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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짓의 사람들과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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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과 악
(에베소서 4장 25-32절)


2014년 4월 27일 주일예배
이선근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선임연구원)


지난 열이틀 간 많이 아프셨죠? 앞으로도 한동안 이 통증은 가시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아마 흉터로 남아 앞으로도 계속 반복적으로 이 고통이 재생되겠지요. 참으로 가슴이 깨질듯 아픕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만약 여러분들도 모두 저와 같은 마음이라면 말씀 나눔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잠시 침묵의 기도를 함께 드려보면 어떨까요? 이제 우리의 기도는 안타깝게 죽은 사람들과 그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슬픔을 그대로 함께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한 기도이길 바랍니다.


* 침묵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
주님, 저희에게 지혜를 주소서.
주님, 저희에게 용기를 주소서.


오늘은 세월호 참사 열이틀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도대체 이 고통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는 오늘 나눌 말씀의 제목을 거짓의 사람들과 악이라고 정했습니다. 가장 적절하게 지금을 표현한 단어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지시하여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말은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모건 스캇 펙 박사의 1983년 저작, <People of the Lie> 라는 책의 한국어 번역판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스캇 펙 박사는 이 책에서 ‘자신을 속이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집단의 이름으로 악을 자행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정신과 의사로서 자신의 경험 속에서 재구성해내고 그들의 거짓과 그 거짓을 이루는 집단을 통틀어 악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렇게 그는 악의 실체를 드러내려합니다. 500쪽이 넘는 이 책을 꿰뚫고 있는 스캇 펙 박사의 주장은, ‘거짓과 악은 분명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번 세월호 참사 또한 바로 그러한 거짓과 그 거짓을 이루는 집단, 곧 거짓의 사람들로부터 일어났고, 지금도 여전히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바다 안에 갇혀있다고 생각합니다. 펙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는 악의 결과입니다.


선박회사는 낡고 위험한 배를 값싸게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더 많은 승객과 화물을 싣기 위해 개조하여 더욱 위험한 불법 운행을 했습니다. 이 여객선의 운항을 관리하는 기구들 역시 방만한 운영을 했습니다. 사고에 직면하여 선장과 승무원들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승객들을 먼저 구해야 하는 책임을 버리고, 자신들의 구조에만 급급했습니다. 사고가 알려지는 과정과 구조의 과정에서 해경과 해양수산부, 그리고 안전행정부 역시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각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중앙정부는 가용한 모든 장비와 인력을 동원하여 실종자를 구할 가능성을 찾기보다는, 왜 못 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는데 더 열심이었습니다. 노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감과 반성 없는 그녀의 태도는 오히려 피해자 가족들은 물론 국민들을 더욱 납득할 수 없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 사이 시간은 무수히 흘렀고 실종자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희망이 사라진 빈 공간에는 슬픔이 대신 채워졌고, 이제 우리는 모두 화가 나있는 상태입니다. 사건의 정황이 더욱 분명해 질수록 통곡의 울음소리는 노여운 고함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세월호 참사의 열이틀 간을 보내며 거짓의 사람들을 느낍니다. 그들은 ‘자신을 속이고’, ‘책임을 전가’했으며, 이제는 ‘희생양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캇 펙 박사의 말을 빌려 그들을 거짓의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은 이 사고에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이 책임이 있다고 밝히기도 여간 쉽지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먼저 찾아낸 희생양들에게로 사람들은 책임을 돌리려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만큼은 좀 더 자세히 이 사건을 바라보기를 제안합니다. 그 전에 스캇 펙 박사가 설명하는 바커 기동 타격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바커 기동 타격대는 1968년 베트남 남부 쾅가이 지역의 밀라이라고 알려진 몇몇 작은 마을에서 양민을 학살했던 부대의 이름입니다. 그들은 무장하지 않은 비전투 요원인 노인과 여성과 아이들 600여 명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당하고 있었는데 단 한 사람도 이 집단적인 악에 대항하여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명령에 따르는 군인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 중에, 그것도 개인들로 보면 대부분 조금도 악하지 않은 사람들이, 밀라이 대학살과 같은 그런 끔찍스런 악의 행위를 보고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을까요?


