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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최일도 <10> 죽기 위해 찾은 섬에서 유서처럼 쓴 戀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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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옥소’라는 낡은 배를 타고 4시간30분 거리에 있는 섬 가사도로 향했다. 스물넷의 생을 마감하기 전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선실에 막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아는 체를 했다. 전에 서울 오류동 동산교회와 자매결연을 한 가사도교회를 하기봉사대와 함께 찾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장이던 분이 나를 알아본 것이다. 그분은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왔음을 알렸고, 목회자 없는 예배당에서 설교해주길 부탁했다.

얼떨결에 강단 위에 섰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전했던 것 같다. 주민들은 크게 감동을 받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뜻하지 않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주민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했다. 하지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진 않았다.

이튿날부터는 계획대로 슬픈 내 사랑을 담은 연작시를 쓰기 시작했다.

“진실로 사랑한 그녀를 / 수녀원에 남도록 한다는 것은 / 내겐 피 흘리는 제사요 산 순교나 다름없는 일 / 그러하기에 이제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소.”(피흘리는 제사)

한 달 가까이 백 편 넘는 시를 짓고 명동 수녀원 본원으로 부쳤다. 그러나 단 한통도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녀원 원장은 내가 보낸 편지를 도착 즉시 불태웠다고 한다.

섬을 떠나기 전 사흘간 쓴 시는 한부씩 더 써서 교회 근처 소나무 아래 묻었다. 유서를 묻은 셈이다. 어머니 앞으로 용서를 비는 글도 몇 장 썼다. 일기장과 끝내 그녀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등을 모아 작은 가방에 넣었다. 배에서 뛰어내릴 때 나와 함께 잠길, 말하자면 부장품들이었다.

다음 날 목포로 향하는 배에 탔다. 얼마 가지 않아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늘이 시커먼 게 예사로운 날씨가 아니었다. 배가 어찌나 심하게 요동치는지 승객들은 나뒹굴었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두가 구토를 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았던 탓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런 중에 죽음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내가 스스로 해치지 않도록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데려가실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떴을 때 배는 목포항에 이미 정박 중이었다.

부둣가에 올라서자 이미 죽었던 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바닷바람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했다. 죽고 사는 것 어느 하나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벼랑에 선 나를 지팡이로 몰고 가는 듯한 그분의 손길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순간 출처를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다.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목포의 달동네에 있는 친구 준오 집을 찾아가 며칠간 머물면서 몸이 회복되자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다음 날 오전 충남 논산의 수녀원에 전화를 걸었다. 웬일인지 그녀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김연수 수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다고요.” 그러고는 “수녀원에 전화할 필요도 없어요. 건강한 몸과 맘으로 저를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름간 애를 태우며 기다렸다.

7월 중순이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내게 오겠다고 했다. 내가 가사도로 떠난 뒤 그녀는 하나님께 매달리며 매일 눈물로 간구했다고 했다. “일도씨를 위기에서 건져 주시면 그와 함께 살라는 주님의 뜻으로 알고 아무 조건 없이 따르겠습니다”라고 말이다. 종신허원을 풀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고 수속 중이라고도 했다. 마침내 그녀는 검은 수도복을 하얀 원피스로 갈아입고 내게로 왔다.

정리=이사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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