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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됨을 위하여 (요 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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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을 위하여 (요 17:20-26)


‘비참하게 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 생각하라. 당신에 관해 이야기를 하라. 「나」라는 단어를 가능한 자주 사용하라. 상대방의 의견 속에 당신 자신을 계속 반영하라. 당신에 관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놓치지 말고 들어라. 인정받기를 기대하라. 의심을 품어라. 시기와 질투를 하라. 경멸하라. 당신을 비판하며 용서하지 말라. 아무도 믿지 말고 자신만 믿어라. 배려와 존경받기를 주장하라. 모든 일에 대해 당신 의견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라. 만일 당신이 보여준 친절에 감사하지 않거든 화를 내라. 당신이 베풀어준 봉사를 결코 잊지 말라. 가능한 한 당신의 의무를 회피하라. 남을 위한 일을 가능한 한 적게 하라.』

여러분은 이 내용에 공감하십니까?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비참한 길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는 관심을 끄는 초점의 대상이 되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시는 「지존하시고 무상하신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강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위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 다음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하면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제자들이 하나되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다투고 싸웠습니다.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받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제자들은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오직 세상의 욕심에만 사로잡혀서 서로 다투고 싸운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 되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기도를 하시면서 이것은 제자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제자들의 말을 듣고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나될 수 있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믿음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윌리엄 힌슨이라는 사람은 언젠가 동물 조련사가 사자의 동굴에 들어갈 때에 왜 의자를 들고 들어가는지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조련사는 회초리와 권총을 갖고 있는데도 의자의 네 다리를 사자를 향하여 들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자로 하여금 의자 네 다리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도록 하면서 일종의 무기력증에 사로잡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집중력이 분산된 사자는 온순하고 유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삶이 그러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면 무기력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세상에는 초점을 맞출 만한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면 초점을 상실합니다. 세상에서의 다초점은 잘못하면 무초점이 됩니다.
우리가 맞추어야 할 초점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 하나의 초점은 우리의 삶을 집중하게 만듭니다. 무기력하지 않게 합니다. 이 하나의 초점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여기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믿음 안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요 또한 우리 모두는 하나 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마음으로 같은 믿음을 품어 주를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이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이나 매우 중요합니다. 얼마나 이 일이 소중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하나님께 돌아가시기 전에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겠습니까? 얼마나 주님이 이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면 가장 소중한 시간에 이런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더더군다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주님을 옭아매려고 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실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이 계실 때에도 내가 잘 났냐 네가 잘 났냐 내가 높으냐 네가 높으냐 하며 다투고 있는 제자들인데 그들에게 배우며 그 뒤를 따라야 될 믿는 무리들은 오직 하겠습니까? 처음 주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며 놀라운 가르침을 줄 때 만해도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까? 병자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만해도 너무너무 많은 사람들이 주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병 고치는 주님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이 칼을 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로 인해서 자기들의 인기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판에 무엇 하나라도 틈만 보이면 얽어매려고 하는 판에 안식일을 범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래 사람들의 마음이란 그래요. 처음에는 신이 나서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에 대해 종교 지도층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다 싶으니까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를 모르는 주님이 아닙니다. 그런 변화되는 모습을 너무너무 생생하게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저들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 하나가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먼저 저들이 하나가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원래는 멸망의 자녀였던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얼마나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까? 그런 우리가 하나가 되어 나갈 때 하나가 되어 기도할 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요 우리 역시 하나 된 믿음 안에서 더욱 더 영화롭게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풍파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주님이 보기를 원하시는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결정하고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모임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친목단체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이 친목단체들의 모임은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모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중심이 되어 모이는 모임이며 그 사람들 중에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그 모임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좋으면 가고 싫으면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람의 뜻에 의하여 모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의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우리는 주님을 중심으로 모여서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때 그 모임이 온전해 집니다.
제자들도 다투고 싸웠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앞서고 주님이 중심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들이 다투고 싸우는 동안에는 결코 하나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의 중심에 서 계실 때에 그들은 주 안에서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지 아니하고 사람이 중심이 되면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중심이 되면 혹 내 뜻에 맞지 않아도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영원하고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 되어 주님을 따라가는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소원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의 모든 생각 내 입장 내 감정에서 떠나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사랑으로 하나 됨입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한 장면입니다. 이념과 체제의 분단 상징인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어 남북의 경비병들이 만납니다. 만남과 사귐이 깊어가면서 그들은 오랜 세월 무의식 속에 남아 있던 증오와 갈등의 벽을 허물고, 마침내 함께 기념촬영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육군 일병이 들여다보는 카메라의 뷰파인더에는 끊임없이 남한정부의 대통령과 북측 수령의 얼굴이 동시 입장합니다. 서로 다른 체제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이 의식저변을 지배하고 있는 국군 일병은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하고 이리저리 각도를 돌려 봅니다.