실제로 방아쇠를 당겨 살인을 저지른 병사는 20명 정도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펙 박사는 이 사건은 전적으로 미국이라고 하는 집단 전체가 자행한 살인 행위라고 규정합니다. 물론 600명의 양민을 학살한 미국은 세계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 속에 여전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단 한 명의 하급 장교를 처벌한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현역, 퇴역 미-군인은 베트남에서 비전투요원을 가리지 않고 노란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던 이 전쟁에 참전한 것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펙 박사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다양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전문화’를 특별히 지적합니다. 전문화는 현대 사회를 눈부시게 발전시킨 원동력이기도합니다. 그러나 전문화는 우리들의 양심을 희미하게 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합니다. 네이팜탄을 예로 들어본다면, 베트남 전쟁에 사용된 네이팜탄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폭력적인 무기였는데, 지금까지도 이 무기로 인해 앓고 있는 사람과 생태환경의 피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네이팜탄이라고 하는 악의 실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군수공장은 자신들은 오직 시키는 대로 부품을 만들기만 했다고 합니다. 미군은 보급된 장비를 명령에 따라 취합하고 사용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정부는 전쟁에 대한 책임이라면 더 논의를 할 수 있지만, 네이팜탄에 대한 책임 소재를 묻는다면 대상을 잘못 정했다고 합니다. 바커 기동 타격대와 마찬가지로 책임의 소재를 찾기가 쉽지가 않은 것은 바로 ‘전문화’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군수공장, 미군, 정부는 각각 전문화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전문화’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양심과 책임이 매우 희미해지고 따라서 악은 보다 쉽게 세계 안에서 형상화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펙 박사는 이와 같은 악의 실체가 미국 국민들 전체의 책임이라는 주장을 이어갑니다. 바커 기동 타격대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나머지 480명은 살인을 자행하는 동료들을 방관합니다. 혹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 뿐 그들의 살인행위를 동조한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화된 집단이고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군인의 신분이 아니면 미국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위치라 하더라도 그들은 무엇이 양심에 따르는 것인지 압니다. 전쟁이라고 하는 매우 복잡한 악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 살육의 현장에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그들 또한 거짓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지 않은 중산층 이상의 미국인들도 살인을 자행하는 미군을 방관합니다. 혹은 방아쇠를 직접 당기지 않았을 뿐 그들의 살인행위에 동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커 기동 타격대의 양민 학살은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전체의 문제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선장과 선원 및 선박업체에게로 그 분노의 화살을 돌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을 분명히 판단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된 데에는 우리들의 몫 또한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펙 박사를 통한 제 해석입니다. 우리는 값싼 운임을 선호 했고, 복잡한 안전절차를 불편해 했습니다. 행정기관들을 감독하지 못했고, 그들의 무능함을 다른 이들을 보듯 했습니다. 마치 TV 드라마를 보듯 기자들이 전하는 연출된 소식만을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세상의 고통을 유체이탈 하여 제 3자인 듯 나의 문제로 보지 못해왔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의 고통이었지 나의 고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금 희생양이 될 수 있는 누구 한 사람의 처벌보다 시급한 것은 나의 ‘양심-없음’을 반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펙 박사는 이와 같은 악을 이기는 방법으로 사랑을 요청합니다. 사랑은 악을 가슴으로 안는 것입니다. 마치 날아오는 화살을 가슴으로 받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악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집단의 악을 극복하기위해 바커 기동 타격대가 저항했어야 할 태도로 사랑의 관점에서 ‘품위’를 설명합니다. 편안할 때 품위 있는 행위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때는 거짓으로 품위를 지킬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그의 품위 없음이 드러나겠지요. 그러나 삶의 하강기에서도 품위를 지키는 것은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품위는 인간의 위대함을 재는 최선의 척도로서 고난에 대항하는 역량입니다.’ 바커 기동 타격대의 단 한 사람만이라도 노란 사람을 사랑하여 그 순간 품위를 지켰다면 불의한 명령 혹은 악한 행위 앞에 저항했을 것이고 600명의 양민을 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거짓이 아닌 ‘품위’가 있었다면 417명모두가 즐겁게 여행을 했을 것입니다. 혹은 사고 앞에서도 이렇게 무참하게 많은 생명이 숨 막히는 차가운 바다에 잠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신학교의 명예교수인 과정신학자 마조리 휴잇 수하키 박사는 1994년의 저작인 <The Fall to Violence: Original Sin in relational Theology>에서 피조세계에 대한 죄는 곧 하느님에 대한 죄라고 정의합니다. 이어서 그녀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세계의 악에 대항하여 세계 안에 ‘참여’하는 것에서 발견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계의 악에 대항하여 참여하는 것, 그것은 종국에 우리를 전체 우주와 연결시키고,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한 부분이며, 전체가 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서’를 통해 악을 끊임없이 끌어안고 정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당히 위험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용기를 내어 꼭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퀘이커 영성가 파커 파머는 2011년의 저작인 <비통한자들을 위한 정치학: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에서 내적인 현실과 외적인 현실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우리 자신은 물론 세상을 함께 창조할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상을 아름답게 변혁할 수 있는 내적 신앙의 힘을 다시 외적인 세계에로까지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세계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로인한 창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열이틀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아프게 하며 마음을 부서뜨릴 것입니다. 그러나 파머에 의하면 우리는 마음이 부서지는 두 가지 방식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마음이 잘게 부서져 흩어져버리는 전형적인 이미지입니다. 이러한 형태는 폭력의 씨앗을 뿌리고 타인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식으로도 부서질 수 있는데, 그것은 마음이 부드러울 때 우리 자신과 세상의 고통을 끌어안는 더 큰 능력으로 ‘깨져 열릴’ 수 있는 형태입니다. 이런 식으로 부서진 마음은 치유의 근원이 되어 고통받는 타자와의 공감을 심화하고 그들에게 이르는 능력을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수하키 박사가 말한, 세계의 악에 대항하여 참여하는 것, 또 파머가 말한 창조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태로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단단한 부분이 깨지고 열린다면 타자의 고통이 내게 그대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된다면 문제의 해결 방식은 전혀 다르게 이어질 것입니다. 사라진 희망을 대신하는 우리들의 분노는 폭력을 위해 쓰여지지 않고 참여를 위해 쓰여질 것입니다.


