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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뜻 (요 6:3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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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오신 주님의 뜻 (요 6:38-51)

우리는 이 땅에서 발을 딛고 살고 있다. 우리는 내 뜻대로 인생을 펼치며 살다가 “그것이 성공이다.”는 메시지를 듣고 살고 있다. “내 뜻, 내 계획, 내 인생을 살라.” 이것이 세상의 성공 가치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알아야 한다. 성경을 따라서, 주님을 따라서 살아야 바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내 뜻대로’가 아니고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이 땅에 나를 부르신 이가 주님이시고 만나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사명을 맡기신 이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나의 구주되신 주님은 나를 살려주셨다. 나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떡이 되어주셨다. 이 떡이 바로 주님의 살이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몸이다.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므로 생명이 들어왔다.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자기를 매어달도록 죽음으로 걸어가신 그 걸음은 나 때문이었다. 이 주님을 믿음으로 죽어 있는 내가 살아나서 영생을 가진 자가 되었기에 아버지의 뜻, 주님의 뜻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 이 땅에서의 주님은 삶의 뜻은 무엇인가?  

1.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어졌다. (요6:38上)

요6:38上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이라 하였다.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하나님과 동등되는 분이다. 그러나 빌2:6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셨다.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요셉의 아들 목수로 사셨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의 육체적 모습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보내어졌다. 그러기에 땅에 속한 자가 아니다. 땅에서 살지만 하늘의 하나님께 속하셨다. 

이것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수군거렸다. 요6:42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님을 순전히 눈에 보이는 육체의 인간으로만 인식하고 있기에 수군거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 나를 보내신 이’라는 말을 요6:38, 39, 44에서 3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하고 계신다. 목수의 아들로서 태어나 자신의 사는 이유가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으로 인한 것임을 거듭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주장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주장은 확신의 선포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에 속한 자다.”

나는 이 땅에서 김氏, 박氏 ... 가문에서 태어났다. 우리 모두도 목수의 아들, 농군의 아들, 장인의 아들로 태어나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제부터 거듭난 자에게 이 삶이 우연일까? 아니면 섭리일까? 저절로 어떡하다 보니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어진 것일까? 주님을 믿는다면 나도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어졌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저절로’가 아니고 목적이 있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인생이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인생이 달라진다. 기쁨이 솟아난다. 활력이 솟아난다. 이처럼 거듭난 자는 특별하다. 
  

2.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다. (요6:38下)

요6:38下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세상에 태어나 자기 삶을 제대로 사는 삶은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 뜻은 나만 왕이 되려는 야망이다. 그러나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려 해야 한다.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가 보낸 아들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뜻은 심판 날에 다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고 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삶도 내 뜻을 꺾어야 한다. 대통령에 의해서 보내어진 대사가 일본에 갔다면 대한민국 정부의 명을 따라야 한다. “독도는 한국령이다. 그것을 항의해라.” 그러면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당해도 그 뜻을 전해야 한다. 일본이 융숭한 대접을 하고 좋은 선물을 준다해도 가차없이 외면하고 독도 영유권이 한국임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기, 내 이름, 내 신분, 내 얼굴만 챙기려는 정치인이 된다. 철저히 보내어진 자는보낸 정부의 뜻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일 잘하는 대사의 모습이다.

우리 크리스챤은 오직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늘 나라 대사여야 한다. 우리가 이 뜻을 알자. 아버지의 뜻, 예수님의 뜻을 분명하게 붙잡고 그 뜻대로 살아드리자. 
  

3. 나는 죽음으로써 생명의 떡이 된다. (요6:47~48)

요6:47~4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죽는 자를 살리는 떡과 음료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주님의 살과 피다. 주님은 십자가로써 생명의 양식이 되셨다. 나를 심판으로 이끌 죄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예수는 죽음으로써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렸다. 당신의 몸이 생명의 떡이 되지 않고는 죽은 자를 살려내려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피할 수 없었다. 고난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싶은 자기의 뜻은 있으나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자기를 찢고 죽이고 제물로 올려놓았다. 

주님의 십자가, 거기에 고귀한 아들의 사명이 성취되었음을 본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순종과 사랑의 결합을 본다. 그리고 또한 이 뜻을 행하는 삶이 아들 예수님에게 주어진 매일의 양식이었다. 

요4:32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4:3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주님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려 뭇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는 것은 하루를 건너뛰거나 잊어버릴 수 없는 양식이었다. 날마다 날마다 먹고 마시는 양식이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사람을 살려내는 사명을 잊지 않고 그 사명을 먹으면서 지내신 것이다. 공생애 기간 동안 주님은, 호흡이 있는 동안 주님은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살려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영생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생명의 떡이 되어야 한다. 죽음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주야로 잡수시는 생명의 양식이었다.

이 말씀은 예수가 바로 유월절 어린 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피를 흘리므로 심판을 면케 한 이라는 설명이다. 처음부터 생명의 주로 오셔서 생명이 되려고 자기 뜻을 버린 예수님, 누구에게나 살려냄을 주는 생명의 떡이 되려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유월절의 양이 되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구원에 감격한다. 피는 음료, 떡은 양식으로 먹고 영생을 얻었다. 그분의 것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너를 위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하는 일을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내 뜻대로’의 삶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위해 죽지는 못해도 죽으려 해야 한다.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지 못해도 주의 뜻이 아닌 것은 거절해야 한다. 나만을 위해 사는 삶의 스타일을 바꾸어 희생의 모양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는 영적 예민함이 살아나야 한다.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나의 양식을 먹는 것만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의 양식은 하늘에 관한 것, 교회에 관한 것, 영적인 생명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관한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죄에 떠내려가는 영혼,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사명이어야 한다. 나를 위해 양식이 되시고 음료가 되어주시려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은 어린 양 예수를 묵상하면서 나의 사명이 다른 사람들에게 살려냄을 가져오는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 

내가 다른 이를 살려내는 생명의 떡이 되려면 나도 순간 순간 죽어야 한다. 너를 잃어버리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참고 견디고 마침내 죽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다.(고전15:31) 또 예수의 죽음을 날마다 짊어진다고 하였다.(고후4:10)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산다고 하였다.(갈3:20) 우리도 영성이 자라나 마침내 죽음을 짊어져야 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내가 죽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되고 살리는 역사가 나타난다. 죽을 육체에, 노쇠하고 부서지는 육체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은(고후4:11) 죽음을 짊어지는 길 밖에 없다. 내가 죽는 것이 제자의 도다. 내가 죽는 것이 십자가의 도다. 하늘에 속한 자의 사람의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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