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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로서 사명 감당합시다 (골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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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로서 사명 감당합시다 (골 1:18)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 머리가 되신다는 표현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유기적 관계가 없을 때에는 생명력을 잃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각 지체 간, 각 성도들 사이에는 각별히 친밀한 유대가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성도들의 연합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그 몸 된 교회가 먼저 바로 서야 합니다. 분열이나 성도들 사이에 있는 불신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교회의 근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를 바로 유지시키고 생명력을 불어넣으시는 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좋게 평가하듯이 능력이 많은 목회자나 수단이 좋은 성도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도들은 먼저 그리스도의 신분과 능력, 권위를 알고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그분의 겸손과 사랑을 알게 되고 경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은 불가분의 생명적인 관계입니다. 머리와 몸은 둘로 나뉘어서 따로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몸은 머리의 지시와 조정을 받아, 머리의 생각과 명령을 따라 움직입니다. 건강한 육체는 머리의 생각이 건강하고 몸의 활동이 건강하게 마련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골 1:15상)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그렇다면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보이는 그리스도'가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예수님의 선언적 말씀이 바로 여기서 또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형상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품성과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989년 중공의 외교부장 화국봉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화국봉 일행의 얼굴의 미국 텔레비젼의 화면에 잠깐 비쳐진 일이 있었다합니다. 그때 로스 엔젤레스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던 70세의 한국 노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면서 외치기를, "저 사람 내 아들이다!" 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합니다. 그 때 그집 아들과 며느리는 어머니께서 70세가 넘으셔서 혹시 정신이 희미해지신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를 했다합니다. 

그도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텔레비젼 화면에 나타났던 사람은 중공정부의 고위 관리인 중국 사람이요, 70이 넘은 노파는 미국에서 살고있는 한국인인데 어떻게 중공관리가 한국 사람의 자식이 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러나 그 할머니는 아들에게 텔레비젼에 비친 사람이 틀림없이 네 형이니 속히 연락을 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성화에 못견딘 아들은 형의 소식을 수소문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정의 내력은, 그들이 중국에 살고 있던 1945년에 해방을 맞았고 큰 아들은 대학 졸업반에 있어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기로 하고 가족들만 먼저 서울로 왔으며, 중국은 모택동 세상이 되어 그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중국을 벗어날 수 없어 이산가족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후 중국에 남아있던 큰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에 동화되어 갔고 중공 외교부의 고위직에 올라 화국봉을 수행하고 일본을 공식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며, 서울로 온 가족은 둘째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로스 엔젤레스에 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헤어진 지 이미 35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 고령의 어머니는 35년이 흐른 뒤에 잠깐동안 텔레비젼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자기 아들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아무리 먼 곳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었다 해도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아십니다. 비록 죄악으로 병들어 우리 원래의 거룩하고 성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리기는 하였어도 하나님을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변질되고 더러워진 우리의 가슴을 알아내시고 찾아오셨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십니다. 

(골 1:15하)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먼저 나신 이'(프로토토코스(prototocos)란 말은 창조의 순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권위의 순서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도가 누구냐 모든 만물 가운데서 가장 권위가 있고, 최고의 권위가 있는 분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은 그 권위 아래 그 주권 아래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시간적으로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의미 할 수도 있고, 등급 상으로 우월하다는 의미로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우월하시며 창조주로서 권세와 능력을 지니신 점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 부러더 로렌즈 수도사는 어느 날 제일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수도원장으로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그가 문제 많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수도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노수도사가 왔구려!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 닦으시오" 처음 부임한 수도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전통이 된 모양입니다. 노수도사는 이 수도원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노수도사는 "네! 그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노수도사는 한달, 두달, 석달, 접시를 닦았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구박이 대단했습니다. 석달이 지나서 감독이 순시 차 왔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이 쩔쩔매었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물었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수도사들이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깜짝 놀랬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즈 수도사를 3개월 전에 임명했는데!" 감독의 말에  젊은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했습니다. 그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노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노수도사의 죽기까지 낮아진 겸손의 도로 그 후부터 그 수도원이 모범적이 수도원이 됐다고 합니다.
  
