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의 치유 (느 5:1-6)

첨부 1


사랑의 치유 (느 5:1-6) 


작가 이청준의 작품 중에 ‘벌레 이야기’라는 중편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학교 교사에게 유괴당하여 죽게 됩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살인범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너무도 괴로워 자살을 기도하기도 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사람들의 권면을 받으며 살인범을 용서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교도소로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살인범은 감옥에서 전도를 받아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면서 평온한 얼굴로 할렐루야, 아멘을 외칩니다.
아이 어머니는 교도소를 뛰쳐나오면서 하나님께 항변을 합니다.
“저놈을 용서할 수 있는 권리는 나에게밖에 없는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저놈을 용서해주는 것입니까?”
그 어머니는 살인범 사형집행일에 같이 자살을 하고 맙니다.
이 이야기에서 살인범은 용서받는 자의 아픔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하는 자의 아픔과 용서받는 자의 아픔이 어우러질 때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값없이 용서해주시지만 값싸게 용서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을 겪으시면서 우리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기신 고통과 죽음은 용서하는 하나님의 아픔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용서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용서받는 자로서의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지옥의 타오르는 불길을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지적인 아픔.

천치 바보처럼 살아온 자신의 삶을 후회하는 감정적인 아픔.
새롭게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하나님의 의로움에 미치기에는 어림도 없어 하나님의 긍휼만을 기다리는 의지적인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느헤미야 4장에서 이스라엘 밖에서 들어온 시련에 대하여 살폈습니다.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로 인한 모진 반대와 방해로 인해 느헤미야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쓰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반대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내부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습니다. 
본문의 1절입니다.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여기서 “크게 부르짖어”라는 말은 ‘못 살겠다.’는 말입니다. 
‘살려 달라.’는 말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갑자기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며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벽을 재건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 가지 생활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인구의 증가입니다. 
2절 중반절에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백성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성벽 재건을 시작할 때만해도 수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벽이 완공되어 가면서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출산이 많아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성벽이 재건되어 예루살렘이 안전해지고, 경제 회복의 기미를 보이자 여기저기 흩어졌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흉년입니다. 
호사다마라고 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3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고대 사회에서 흉년이 들면 대책이 없습니다.
굶어 죽어야 했습니다.
거기다가 한 가지 문제가 더 겹쳤습니다. 
세금입니다. 

4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이 세금은 페르시아 왕에게 바치는 세금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새롭게 발돋움하는 신흥제국인 그리스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마당에 세금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식민치하에 있는 유다백성들은 페르시아의 세금에 힘겨워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이렇게 되자 가난한 백성들은 빚을 내기 시작했고, 빚을 갚지 못한 백성들은 노예로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노예생활은 비참합니다. 
언제 헤어진 가족과 만날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못살겠다고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갈등의 원인
1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1절). 
여기서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이라는 표현을 잘 보십시오. 
같은 유다백성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5절에서 이 사실은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같은 육체, 같은 혈육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본문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한 겨레인데 저희 살이나 우리 살이나 무엇이 다르냐? 제 자식이 아까우면 남의 자식 아까운 줄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같은 혈육이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힘없는 자는 힘 있는 자의 종이 되고, 돈 없는 자는 돈 있는 자의 노예가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지난번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했을 때 나온 얘기입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재보선 패배의 원인으로 ‘정부의 민생경제 정책 실패(50.8%)’를 가장 많이 꼽았습니다.
모 의원은 “삼성이 수조원의 이익을 내고 우리나라가 6% 성장률을 기록하면 뭐하나. 서민들의 체감 경기는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라고 했습니다.
맹자는 민불환빈 환불균( )‘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백성은 가난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못함을 근심한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백성이 어찌 가난을 근심하지 않을까마는, 가난한 것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은 균등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장의 과실을 일부 계층이 독점한다면 그 성장은 오히려 갈등의 원인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겪는 첨예한 갈등도 돈의 쏠림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등하게 된 원인도 돈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많고, 흉년은 들고, 세금은 많아지고, 그래서 빚을 지게 되고, 그 결과 어떤 사람은 노예가 됩니다.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돈은 한 개인을 불행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신앙공동체에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인끼리는 돈 거래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어려울 때 상부상조하는 것은 좋습니다. 

