 먹고 마시고 주무셨으며, 우리와 같은 인생의 喜怒哀樂 生老病死를 다 경험하셨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이자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이상한 자들이 들어와서 예수님을 영광되게 만드는 것처럼 한다는 소리가 사실은 예수님을 욕되게 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들을 진리에서 떠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진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4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라는 말과 함께 그들을 소돔 고모라에 빗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7). 그들은 ‘육신은 악하고 영은 거룩하다’, ‘세상은 악하고 천국은 선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육신이나 세상은 악하므로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문제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즉 육체의 정욕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즐기면서 살아도 죄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구별된 하나님의 교회와 거룩한 성도들이 이 땅에서 포기하고 절제하고 근신하면서 살려고 얼마나 노력합니까? 

포기하기, 전부 포기하기! 내려놓기, 더 내려놓기! 손해 보기, 아니 아예 다 주기! 양보하기, 아니 희생하기! 이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땅을 사는 성도의 미덕입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 없어. 육신은 아무런 쓸 데가 없고 육신의 정욕은 있으나 마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니, 마음대로 살아라!’라고 가르쳤고, 그것이 당시 사람들에게 혼란도 주었지만, 헬라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던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 성도들의 신앙과 삶은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즉 성도들이 제 마음대로 죄를 범하면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죠. 

이렇게 교회가 진리로부터 떠나서 거짓 진리를 따르면서 신앙과 삶이 엉망으로 무너져 가는 것을 그 어떤 지도자가 그대로 지켜보겠습니까? 본 성경의 저자인 유다 역시 가만있을 수 없어 유다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2) 유다, 유다서

유다서를 기록한 사람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일찍 순교당한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친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실제적인 지도자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누구입니까? 유다는 예수님의 또 다른 동생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동생들은 자기들의 형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미쳤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를 보면 그랬던 예수님의 형제들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이후에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믿음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으나, 후에 믿음의 길에 헌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혈육’이라고 하는 인간적인 관계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영적인 관계를 더 重視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영으로만 존재한 분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으로 살아온 세월이 얼마입니까? 누구보다도 인간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 얼토당토 않는 주장과 그것에 미혹되는 교회와 성도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예수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이 되신 것도 확실하다’는 것을 알려야 했습니다.

2. 이단과 맞서 힘써 싸우라!

1) 이단의 죄와 그들이 받을 심판

유다는 유다서 1장 3절, 4절에서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에게 단 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내용은 한 번 확정된 것으로 시대마다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成肉身은 단번에 이루어졌고, 그의 십자가 속죄 사역 역시 단번에 이루어졌으며, 그의 부활도 단번에 이루어졌고, 우리의 赦罪와 稱義도 단번에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이 증명하는 예수님 외에 다른 예수가 없으며, 성경이 증명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고, 성경적 예수와 성경적 복음을 믿고 고백하게 하는 영 외에 다른 성령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불변적 진리를 부정하고 혼잡케 하는 이단들이 교회에 들어왔다면, 이단에 대해 침묵하거나, 이단을 포용하거나, 이단과 협력하거나 연합하여 활동해서는 안 되며, 이단을 분별하고 반박하고 비평하고 이단과의 교제를 단절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단을 경계하게 해야 하며, 나아가 그들과 힘써 싸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단의 죄를 분명히 알아야 하며, 그들이 받게 될 심판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5절부터 10절에 있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 곧 이단자들의 죄악과 심판을 역사상 몇 가지 사실들과 비교합니다. ➀ 먼저, 이단자들의 죄악과 심판을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멸망한 이스라엘의 선조들에 비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기 백성을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항했기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 다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에 들어온 이단자들도,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멸망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➁ 둘째로, 유다는 이단자들을 자기 위치를 떠난 천사들에 비교합니다. 이것은 베드로후서 2장 4절과도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이라도 죄를 범했을 때 엄벌을 내리셨습니다. 

그와 같이 이단자들도 반드시 엄정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➂ 셋째로, 유다는 이단자들을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과 심판에 비교합니다. 옛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은 심히 음란함으로 인해 유황불비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했습니다. 이단들의 죄도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 따라서 이단들 역시 소돔과 고모라처럼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유다는 11절에서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단자들에 대해 평가합니다.  첫째로, 이단자들은 애찬의 암초였습니다. 배는 교회를 상징하고 애찬은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말하는데, 암초와 같은 이단은 교회를 파선케 만들고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망치는 자들입니다.  둘째로, 이단자들은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입니다. 즉 진정으로 주님을 위하거나 교회와 성도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셋째로, 이단자들은 바람에 밀려가는 물 없는 구름입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는 헛된 몸짓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 넷째로, 이단자들은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와 같습니다. 그들은 결국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 다섯째로, 이단자들은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과 같습니다.  여섯째로, 이단자들은 죄인들을 위하여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로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갈 곳은 지옥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때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에 대한 유다의 논조는 아주 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의 논조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강경한 태도입니다. 바울은 천사라도 바른 복음이 아닌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단이 받게 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은 정말 엄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2) 우리 시대의 싸움