드디어 국군 일병은 문제가 카메라의 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의 부조화에 있었음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요청합니다.
“좀더 가까이 붙어 봐요!”
이미 친구가 된 그들은 국군 일병의 엄한 요구에 순응하였고, 그들이 서로 밀착하자 어느새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벽에 걸린 사진은 사라지고, 남북의 사람들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주님의 몸을 함께 나누는 사건을 경험한 우리에게 아직도 ‘분열’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념이 달라서 갈라진 남북, 피부색갈이 달라서 차별 받는 외국인 노동자, 종교가 다르다고 전쟁도 불사하는 세계 등 갖은 이유를 대며 분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주님의 창조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의 몸을 우리에게 주시기 전, 갈라진 이 세상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라며 하나님께 간청하십니다. 주님의 몸을 나누어가진 우리는 이제 서로 밀착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의 빈틈을 주님의 몸으로 메워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껏 우리를 갈라왔던 장벽은 사라지고, 하나 된 사람들의 웃음 사이로 천국이 보일 것입니다.

혼자만 있다고 하는 것처럼 외로운 것은 없습니다. 부부가 함께 살다가 둘 중의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받는 스트레스는 정말로 감당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무엇을 잃어버린 상실감 그 박탈감만큼 우리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현대의 모습을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합니다. 막상 집을 떠나도 갈 만한 곳이 없습니다. 뭐 마땅히 할 만한 일도 없습니다. 요즈음 명예 퇴직의 바람이 거세게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회로부터 회사로부터 가정으로부터 내가 버림받게 되지는 않을까 하여 전전긍긍합니다. 특히나 사랑을 잃어버린 세대가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입니다. 직업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그만 죽게 된다고 하실 때 제자들의 충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얼마 전 어느 가수가 죽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뒤를 이어 자살하던 십대들이 줄을 이었더랬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하던 대상을 잃었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애써 자위를 해 봅니다 마는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서 자살하는 아이들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만 그런가 하면 또 연세 드신 노인들의 자살도 점차 늘어가는 추세라고 합니다. 왜 한창 꿈많은 청소년들이, 또 한편으로는 한평생 그 험한 풍상을 다 헤치고 살아온 노인들께서 세상을 스스로 저버리게 되고 마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을 보면은 더 이상 나는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백약보다 더 귀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혼자 버려진 것 같으나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도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어 그랬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질 때 그래서 서로를 사랑의 눈으로 보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를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뭐라고 말합니까? 정말로 니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천만의 말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면 왜 니가 지금 그 모양 그 꼴이냐? 하나님이 정말로 너를 사랑하신다면 모든 것이 다 풍성해야 하고 하는 일마다 잘돼야 되고 뭐도 있어야 되고 뭣도 해야 되고 그런데 그렇지 못하지 않아. 그게 뭘 말하는 건지 알아? 바로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이게 사탄의 말입니다. 

그 말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속아 넘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이럴 수는 없지 그리고는 스스로 절망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비결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가 되어 서로 돌보아 주고 감싸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붙들어주고 끌어 주고 밀어 주고 손을 맞잡고 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놀라우신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의 비결은 바로 같이 있어 주는 것입니다. 같이 있어 주되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해 주고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해 주고 괴로워할 때 그 괴로움을 함께 나누어주며 외로워 할 때 벗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 됨의 비결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초점을 하나로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점을 맞추는데 있어서도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같은 초점이라도 부정적인 초점이 있고 긍정적인 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맞추어야 할 초점은 예수님의 눈으로 보는 초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초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사람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그 사람 자체보다는 그 사람의 하는 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보다 큰 관심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될 때 흔히 등을 돌리기 쉽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평할 때 그 사람이 마음에 든다 안 든다고 하는 기중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이 어떤 가문의 사람인지, 그 사람의 출신은 어디인지, 그 사람이 얼마나 배웠는지 아니면 무엇을 갖추고 있는 사람인지 그 사람의 하는 일은 무엇인지, 그 사람의 지위는 어떤지 등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 사람을 귀하게도 여기고 천하게도 여깁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점은 오직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그 영혼 하나를 귀하게 보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죄 가운데 헤매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나를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죄인 되었을 때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를 졌다. 내가 너를 위해 네 대신 죽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네가 무엇을 하건 네가 무엇을 가졌건 상관없이 믿음 안에 있는 너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과거 우리를 사랑하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죄인 중의 괴수도 불러서 하나님의 일꾼을 삼으시는 주님입니다. 더럽고 추한 자를 씻기시고 용서하시고 못나고 아파하는 자를 고쳐주시고 능력을 더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와 권세로 함께 하셔서 귀하게 쓰임받는 그릇이 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시각에 초점을 맞추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못나고 아무 것도 없어도 오히려 추하고 더러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시각에 초점을 맞추는 삶은 내 입장에서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주고 내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아파하는 사람이 아픔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그렇게 감싸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병든 자와 약한 자를 다 고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것은 나만큼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로부터 무시를 당한다 싶으면 기분이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도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보잘 것 없어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주님은 보잘 것 없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사랑하는 내가 그렇다면 어찌 보잘 것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보배 주님의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자기를 깨끗케 해야 합니다. 자기를 깨끗케 한다고 하는 것은 비운다는 뜻입니다.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구했던 예수님처럼 그렇게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우면 모든 것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내 이웃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으며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우리가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버려질 존재입니다. 지옥불에 던져져 불살라질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찾아 주셨습니다. 내가 믿음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셨습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내 마음에 우리 마음에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존귀한 자요 그래서 우리가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내 목숨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주어야 하느냐 하면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게 손해가 되고 나쁜 것도 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다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입장에서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게 소중한 것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 상대방에게 소중한 것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그 소중함을 모르고 오히려 그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냉정하게 거절할 때도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이 있을 때 이윽고 열매를 맺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 중 대표적인 것이 믿음 즉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귀한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의 생명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또 하나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관심입니다. 

