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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아~ 아~ 아우슈비츠~

  • 장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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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SCN0047.JPG (File Size: 657.3KB/Download: 4)

1940년 6월 14일 문을 연 아우슈비츠수용소는 유태인 대학살(Holocaust)의 상징이다.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심지어는 노르웨이와 그리스로부터 끌려온 유태인들이 이곳에서 죽어갔다. 희생자 중 90퍼센트는 유태인이었지만, 폴란드인과, 집시, 소련군 전쟁 포로들, 유고인, 동성 연애자들도 함께 희생되었다. 매일 수백 명이 이곳에서 죽었고, 심할 때는 하루 1,000명 이상이 죽은 때도 많았다. 대부분은 도착 즉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고, 첫 관문을 통과한 소수의 사람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강제 노역과 기아, 그리고 시도 때도 없는 처형으로 마치 파리목숨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1945년 소련군의 진주에 따라 해방되었을 때 이곳에서 살아남은 채 발견된 사람은 겨우 7,000명에 불과했다. 이상은 인터넷에서 퍼온 글입니다. 1933 년 처음으로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가 자신의 정권을 유지 강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그 당시 유럽에 만연하고 있던 반 유태주의를 이용하였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히틀러의 잔악한 행위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재조명되어 흥미를 끕니다. 첫째로는 히틀러의 그러한 행위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Oedupus complex)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어머니인 클라라에 대한 애착과 어머니를 학대해 온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성장과정에서 계속 잠재되어 있었는데, 어머니의 죽음을 전환점으로 하여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감정이 그 당시 어머니를 치료했던 유태인 의사에게로 전위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가 사춘기를 보낸 비인(Vienna)에서 였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예술적 재능이 있다고 확신하고서 소년 때부터 관료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위대한 화가가 될 것을 소망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1907년 미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비인으로 갔는데 입학시험 결과는 불합격이었습니다. 일년 후 그는 재 응시했지만 다시 또 실패하여 결국 화가에로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히틀러가 그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린 심사위원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일곱 사람 중에 네 사람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미술학교 교장에게 \나를 낙방시킨 유태인들은 보복을 받게 될 것\ 이라는 내용의 협박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화가가 되려는 소망을 좌절 시킨 장본인이 유태인이라고 간주해 버렸던 것입니다. 세째로는 히틀러가 비인에서 공부하며 생활하던 시절 특별한 수입이 없던 그는 하숙비를 낼 형편이 못되어 유태인 하숙집 주인에게 늘 심한 모욕을 당하며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것들로 인해 유태인에 대한 증오심은 날로 더 깊어만 갔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외에도 히틀러의 아버지가 유태계 사생아의 혈통이기 때문에 이를 부인하기위함이라는 등의 여러가지 얘기들이 있지만~ 아무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독일접경지대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비인에서의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그리 유복하지 못한 생활을 해야만 했고 성장과정에서 그 당시 전유럽지역에 퍼져 살며 경제적 사회적으로 유복한 생활을 하던 유태인으로부터  여러모로 \박해\를 받았다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독일로 건너가 유창한 \웅변술\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나치당을 설립하여 독일정가에 데뷔한 그가 독일의 정권을 장악한 후 제일 먼저한 것이 유복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일이고 자신에게 모진 시험을 안겨줬다고 믿고 있는 유태인들을 잔악하게 학살한 것입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이 없다지만~ 만일 히틀러가 지원했던 미술학교의 유태인심사관들이 그를 \합격\시켰다면 만일 히틀러의 자취방 주인인 유태인이 학비도 하숙비도 없이 쩔쩔매는 그를 관대히 보아 주었다면~ 아마도 정치가이기보다는 감성이 예민했던 히틀러는 좋은 그림으로 많은 이들에게 예술적인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400 여만명의 유태인이 죽어간 아우슈비츠의 현장을 돌아보고 여러가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부인하며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며 메시아가 오실 그날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들 기독교와는 절대적으로 융화할 수 없는 그들의 종교이지만 지금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 도처의 기독교 국가에서 상권을 장악하고 경제력을 이용하여 정치를 주무르며 살고 있는 그들을... 오늘 여기에 소개한 사진들은 제가 아우슈비츠를 방문하여 직접 찍은 것들이지만 더 많은 것들........... 차마 사진을 찍기조차 두려움으로 숙연해지는 것들이 감히 앵글을 들여다 보기 보다는 저의 카메라 뚜껑을 덮어버리게 만드는 것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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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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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점동 2004.07.24. 08:41
그러셨군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더욱더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믿어야 될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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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성 2004.07.24. 08:41
흑흑....ㅜㅜ 우리나라에도... 일제시대에 그에 못지 않는 일이 있었지요.... ㅜㅜ 저주나 복수는 하지 말자.. 다만 잊어 버리지는 말자...
이창섭 2004.07.24. 08:41
책으로만 봤던 곳을 이렇게 생생한 사진으로 보게 되어 감사합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에서 원수란 누구를 지칭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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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현 2004.07.24. 08:41
생생한 현장이네요.......... 책들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느낌들을 주는 사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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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4.07.24. 08:41
백문이불여일견을 몸소 체험하셨군요. ^^ 이래서 여행은 참으로 좋은것 같습니다. 돈이 들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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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규 2004.07.24. 08:41
아우슈비츠, 그 이름자체가 우리에게 동일한 슬픔을 느끼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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