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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두부와 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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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나 파프리카를 장바구니에 담을 때의 기분은 참치 통조림이나 라면을 담을 때와는 좀 다르다. 어쩐지 좀 산뜻하고 부지런해지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마트에 갈 때마다 여러 채소를 종류별로 담곤 한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채소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 채소를 살 때 그 기분을 좋아하는 것이다. 장바구니 안에는 채소, 두부, 달걀 등 접근성과 신선도가 좋은 식재료들이 어떤 명분을 가지고 올라탄다. 그 결과 지금 우리 집 냉동실 안에는 두부 네 팩이 들어 있다. 한들한들하던 채소 몇 가지는 이미 버려진 지 오래고, 그나마 두부를 유통기한 지나기 전에 얼린 게 긴급 처방이었다. 언젠가 언두부의 효능에 대해 들었던 걸 떠올리며, 마치 처음부터 이랬어야 한다는 양, 냉동실로 밀어넣었던 것이다. 그래도 네 팩이나 되는 건 좀 낯설었다.

식재료가 냉동실 안에서 화석이 되는, 이런 일은 대부분 냉동실 안의 시간이 정지해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벌어진다. 문을 열고 무언가를 넣기만 하면 그것으로 ‘일시정지’ 상태가 되어 다시 그것을 꺼낼 때까지는 멈춰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방치는 그런 착각에서 시작된다. 그러다 보면 두부가 벽돌처럼 하나, 둘, 그 안에서 탑을 쌓게 되고, 그러다 무슨 중생대 암모나이트처럼 발견되는 것이다.

벽돌을 격파하는 기분으로 언두부를 썰기 시작했는데, 벽돌 격파에 비할 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반복해 언두부를 썰다 보니 나름 산뜻한 기분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신선한 채소와 두부를 바로 먹을 때에 비할 건 아니지만, 유통기한을 이미 넘긴 일들이 더 어렵고 괴롭게 느껴지는 게 일종의 과대포장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미뤄둔 일들, ‘일시정지’ 상태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니라 ‘서서히 부패하면서’ 나를 기다리는 그런 일들이 막상 달려들면 생각만큼 부담스럽거나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막상 달려들어 포장을 풀고 또 풀면, 처음 그 상태는 아니더라도, 영 못할 일은 아닌.

글=윤고은(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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