혹시 부득불해서 돈을 주고받을 때는 그냥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인끼리 돈 거래를 하게 되면 신앙공동체를 파괴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돈 잃고 사람 잃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지켜야할 마지막 보루입니다. 
세상에서 실수하고, 실패할지라도 교회에 와서 위로 받고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영적 안식처인 교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어지럽혀 놓으면 갈 데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지럽혀졌다는 것은, 담임목사와의 관계가 어그러지고, 교우들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자기 자리를 어지럽혀 놓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갈등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냥 두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입니다. 
지나가는 사람과는 아무도 갈등하지 않습니다.
갈등은 서로 의지하고 믿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갈등이 부부 사이에 일어나고, 그 다음이 부모 형제, 그 다음이 직장동료, 그리고 교회 성도끼리 일어납니다. 
이러한 의존적 관계에서 서로 갈등이 일어나면 좋았던 관계는 깨어지고 서로 불행해집니다. 
갈등을 치유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소진되고, 신앙공동체에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갈등의 치유
그러면 어떻게 갈등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느헤미야는 갈등을 이렇게 치유했습니다. 
본문의 6-7절입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느헤미야는 갈등하는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갈등을 일으키는 당사자들을 불러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느헤미야가 그렇게 호되게 꾸짖었는데도 반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8절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눈물이 쏙 빠지게 나무랐는데 아무도 반항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질문)
이것이 저가 본문을 묵상할 때의 관심이었습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말하면 소리가 커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눈물로 말하면 자기에게 서운한 말을 해도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책망에 아들은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책망에 딸은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마음에 자식을 향한 깊고 뜨거운 사랑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갈등을 치유한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침묵하십시오.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지식도, 돈도 아닙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똑똑한 사람으로 살지 말고, 멋있는 사람으로 살지 말고, 사랑의 사람으로 사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복음성가-사랑하는 주님 앞에(찬220장)

사랑에 대한 오해
사랑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잘 듣고 삶에 적용하십시오.
그 첫 번째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라는 오해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오해입니다. 
미워한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쪽에는 미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이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은 서로 반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편에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할 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많은 부부들이 서로 미워하기 때문에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미워하고 사느니 차라리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워할 만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미워하는가 하면, 상대방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실수를 미워합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미워합니다. 
상대방의 게으름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남편을 향해 바가지를 긁고 있다면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남편이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고 있다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두 번째 사랑에 대한 오해는, 좋아해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좋아하지 않는데도 사랑해야 합니까?” 
만일 이런 질문을 예수님께 드렸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당연히 사랑해야지”라고 하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여러분, 일본 사람을 좋아합니까? 
대부분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북한 공산당을 좋아합니까?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여기에 세상적인 사랑과 성경적인 사랑의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사랑은 이것입니다. 
‘좋아하는 것만 사랑하세요.’ 
성경적인 사랑은 이것입니다. 
‘좋아하지 않는 것도 사랑하세요.’

사랑에 대한 세 번째 오해는, 사랑은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에는 감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감정은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아름답게도 합니다. 
그러나 감정이 사랑의 전부는 아닙니다. 
많은 부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옛날에는 참으로 많이 사랑했어. 지금은 식었어.” 
그래서 무엇이 식었나 보았더니 사랑의 감정이 식었어요. 
감정이 식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오늘날 사랑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랑이 너무 감정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있으면 사랑이고, 감정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하여 쓴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모두 감정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행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어디도 사랑을 감정이라고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음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오래 참는 행동입니다. 
감정은 있는데 오래 참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무례히 행치 않는 행동입니다. 
감정은 뜨거운데 무례히 행동한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이 아무리 뜨거워도 자주 성낸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결국 사랑은 감정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만들어 냅니다.

이제 이야기 하나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남 아프리카의 미개 부족의 하나인 바벰바 족 사회에서는 죄를 범한 자를 마을 한 복판 광장에 데려다 세웁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광장에 모여 죄인을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립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한마디씩 합니다. 
그 때 외치는 말은, 가운데 선 사람이 과거에 어떤 좋은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입니다.
그의 장점, 선행, 미담들이 하나하나 열거됩니다.

그를 비난하거나 욕하거나 책망하는 말은 결코 한 마디도 해서는 안 되고 꼭 좋은 것만 말하게 되어있습니다.
칭찬의 말을 다하고 나면 그때부터 축제가 벌어진답니다.
칭찬의 말을 들은 죄인은 그 삶이 변화된다는 것이지요.
사랑이 갈등을 치유하고, 칭찬이 사람을 세웁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신앙공동체가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