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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 (마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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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 (마 5:43-48)

우리나라 초대 교회사에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원래 유명한 깡패출신이었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못살게 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김익두, 저런 인간을 하늘이 빨리 데려가지 않나?’ 하면서 싫어했습니다. 울던 어린 아이들까지도 ‘김익두 온다!’, 그러면 울음을 그쳤다는, 그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김익두가 예수님 믿고 회개해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회개한 김익두는 사람들에게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뻐했습니다.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으면 그의 부고장을 받고 그렇게들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죽었다는 김익두가 시장에 나타났습니다. 옆에 시커먼 책 하나를 들고 등장했습니다. 그때 한 술취한 사람이 김익두를 몰라보고 시비를 걸다가 주먹질을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물통을 뒤집어 씌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김익두는 툭툭 털고 일어나 그 사람을 쳐다보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김익두요. 당신은 옛날의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인해서 기뻐하시오. 살았다면 당신은 요절이 났을 거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심령 안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짐승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과 짐승은 다를 바가 없고, 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 욕구 등의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에게 없는 영혼이 있습니다. 사람은 짐승에게 없는 양심이 있고, 이성이 있고, 도덕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성적으로 살아야 하고,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고, 양심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짐승과는 이러한 인격이 있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육체와 영혼을 가진 한 인격체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계속되는 구약의 율법에 비교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영적인 삶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입니다.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의의 최고의 영역이요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산상 설교의 핵심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원수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질문을 던질 것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원수 사랑이 가능한가? 


1.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의 율법 선생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이 가르친 수준은 인간적인 수준입니다. 

여러분,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리들도,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랑합니다. 이방인들도 자기 형제들에게는 인사합니다. 깡패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아껴 주고 돌보아 줍니다. 쉽게 말해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의 수준은 철저하게 복수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이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면 자기도 남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합니다. 남이 자기에게 피해를 입히면, 자기도 남에게 피해를 입히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수준이요, 모든 불신자의 수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믿는 성도들은 불신자와 달라야 하고, 불신자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불신자보다 나은 삶이란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한국 교회의 유명한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한 스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스님이 목사님에게 말했대요. “기독교는 우리 불교보다 저 차원의 윤리를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아예 원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질문을 했대요. “스님은 일생을 살면서 마음 속으로 미워하거나 싫어했던 분이 없으십니까?”, 그러자 스님은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다시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원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을 도피하지 않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우리는 출발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지를 모색합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가르칩니다.” 

‘플리머’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이며,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이다”, 

우리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마귀적이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인간적이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적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신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일반 불신자와는 다른 삶, 일반 불신자들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비범하고 탁월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2.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까?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모든 행동을 예수님처럼 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을 닮기를 원합니다. 

왜 성도들은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는 햇빛을 주시지 않고, 선인에게만 햇빛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햇빛을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춰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비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와 사랑은 성도와 불신자 모두에게, 즉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원수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습니다. 왜요? 자녀는 부모를 닮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원수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증명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특징입니다. 


3. 원수 사랑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여러분, 원수 사랑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물론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의 수준은 이웃 사랑의 수준이지 원수 사랑의 수준이 아닙니다. 원수 사랑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체험할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체험할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의 원수 된 죄인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기와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을 불신자와 동일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까지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원수 된 나를 대신해서 죽어 주신 것은 엄청난 원수 사랑입니다. 원수인 나를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희생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놀라운 원수 사랑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원수 사랑, 예수님의 특별한 원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체험과 확신만이 원수 사랑을 가능하게 합니다. 

로마의 역사가 ‘디오니시스’의 기록에 의하면 4세기 초반에 로마에 무서운 역병이 돌았다고 합니다. 그때 로마 인구의 1/4이 죽었습니다. 얼마나 끔찍합니까? 우리 제천시의 인구가 14만 명입니다. 그중의 1/4은 3만 5천명입니다. 우리 제천에서 35,000명이 역병으로 죽는다면..., 이 무서운 병이 돌았을 때 로마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성을 완전히 잃었다고 합니다. 공포 가운데 도덕성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자기 가족이라 할지라도 누가 이 병에 걸린 것 같기만 해도 냉정하게 그를 집 밖으로 떠밀어 내버렸습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돌보지 않고 집 밖으로 내어 던졌다는 것입니다. 이성과 도덕성이 완전히 붕괴된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길에 버려져 죽어 가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자기 자신들의 집으로 안고 갔습니다. 간호하고, 먹여주고, 그들과 함께 아파해 주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사람들, 이들이 당시의 로마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원수같은 사람들이 병들어 죽어가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간호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병에 옮아 죽었습니다. 이 놀라운 모습을 지켜보았던 로마 시민들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자기들의 상상을 초월한 사랑과 은혜를 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러분, 로마는 칼로 나사렛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백성의 사랑의 모습, 자기 희생의 모습,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에게 없는 놀라운 사랑을 보고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그 일들 이후에, 기독교가 공인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적인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좌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좌절만 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예수님은 이런 명령을 하신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불신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에게 하신 명령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회개하라’, 

그러나 회개한 성도들에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것이 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신다면 이것을 못 지키는 우리가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신 예수님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태어난 지 1개월 된 아이에게 뛰라고 말한다면, 뛰지 못하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부모가 잘못된 것이죠?. 그러나 열 살 된 아이에게 부모가 뛰라는 것은 그 아이가 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놀랍게 변화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할 목표입니다. 지금 당장은 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입니다. 우리의 순종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겨서 도달해야 할 영광스러운 지점입니다. 

제가 작년 여름에 휴가를 갔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통영에서 ‘통영-대전’ 간 고속도로를 탔습니다. 톨게이트를 지나서 약 5km쯤 갔을 때였습니다. 갑자가 핸들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차가 그대로 고속도로 중앙분리대 쪽으로 갔습니다.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더니 이번에는 방향이 확 바뀌어서 반대편 가드레일을 들이받았습니다. 저는 가드레일 쪽으로 차가 달려갈 때, 그 가드레일을 뚫고 차가 날아가며 추락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드레일을 한 5m 쯤 밀고 나가서 차가 빙글 한 바퀴를 돌면서 다시 중앙분리대를 뒤로 받고, 고속도로 정 중앙에 가로질러서 멈추었습니다. 그때 뒤따라오는 차들이 보이는데, 큰 대형 화물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브레이크를 밟으며 속도를 죽이고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자동차의 앞 타이어가 찢어져 걸레가 되어 있었고, 차는 폐차할 정도로 부서졌습니다. 다행히 저희 가족들은 큰 부상 없이 멀쩡했습니다. 

저는 87년도 면허소지자로, 91년도부터 교회 승합차를 몰면서, 운전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했었습니다. 목회를 못하게 되면 운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차를 운전할 때 속도를 많이 줄였습니다. 

그런데 두고두고 생각이 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깨달은 것은 ‘그 정도의 사고 가운데서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구나,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나와 내 가족을 잡아 주셨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손길을 이 시간도 느낍니다. 주변의 환경을 보며, 내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며,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가슴 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내 심장을 만져주시고, 오늘도 뛰게 하시니까, 그의 선물이요 은혜로 인하여 내 심장이 지금도 뛰고 있구나.’ 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매 순간 깨닫는 다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한 삶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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