제 지인 중에는 이번 사건을 겪은 후, 물론 그들은 지난 대선 때부터 줄곧 같은 말을 해왔습니다만, 이번에야 말로 거의 단정적으로 자신은 이제부터 대한민국 국민이기를 거부하겠다고 하더군요. 이런 나라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정부에 한스럽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울부짖는 피해자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곳에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이 악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 고통이 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거짓의 사람들을 대면하여 우리는 품위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매우 위험하겠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깨져 열리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창조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결될까 싶은 의심이 들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악은 거짓의 사람들과 더불어 더욱 커지고 지독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저는 이 이야기들을 마치기 위해 한 영화의 두 장면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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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롭 라이너 감독의 <플립 (Flipped, 2010)> 이라는 영화 포스터 입니다. 이 한 장의 사진에는 오늘 제가 결론으로 전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이 영화는 1960년대 초반의 미국을 배경으로 소녀와 소년의 깨달음과 성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가난하지만 맑고 밝은 소녀 줄리 베이커는 앞집에 이사 온 단정하고 깨끗한 소년 브라이스 로스키를 보고 그와 친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브라이스 로스키는 줄리 베이커를 요샛말로 넘사벽 소녀로만 생각하고 그와 친구하기를 꺼려합니다. 게다가 브라이스의 아버지 스티븐 로스키는 줄리의 아빠인 리차드 베이커를 매우 무시합니다. 그의 집 앞 마당이 엉망으로 지저분한데도 그림이나 그리는 리차드를 게으르고 무능하며 생각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티븐 로스키는 베이커 가족을 이웃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저도 리차드 베이커가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이 장면에서 깜짝 놀랐어요. 리차드 베이커는 정돈되지 않은 어수선한 뒤뜰에서 그림을 그리며 딸 줄리와 대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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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베이커 : 항상 전체 풍경을 봐야한단다
줄리 베이커 : 무슨 말씀이세요?
리차드 베이커 : 그림은 단지 부분들이 합쳐진 게 아니란다. 소는 그냥 소이고, 초원은 그냥 풀과 꽃이고, 나무들을 가로지르는 태양은 그냥 한줌의 빛이지만 그걸 모두 한 번에 같이 모은다면, 마법이 벌어진단다.


Richard Baker : You have to look at the whole landscape.
Juli Baker : What does that mean?
Richard Baker : A painting is more than the sum of it's parts. A cow by itself is just A cow. A meadow by itself is just grass, flowers. And the sun picking through the trees, is just a beam of light. But you put them all together and it can be magic.


줄리는 아빠와의 이 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방금 포스터에서 봤던 무화과나무에 걸린 연을 찾기 위해 높이 가지 위로 올라가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곤 아빠가 말했던 마법이 일어나는 전체의 풍경을 보게 됩니다.


