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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반드시 알아야 할 두 가지 지식 (요 1: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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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알아야 할 두 가지 지식 (요 1:19-28)           

<영원히 여성적인 것, 그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 말은 <괴테>의『파우스트』의 맨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기서 <여성적인 것>이란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의 꿈입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은 본능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남자 여자를 떠나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두고 시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런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꾸미고자 할 때입니다. 꾸며진 아름다움은 오히려 추합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데서 거짓이 시작되고, 억지로 아름답고자 할 때 악이 싹틉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이야기를 보면 미녀로 변신한 마녀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길 바라는 마음으로 백설공주를 없애고자 합니다. 바로 여기서 악이 싹틉니다. 

이것은 비단 이야기책의 내용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가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본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꾸미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들의 백합화가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옷은 인간이 꾸민 아름다움이요, 백합화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입니다. 

에덴동산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움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어떤 인위적인 가감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가 아름답건만, 하와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사탄에게 속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결과 그들은 아름다워 하나님처럼 된 게 아니라, 오히려 추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인생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고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갓난아이는 그저 방실방실 웃을 뿐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웃는 이들을 볼 때 그 웃음이 거짓 없는 웃음인지, 아니면 웃음 뒤에 비수를 숨긴 것은 아닌지 늘 의심해야 하는 고통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거짓으로 자신을 꾸미고, 그 거짓된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삽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사람들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나르시스>를 닮았습니다. 억지로 아름답게 꾸미거나,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점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이런 점에서 정확한 자기 발견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요?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존재로 이 세상에 있을 것이겠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은 이 주제에 대해 깊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요한이 요단강 근처 유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유대의 지체 높은 사람들도 있었고, 평소에 백성들을 억압하던 군인들과 지나친 세금으로 원성이 자자하던 세리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 앞에 오면 딴 사람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군인과 세리들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더 이상 강포를 행하지 말고,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받는 것으로 만족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의 더러운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 표시로 요한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했습니다. 

이처럼 요한의 명성이 사방으로 퍼지게 되자 사람들은 <요한이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가 오랫동안 기다린 메시아이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의심하는 마음으로 요한에게 몰려와 그가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요한의 정확한 자기 인식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표현한 대로 한다면 요한은 <자기 발견>에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은 요한이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네가 누구냐?>, 이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물으면 <나는 누구냐?>란 질문이 됩니다. 이 질문은 모두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요한은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요한은 <부정의 방식>으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세 번에 걸쳐 <아니다>란 대답을 했습니다. 20절을 보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고, 21절에서는 <네가 엘리야냐?>란 질문에 대해 <나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네가 그 선지자냐?>란 질문에 대해서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세 차례의 <아니다>란 부정의 대답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아니다>라는 부정형의 대답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일 철학자 <쉘러 M.Scheler, 1874-1928>는 인간의 가장 귀중한 정신적 의의를 부정성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인간만이 부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정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정신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지나치게 성적 경쟁을 시켰다고 생각됩니다. 그 때 한 학년에 6백 명씩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이 끝나면 6백 명 중에서 100명을 성적순으로 복도에 이름을 적어 붙이곤 했습니다. 

한 번은 시험을 쳤는데,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친구가 전교 1등을 한 것으로 붙어 있었습니다. '야, 교회에 새로 온 그 친구가 정말 공부를 잘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교회에서 학생들 수십 명이 앉아 놀고 있을 때, 제가 말했습니다. 
"내가 기쁜 소식을 하나 알려 줄게. 이번에 아무개가 우리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했어. 자, 우리 아무개에게 박수를 쳐 주자!" 

모두가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친구가 대단히 불편해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운성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난 1등이 아니야. 난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어!" 

저는 "아니, 분명한 사실을 왜 아니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1등한 아이는 나랑 이름이 같은 다른 아이야! 내가 아니라구!" 

잠시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저는 몹시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오히려 더 크게 박수를 했습니다. "아무개가 1등이 아니면 어때? 자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가 더 위대하다! 다음엔 정말 더 잘 해서 명단에 이름 올려라!" 이러면서 격려했습니다. 