1955년 2월 1일 오후 6시 미국 역사상 획을 긋는 사건이 한 버스 안에서 벌어 졌습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미국 남부 알라바마 주 몽고메리에 사는 흑인 여자 로사 파크스입니다. 그날도 이 흑인 여자는 하루 종일 일을하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탓습니다. 당시에 흑인들은 버스의 뒷 자석에만 앉을 수 있었고 앞자리에는 앉을 수 없었지만 로사는 지친 몸으로 서 있을 수가 없어 비어있는 앞 자석에 앉았습니다. 운전기사는 그것을 보고 즉시 뒤로 가서 서 있으라고 말했지만 로사는 꼼짝을 할 수 없어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정거장에서 기사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경찰은 로사를 끌어내어 유치장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흑인들이 일어나서 인권 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로사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경찰은 그 운전기사인 블레이크씨를 불러 증언을 들었는데 그 분은 '그 여자가 버스를 타자 말자 백인들을 향해 긴 한숨을 쉬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로사에게 '왜 긴 한숨을 쉬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로사는 조용히 대답하기를 '백인들이 불쌍히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여 한숨을 쉰 것이 아니라 백인들이 불쌍하여 한숨을 쉬었다는 말에 경찰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로사는 '백인들은 자기들의 피부가 히다는 한 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만하여 벌을 자초하고 있으니 불쌍하여 한숨을 쉬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자 이 말에 큰 감명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인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였습니다. 이 때부터 킹 목사는 전에 품고 있던 백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거스려 사는 백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 인권 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창조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의하면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권세 자들도 그리스도의 주권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 신앙의 가장 깊숙한 정수 부분으로서 신앙생활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최종적인 목표라는 것입니다. 창조주로서 권위나 능력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가 동일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창조 사역에 성부 하나님과 동참하셨음을 설명합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신적 권위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만물 통일의 근본 원리이시며 아울러 모든 피조물들을 유지하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바르게 유지시키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창조주를 거부하는 악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하면 중보 사역만을 생각하기 쉬우나 그분의 신적 권위, 창조주로서 능력과 위엄 등도 알고 인정하며 경배 드려야 마땅합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 '타이타닉'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합니다. 1912년 첫 항해에 나선 타이타닉호는 당시 세계 최대, 최고급 시설을 갖춘 호화 유람선이었다합니다. 대서양 횡단 유람의 경우, 오늘날 화폐가치로는 1인당 5만 달러 정도였다고 합니다. 1등칸 승객들의 평균 재산은 현재 가치로 50억 달러쯤 됐다고 합니다. 타이타닉호는 매우 크고 견고한데다 화려해서 '침몰이 불가능함'이라는 홍보용 문구가 일반적으로 통용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거대한 빙하와 충돌하면서 명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1517명이 죽고, 배는 심해로 가라앉았습니다. 세계사를 보면 눈에 보이는 타이타닉호만 침몰한 게 아닙니니다. 영존하리라던 나치 체제도, 공산주의도 줄줄이 종말을 고했습니다. 인간 욕망의 최고, 최대는 유한할 뿐입니다. 사상과 이념, 권력과 재물 등 이 땅의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창조주만 영원하십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우주 만물의 유지자이십니다.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 예수는 만물의 창조자 일뿐만 아니라 그 창조된 우주 만물을 보존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생존을 위하여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생존과 유지가 가능하도록 섭리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소년이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시골 소년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10년 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났습니다. 시골 소년은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소년의 아버지는 시골 소년이 의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물에 빠졌던 소년은 훗날 영국의 수상이 됐습니다. 가난했던 시골 소년은 페니실린을 발명해 노벨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윈스턴 처칠과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 이야기입니다. 1940년 5월 처칠은 폐렴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당시엔 한번 걸리면 낫지 않는 죽음의 병이었다. 처칠의 꺼져가는 목숨을 건진 건 바로 페니실린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이루어진 줄 믿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근원자이십니다.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다시 말하면 다시 산 자가 됨으로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새로운 창조에 대하여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으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새로운 것도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없고 비교 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불렀습니다. 그녀는 폐결핵으로 인생의 황금기인 스물네살 때부터 13년동안 거의 침대에 누워지냈습니다. 또한 직장암 파킨슨병 척추카리에스 등이 계속 육체를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쏟아졌습니다. 그것은 '절대자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원죄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쓴 작품이 아사히신문사의 소설 공모에 당선됐습니다. 그녀의 나이 마슨 두 살 때였습니다. 그녀는 일약 일본 최고의 작가로 알렸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입니다. 그가 소천하기 직전에 남긴 유언 같은 잠언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합니다. "질병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뿐이었습니다. 그대신 '신앙'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생을 마감한 후 남은 것은 '쌓아온 공적'이 아니라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신적인 충만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골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했을 때에 사실 사람들은 무엇으로 자신을 충만케 할 뿐만 아니라 계속 충만케 하려고 애쓰는가 하면 비본질적인 것으로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자꾸만 채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되고 믿게 되고 그 안에 거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를 통하여 세례를 받으며 그와 함께 살아가기 시작하다 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그 충만의 재료가 다름 아닌 그리스도로 바뀌게 된다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신앙이 주는 삶의 질적인 변화인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최종 목표도 다름 아닌 그리스도라는 것으로서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로 충만케 그리스도로 통일케 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이 다 보이기 시작하는데 다 그로 말미암고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에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재해석하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신앙이 주는 진정한 복이라 하겠습니다. 