줄리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다양한 부분들이 어떻게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지 깨닫게 됩니다. 소와 초원의 풀과 꽃 그리고 나무들을 가로지르는 태양의 빛은 이제 더 이상 부분들로서 서로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전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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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들의 삶 속에서 부분의 합이 전체를 이루는 마법이란 어떤 것일까요? 계속해서 줄리 베이커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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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베이커에게는 정신지체인 삼촌 다니엘 베이커가 있습니다. 하지만 줄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립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줄리는 삼촌 다니엘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어느 휴일 아침 줄리는 혼자 삼촌에게 가려는 아빠에게 간청하여 삼촌이 있는 병원으로 함께 갑니다. 다니엘은 줄리를 반가워했고 세 사람은 행복한 휴일을 보내고 있었죠. 그러다가 실수로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린 다니엘이 아이스크림에 집착하며 소리를 지르고 테이블을 엎는 모습을 보고 줄리는 많이 놀라게 됩니다. 물론 새 아이스크림을 받은 다니엘은 다시 진정됐고 세 사람은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다시 즐겁게 시간을 보냅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빠는 어린시절 다니엘과 함께 살았던 이야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니엘을 잘 돌보라고 부탁했던 유언, 처음엔 괜찮을 줄 알았던 엄마가 다니엘과 같이 사는 것이 힘들어 진 이야기들을 해줍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 줄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줄리 베이커 :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 모든 건 똑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늘 이전엔, 삼촌 다니엘은 그냥 하나의 이름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분은 내 가족의 일부이다.


Juli Baker : (On the ride home, my dad told me that Uncle Daniel used to live with him and Mom before we were born. But after a while, it became too difficult.) When we got home, everything looked the same. But it wasn't. Before today, Daniel had always been just a name to me. Now he was part of the family.


줄리에게 있어서 삼촌 다니엘이란 병든, 그래서 가족들과 분리되어 있는, 결국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그저 이름뿐인 존재였습니다. 사실 줄리는 삼촌을 자신의 가족으로 여길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줄리가 용기를 내었을 때 다니엘과 줄리는 이어지고 가족이라는 전체의 한 부분이 됩니다. 줄리는 다니엘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무화과나무 위에서 봤던 아름다운 세상과 동일한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 관계의 놀라운 마법은 그들의 이웃들에게 아름아름 번지게 됩니다.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그냥 하나의 사건에게 주어지는 감정 없는 이름이 아닙니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의 아픔이며 우리의 잘못입니다. 만약 이 고통을 비관하기만 하고 한 두 사람의 처벌로 그냥 지나쳐버린다면 악의 원인이고 결과인 ‘거짓의 사람들’과 우리는 결코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토록 비판하던 그 거짓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누구 한 사람, 그가 뚜렷한 악의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모든 잘못을 돌리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폭력의 분노일 뿐입니다. 예수따르미라고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악을 대면하여 정면에서 맞서야 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의 사람들을, 그 악함 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자비’와 ‘용서’와 ‘지혜’와 ‘용기’를 말입니다.


이 고통의 시간들을 충분히 공감하고 계시는 거라면 이제는 참여해야 할 때라고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여객선 사고였다고 해서 이곳에만 거짓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병원의 시스템이 그렇고, 얼마 전에는 기차의 운영방침이 그랬습니다. 원전의 송전탑이나 공장의 노동자들도 있었습니다. 섬의 바닷가 마을도 있고요. 곳곳에 거짓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를 포함하여 그들을 빛에 드러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부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종교의 언어로는 ‘소명’이라고 하지요. 제게 가족과 다름없는 새길의 자매 형제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이제 우리, 눈물을 닦고 하느님의 선한 창조를 위해 위험하고 두렵지만, 이 세계에 참여합시다. 세계는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이야기를 마치기 위해 에베소의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읽었던 편지글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봅니다.


거짓을 버리고,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다. 우리는 서로 부분이지만 한 지체, 전체로서의 하나입니다.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세요. 폭력을 부르는 분노는 악마에게 틈을 주는 것입니다.


거짓의 사람들이여 스스로의 악함을 돌이키십시오. 당신도 자신이 도둑질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이제 다시는 도둑질 하지 말고, 수고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오히려 당신은 궁핍한 사람들을 우리보다 더 많이 도울 수 있습니다.


자매 형제 선생님들이여, 우리 거룩한 품위를 지킵시다. 사랑함으로 인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에 노력합시다. 용기 내어 거짓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악에 저항합시다.


이제부터는 우리 하느님을 더 이상 슬프게 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립시다.


세상과 함께 더불어 가깝게 지내며, 세계의 모든 감정들을 함께 느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용서합시다.


우리 하느님의 선한 창조를 위해 참여합시다. 세계는 우리를 필요로 합니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이 깨져 열리게 하소서.
세상의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에 맞서기 위해
세상 안으로 용기 내어 참여하게 하소서.
세상은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가슴으로 세상의 악을 품어 악을 극복하게 하소서.
다만 우리의 영혼이 거짓의 사람들이 되지 않게만 붙드소서.


거짓의 사람들의 악 앞에서 품위 있게 저항하셨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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