이와 같이 유다가 살던 시기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고 성도의 타락을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이단 전성기입니다. 그 선두에는 <신천지> 집단이 있습니다. 신천지는 교회에 은밀하게 추수꾼들을 파견하여 성경공부를 빌미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하나님 대신 인간 이만희를 섬기게 만들고, 사람들을 家出하게 하고, 離婚하게 만들고, 사람을 납치하고 협박하고, 목사를 죽이겠다고 교회에 불 지르는 일들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부적으로는 이만희를 단순히 총회장이라고 합니다만, 예수님의 영이 이만희에게 임해서 이만희가 주요, 그리스도요, 요한계시록 22장의 사자요, 두 증인 중의 하나요, 이긴 자로서 영생불사의 존재요, 생명록과 사망록을 쓰는 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료성경신학원을 비롯하여 복음방, 시온기독교신학원, 하늘문화연구원, 기독교교역자선교회, 러빙피플, 기독교교육협의회, 원로목사․원로장로협의회 등 기독교인 것처럼 위장해 교회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신천지는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성경을 짜깁기하여 성경 보는 눈을 망가트렸으며, 거짓말을 “모략”이라고 포장해서 신천지 교인들은 참과 거짓에 대한 구분이 무너져 있을 뿐 아니라, 거짓말을 자유자재로 합니다. 자신의 신상을 철저히 숨기면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며 봉사하고, 목사에 대하여 불평을 터트리며 목사의 성경지식에 회의를 품게 만들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가르치겠다고 하거나 선교사를 소개하는 등 이 신천지 집단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어디 이런 異端의 蠢動만 문제입니까? 지난 주간 여러분이 듣고 보신대로, 한 고등학생이 숨진 여자 노인의 시신을 흉기로 훼손하고 성폭행한 이른바 <사체오욕사건>이라는 天人共怒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A’라는 한 고등학생은 지난 18일 오전 3시 40분께 자살한 시체를 흉기로 찌르고 성폭행했다고 합니다. 경찰에 따르면 A군은 별 죄의식도 없이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그랬다”고 하는데요, 분명 정신적인 문제도 있어 보입니다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아직 그리고 색칠할 부분이 더 많이 남은 어린 고등학생이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처럼 심각합니다. 즉 교회 안만 이단으로 인하여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도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오늘 본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3. 보다 우선적인 대처방법

그런데 여러분, 유다서의 결론 부분인 오늘 본문은 이단의 준동에 대해서 아주 단호하게 말하던 어조나, 거기에 대해 맞서 싸우라는 전투적인 명령조의 말씀과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즉 결론적으로, 그리고 더 중요하게 말씀하는 오늘 본문 부분에 와서는 그 내용과 분위기는 아예 달라졌다는 말인데요. 우선 유다의 권면의 방향이 달라졌고, 말투도 굉장히 부드러워졌습니다. 유다는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1)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

먼저 유다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는 뜻입니다.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터, 곧 기초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한 건물이 리모델링 중 무너진 것을 통해 기초가 잘못된 집은 쉽게 무너지거나 파손된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땅을 깊이 파고 기초를 튼튼히 세운 후에 집을 짓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를 어디에 두고 출발하느냐’는 것입니다.  

신앙의 기초가 헬라철학이라면 그 기초는 가장 약하고 위험한 기초일 것입니다. 그러나 튼튼한 기초는 개인의 私見이나 主義 主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만이 신앙의 진정한 기초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그의 말씀 위에 삶을 건축해야 합니다.  그리고 그 믿음은 섞이지 않아야 합니다. 즉 세상의 사상이나 주장이나 사람의 가르침이나 혹은 다른 종교의 것과 섞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신앙이 얼마나 섞이고 있는지 아십니까? 

얼마 전 기독교 천주교 불교 지도자들이 함께 명상을 하고 그것을 서로 나누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만약 개인의 의견이나 세상의 철학에 자기 삶과 신앙을 건축한다면 그의 삶은 금방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는 말은 거룩한 믿음에서 나오는 거룩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독일의 어느 조각가가 예수님의 상을 작품으로 만들어 볼 마음이 생겨 작업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완성했습니다. 그는 자기 작품에 만족하여 주일학교 학생을 하나 불러서 그것을 보여 주며, “이것이 누구 같니?”라고 물었습니다. 