프랑크 조셉 하이든의 곡은 거의가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합니다. 그의 생애도 그렇다합니다. 그는 백 개 이상의 심포니와 팔십 개 이상의 소나타, 그리고 두개의 위대한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다합니다. 그는 말했다합니다. "나는 작곡할 때, 그리고 작곡하는 중에 늘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리하면 내 마음에는 기쁨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마치 악보의 음이 춤추는 것 같고 나의 마음도 춤추며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우주적 화해자이십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어떻게 화목시켰기에 우주적 화해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 즉 모든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면 죽는 것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말씀으로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인류를 포함한 온 우주가 주인과 화목케 되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또 다른 의무를 부여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에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22절)로 서야만 하는 의무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의롭다는 인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만, 이제부터의 삶은 거룩하고 정결하게 진행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면에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듭난 그때부터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하여 모든 일이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본받아 악하고 더럽혀진 이 세상에서 화목을 도모하는 일, 평화를 가꾸는 일, 참된 경건을 실천하는 일 등을 수행해야만 함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따르면서 순종하기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일까요? 성경읽기? 기도? 전도? 예배? 봉사? 헌금? 힘들기는 하지만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하지 않다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가장’ 하기 힘들고 어렵고, 아니 죽기보다 하기 싫은 것은 다름 아닌 용서라 합니다. 용서는 본능을 거스릅니다. 당한 것 이상으로 앙갚음하고픈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예 라멕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서도 자신에게 고통을 준 자는 77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용서는 도덕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도덕은 권선징악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도덕은 말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용서는 하나님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자그마치 일만 달란트나 탕감 받았으면서도 고작 백 데나리온에 쩔쩔매느냐고 합니다. 십자가는 말합니다. 너희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은 말합니다. 너희에게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노라고 합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합니다. 어느 스페인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이라 합니다. 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합니다.

이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원하고 용서를 기다리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복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말기 암으로 길어야 1∼2년 살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분이 있었다합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크게 낙심했으나 곧 마음을 추스르고 남은 시간을 후회 없이 살기로 했다합니다. 제일 먼저 그는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 상하거나 상처 줬던 이웃들을 만나 화해했다합니다. 용서하기도 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관용과 사랑을 베풀었다합니다. 두 번째로 그는 믿음 생활에 힘썼다합니다. 모든 예배와 기도, 교회 봉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합니다. 세 번째로 그는 남을 돕는 일을 했다합니다. 도움을 받다가 죽지 말고 도움을 주며 보람 있게 죽음을 맞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의 삶의 자세는 진지했고 모든 사람이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감동 받았다합니. 그는 당초 진단보다 훨씬 더 긴 5년을 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몸 된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잘 붙어있는 교회로서, 이 안에서 함께 자라가고 되어져가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며, 그리스도로 통일케 되는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곳, 그러한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뿐만 아니라, 슬픔 당한 사람은 이 교회 속에서 머리되신 그리스도로 부터 위로를 받으며, 없는 사람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로 부터 이것 저것 공급받아 풍성하게 되며, 사회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던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서 자리매김 되는 공동체, 약한 자는 강하게 되고 영적으로 눈먼 자들은 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는 교회 공동체, 심지어 영적으로 죽은 자가 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생명을 얻게되는 생명의 공동체, 순간 순간 넘어지고 쓰러지며 죄를 짓고 사는 삶의 현실 속에서 기도와 찬송과 예배를 통하여 죄 사함과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얻게되는 거룩한 공동체, 그리하여 정말 이 시대와 역사 속에서 세상을 향한 희망의 공동체, 그리고 이 세상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실현될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 나라 구현을 위하여 헌신할 일꾼들을 많이 배출하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되어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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