그런데 관심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관심과 긍정적인 관심입니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관심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관심이어야 합니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편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소년이 강아지를 사러 애완동물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주인은 강아지들을 보여주었고, 소년은 한 마리씩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어느 강아지를 골랐니?” 
“나중에 올께요” 
“빨리 와야 한다. 강아지들이 아주 잘 팔리거든” 
“걱정 없어요. 제가 고른 강아지는 그 때까지 있을거예요”
이 소년은 잡초를 뽑고, 유리창을 닦아 모은 돈을 가지고 다시 가게로 갔습니다.
“좋아, 갖고 싶었던 강아지를 가지고 가렴”
소년은 비쩍 마른 절름발이 강아지를 집었습니다. 

“얘야, 그건 가져가지 말아라. 불구잖니.” 
“아니에요. 제가 꼭 가지고 싶었던 강아지예요”
주인은 순간 입을 다물었습니다. 소년의 바지 밑으로 의족이 보였던 것입니다. 자신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안다는 것은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뭐 그까짓 거 가지고 그러냐고 하십니까? 그런데 그까짓 거 때문에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먼저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느냐를 보지 마시고 무엇을 가졌느냐를 보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냐를 보지 마시고 그냥 그 사람 자체를 소중하게 여겨주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갖추고 난 다음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혹 사는 선한 뜻으로 하였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그것을 불편하게 여긴다면 다른 말 할 것 없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족합니다. 

어쨌든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고 하는 점에서 뒤로 미루지 말고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네 마음이 불편했다니 미안하다고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맙다는 말 수고했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괜찮다는 말들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아파하는 사람 그 상처를 건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싫다는 것 억지로 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먼저는 그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마음을 얻지 못하면 닫힌 마음에는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치 혀가 무서운 것입니다. 혀만큼 부드러운 것도 없지만 혀만큼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다른 것은 보지 마십시오. 내 안에 계신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우리 안에 계신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 그 영혼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하나 ㅔ;됨을 통해서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누리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본 구주 지방에서 탄광의 석탄을 실어 나르는 차들을 연결하는 쇠사슬에서 못이 한 개 빠지는 바람에 탄광이 폭발하여 400여 명의 사람들이 안타깝게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꼬하마와 도쿄 사이에서도 기차 바퀴에 있는 못 한 개가 빠지는 바람에 기차가 삼중 충돌하여 200여 명의 사람들이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두 큰 사고는 모두 한 개의 못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작은 것을 경시하고 무시합니다. ‘요까짓 것쯤이야, 나 하나쯤이야’ 하면서 작은 하나를 대단치 않게 여깁니다. 의롭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다가도 ‘나 하나 바로 산다고 세상이 뭐 달라질까?’ 하며 자포자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으로 역사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지극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에 요셉이 머무는 곳에는 늘 복이 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한 사람의 믿음으로 그 가정이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과 민족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작은 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쓰십시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제 주님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이 주님과 같이 하늘나라에 있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를 믿는 것은 그리고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바로 하늘나라를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가신 그곳 주님이 계신 그곳에 우리도 함께 있기를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믿습니까? 왜 할 일 많은 세상에 그 많은 세상의 향락과 즐거움을 다 접어 두고 이렇듯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까? 그것은 하늘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나눌 사랑을 지금부터 나누기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계신 그곳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평안의 나라입니다. 영원한 안식의 나라입니다. 바로 그곳에 있기를 위해서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아갈 삶을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연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지 못하던 자가 하늘나라에 가서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한 자리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가 있겠습니까? 왜 주님이 우리들에게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까? 그곳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실족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에까지 영광의 모습으로 함께 사랑하며 함께 어깨동무하고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위해서 주님이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비로소 주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참 사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며 이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요 나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이 허락하시는 모든 것을 누리며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충성하며 사랑하며 헌신하며 나누며 봉사하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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