학생은 그냥 막연히 “어떤 유명한 사람 같네요”라고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작업에 들어가 6년 동안 예수님 상을 다시 제작한 후에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며 “예수님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만족했습니다. 그 후,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에서 프랑스 國神인 비너스 상을 조각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은 예수님을 조각한 손이므로 당신 나라의 신의 상을 조각할 수 없소”라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에게 기도드리고, 예수님의 본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삶, 그 외에는 거절하고 피하는 것이 진정한 거룩인 것이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full name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입니다. 크리스토퍼는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평생 한 번도 그리스도를 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대신 황금을 지고, 황금을 찾아 세계를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인생이 끝나갈 때쯤, 지난 삶을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이름은 그리스도를 지는 자인데 지금까지 저는 헛된 것만 지고 다녔습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진정한 크리스토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이후로 콜럼버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만 짊어지고 가는 거룩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오직 성경만 따르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거룩함이 있는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2) “성령으로 기도하라!”

유다의 두 번째 권고는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단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지식은 많고 비판은 잘하나 기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성령님이 없습니다. 여러분,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까? 그런데 요즘 신천지 집단이 기존 교회에 침투한 자들에게 신령한 성도인 것처럼 위장하려고 방언을 교육시킨다고 합니다. 전에 한 번 방언을 하게 해 준다면서 할렐루야에서 따온 “루야루야루라루라라라라”하는 방언을 가르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신천지 집단은 그보다 고급스럽게 이스라엘 12지파 이름의 첫 글자를 암송하는 방언을 가르칩니다. 

“르시레유단납갓아잇스요베!” 웃기는 얘기지요! 더 웃기는 것은 이런 웃기는 것에 미혹당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성령을 경험하는 것이고, 참되게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없는 기도는 재미가 없고, 짧고 반복적이고, 사무적이고 건조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기도하면 기도의 범위가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지고, 시간이 의식되지 않고, 기도가 즐겁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을 경험하시고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

유다의 세 번째 권고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입니다.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행함이라는 측면에서는 말씀을 기억하고 지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 유혹 받는 측면에서는 이단과 미혹의 영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여 자신을 지킨다는 뜻도 있습니다. 또한 위치라는 측면에서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서서 그 자리를 지킨다는 뜻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이 머물러 있어야 할 곳은 당연히 하나님 안입니다. 기존 교회 안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예배하고 섬기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는 말씀은 ‘나를 지킬 힘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며, ‘그 힘은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힘이 들고 몸과 마음도 지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다의 네 번째 권고는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 진행, 완성,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됩니다. 우리의 重生과 稱義도 주님의 긍휼로 이루어졌고, 우리의 聖化도 주님의 긍휼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며, 우리의 榮光의 구원의 完成도 주님의 긍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면서 영생을 향해 달려가야 하고, 끝까지 그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永生에 이를 것입니다. 반드시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여러분의 죄와 실수와 세상의 유혹은 엄청날 것입니다. 긴 시간 동안 그것이 반복되면, 주님께서 자신을 용납해 주실 것 같지 않고, 자신도 스스로를 용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자비와 은총을 베푸십니다. 용서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안으십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변치 않는 하나님의 긍휼이 여러분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5) “긍휼히 여기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 권고는 보다 적극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들, 특히 의심하는 자들, 이단으로 인하여 흔들리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단의 유혹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 주라는 말입니다.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는 말은 보다 심각한 것으로 이단에 빠져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 자를 그 이단의 불에서 구원하여 내야 합니다. 이 말은 현재 교회 안에 있는 이단의 사상과 신앙에 대해서는 칼같이 엄격하게 하되, 그 사람과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교회 안에, 그리고 성도에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를 의심하는 자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의 부족과 연약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온전케 되기를 위해 권면하고 또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불속으로도 들어가고, 오물 속으로도 들어가, 그들을 구하되 자신은 더럽히지 않는 거룩을 향한 열정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 

4. 이 시대를 사는 법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법을 어떻게 말했습니까? 유다는 굉장히 강한 어조로 이단들에 대해서, 그 종노릇하는 자들에 대해서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는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유다의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의 이단 문제는 심각합니다. 그리고 윤리와 도덕과 질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 사회 역시 심각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맞서서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이 아닙니다. 그 보다 먼저 우선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오직 성경만 따르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거룩함이 이단과 싸우는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싸움보다 우선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즉 이단과 맞서는 것보다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 받은바 은혜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네 번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사모하는 삶입니다.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날마다 순간마다 그 긍휼을 덧입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다른 사람들, 특히 이단으로 인하여 흔들리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단을 미워하고 그들과 싸우지만 한 영혼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우선이고 바탕이라는 것이죠. 그럴 때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건강해 질 것이고, 이단들은 무너질 것이며, 이 사회가 밝아질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가 교회적으로 이단이 준동하고, 사회적으로 어두워져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법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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