여러분, 그 친구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별력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 후 그 친구는 교회에서 중심인물이 되었고,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우리 모두를 즐겁게 했습니다. 만약 그 친구가 그 때 부정하지 않았다면, 그 후로 내내 거짓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 전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전 저를 구원할 만한 능력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전 스스로 희망을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닙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대학을 나오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박사가 아님을 밝힙니다. 그 훌륭한 일을 자신이 한 것이 아님을 용기 있게 밝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란 말을 하지 못합니다. 칭찬을 들으면 그 칭찬이 자신에게 합당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침묵합니다. 그러다 보면 점차 사실은 왜곡되고, 사람들의 칭찬이 계속되면 자신이 정말 그런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자신은 죄인이 아니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의인인 것처럼 자기도취에 빠집니다. 누구의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기 의로 높은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왕 노릇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정말 그런 대단한 존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보잘것없는 실존에 대해 일찍이 톨스토이는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자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다급한 그는 우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사자가 우물을 들여다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가 매달린 나뭇가지를 두 마리의 쥐가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달콤한 냄새가 나서 둘러보니 근처에 벌들이 꿀을 모아둔 벌집이 있었습니다. 그는 꿀을 먹기 위해 그 곳에 혀를 들이밀었습니다. 

여러분, 위에도, 아래에도, 사방에 죽음이 널려 있는 위기 속에서도 꿀을 먹기 위해 혀를 내미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죽음을 안고 다니면서도 욕망에 취해 사는 게 사람입니다. 그는 그 위기를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넌 의인이냐?> <아닙니다!> 이 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한은 <아니다>라고 말한 후 이번에는 자신을 <긍정의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아멘. 

이 속에는 자신에 대한 요한의 두 가지 중요한 지식이 나옵니다. 하나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데 관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사명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그 사명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자신에 대해 말할 때 예수님과의 관계성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곧게 할 사명을 가진 자>임을 밝혔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다면 그 분의 길을 예비할 자도 필요 없었을 것이며, 그의 사명도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요한의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제가 저를 소개한다면 <저는 목사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 때 제가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목사>라는 정체성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 저는 <4남매의 아버지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때 제가 주님의 은총 아래 있을 때 사 남매의 아버지라는 복을 제대로 누릴 수 있고, 아버지 역할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으로 인해 의미와 가치를 가집니다.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 삶은 비로소 광채를 발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으로 인해 목적과 방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삶을 원한다면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나에 대한 지식>과 <주님께 대한 지식>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두 가지 지식입니다. 

일찍이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사실을 잘 밝히고 있습니다. 『기독교강요』제1권 제1장 제1절의 제목은 <자신에 대한 지식 없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입니다. 그 다음 절의 제목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 없이 자신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자신을 알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1542년 『제네바교회 신앙문답서』 제1문항에서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알라고 충고합니다. 호세아서 6장 3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선포하였습니다. 땅끝교회 교우 모두가 이 두 가지 지식을 가지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까?  우선 요한은 주님의 위대함을 알았습니다. 26-27절을 보세요.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을 아무리 대단한 사람으로 여긴다 해도 자신은 그 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또 그는 자신과 예수님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잘 알았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주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임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을 보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은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고 구원할 분임을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은 예수님이 심판자이심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을 보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배우길 원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깊이 생각하길 원합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아멘. 

또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지혜로 아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11장 25-27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주님을 깨닫고 알아가게 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 구원자, 인도자, 보호자이십니다. 그 분의 우리의 처지를 바라보기만 하지 않으시고, 뛰어 들어와 건지십니다. 

어떤 책에 보니 웅덩이에 빠진 사람에게 공자는 <그렇게 경고했건만 왜 빠졌느냐?>고 책망만하고, 석가모니는 <웅덩이에 빠져 있든, 그렇지 않든, 인생은 모두 허무한 것이니 그 안에서 견디다 보면 곧 끝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릅니다. 그 분은 웅덩이에 들어와 우리를 밀어내서 건져 주십니다. 또 주님은 우리를 위해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세우십니다. 우리를 통해 거룩한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삶에 목적과 의미를 주십니다. 이 주님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어도 행복해 합니다. 세상 지식에 대한 무지도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극복합니다. 
나 자신을 알고, 이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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