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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 / 마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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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 
본 문 : 마 20:28
이 름 : 강성찬 목사 (전주동부교회)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기를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하시고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교육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라는 목표아래 담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자는 표어를 정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달로 정하였습니다. 생활 목표는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입니다. 이 시간 생활 목표인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부모님께 순종하여 받드시는 섬김

(눅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께 순종하며 부모를 받드러 섬겼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섬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순종하면서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효도는 순종하는 일입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일은 순종입니다. 그래서 엡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합니다.

옛날 농촌에 한 가정이 사는데, 부인은 교회를 잘나가는 집사님이고, 그 교회 여전도회 회장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다 자기 아내가 교회만 갔다 오면 때리고, 난리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는 자녀도 5남매나 있었지만, 남편은 노름하고, 사람 때리고, 주색잡기나 하고, 가정 살림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여 집사님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며 아이들을 키워나가야 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심방을 가셨는데, 그 남편이 그 모습을 보고 책을 잡아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때리고, 핍박하여 교회도 못나갈 정도로 괴롭게 했답니다. 그렇게 매일 맞아가면서도 불평하나 하지 않고, 신앙 생활하면서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집사님이 40대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때 남편이 정신이 번쩍 납니다. 집안 살림을 보니 막막합니다. 장례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그때, 목사님께서 광고하셔서 먹고 살수 있도록, 양식과 연탄도 도와 주고 장례를 인도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자신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죄스럽습니다. 결국 미안한 마음에 "이제부터 교회를 나가야겠다!" 결심하고 예배라는 예배는 다 참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아내 죽더니 정신 차리고 하나님 믿네!"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믿고 교회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으면 지옥 가는 문제 때문에 교회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내와 목사님, 그리고 교회에 감동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안 믿는 친척이나 가족에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 믿으셔야 합니다." 라고 전도해도 나오지 아니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삶에 감동을 받을 때 나오는 일들도 있습니다.

일군을 세울 때에도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딤전 3:7)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2:9,11)고 합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가 거듭나 빛과 소금의 사역을 감당 하며 섬김의 사역을 다 할 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함께 할 줄 믿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의 섬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그 거룩한 손으로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너희들도 이와 같이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하시고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5,16)고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 사람을 섬기고, 상전이 종을 섬기면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으려면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내가 영생을 얻었는지 못얻었는지 알게 된다고 합니다.

  요한서신에서 형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같은 생명을 받은 성도들은 믿지 않는 형제, 친척들 보다 더 반갑고 사랑스러워야 정상입니다. 이유는 육신의 형제는 육신의 피가 같지만 믿음의 형제는 예수님의 피가 성도들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자들이 밉고 꼴 보기 싫다면 진정 거듭났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끌어당겨 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얼싸안아 주어야 합니다. 서로 섬기지 않는 곳은 지옥이요 서로 섬기는 곳은 천국이 됩니다.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와 알베르 까뮤는 모두 노벨상 수상자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박사 학위만도 네다섯 가지나 되는 사람인데 아프리카 람바레나에 가서 흑인 문둥병자들을 치료해 주며 그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적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모두 그를 미쳤다고 했었습니다. 그는 노벨 상금으로 아프리카에 병원을 짓고 흑인들을 치료해 주며 생애를 보냈는데, 사람들은 오늘날 그를 20C의 태양이라고 불렀습니다. 까뮤는 상금을 가지고 한적한 교외에다 멋있는 별장을 짓고 신나게 승용차를 타고 별장으로 가다가 전주를 들이받고 직사해서 그의 생애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남을 섬기는 생활이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고 밑지는 생활 같아도 이것이 보람 있는 생활이요 복된 생활입니다. 남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해집니다.

  이러한 섬김의 삶을 위해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빌2:3)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곳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앞서 일하는 일군들은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은 섬김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 섬김을 받으면 교만해져서 패망하고 맙니다. 섬기는 삶은 교만을 버린 겸손한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형제와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은 쉽습니다.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 권력이 많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을 섬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래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체면과 자존심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발을 닦아주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낮은 곳에서 행해야 합니다. '낮아져라, 겸손하라, 버려라, 종이 되라......'. 이런 말들은 기득권을 가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자기의 권세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선생과 주가 된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더 이상 낮아 질래야 낮아질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이 배웠기 때문에,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더 힘이 세기 때문에, 섬김에 장애가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선행이 왜 문제가 되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선행을 남들에게 선전함으로 자신들의 경건성과 의를 과시하려 했기 때문에 주님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낮은 자리 남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자리, 모두가 싫어하는 곳에서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참 제자들이 됩시다.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섬김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영광 중에 왕 노릇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계시면서 한번도 그 능력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 능력이 입 소문으로 전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은연중에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을 피하셔서 산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잘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작은 이기심이, 알량한 자존심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포기해야 기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빌2:7,8)라고 한 말씀입니다. 이 말을 동일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공감한다는 말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아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섬기고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고난도 당하시고, 시험도 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고 합니다.

우리 연약함을 공감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땅 끝 오지에 가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전혀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오지에 사는 사람들은 음식을 통해서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음식들을 먹고사는 사람들의 습관을 따른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 나오는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이 유리하며 방황하는 것처럼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은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남을 섬기기 위해 우리는 섬기려고 하는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의 저서인 '아프리카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읽으면 마음이 괴로운 사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산중에서 맹수에 쫓기고 있는 토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것을 본 같은 아프리카인은 그 쫓기고 있는 사람이 어느 부족에 속한 종족인가를 살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 부족의 한 사람인 것이 확인되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감수하지만 만약에 그 사람이 다른 종족으로 인식이 되면 전혀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철저한 너와 나의 구별은 부족의 한계에서 너무도 선명해지는 것이 아프리카 토인의 당연한 윤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엄격히 보면 <나>이외에는 모두 타인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타인에 불과합니다. 오직 나는 나 하나만의 생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리만의 행복이 있으리라고 믿어도 좋겠습니까? 정말 이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실이겠습니다.

너 없는 나 그리고 나 없는 너. 이것은 외롭고 무기력합니다. 우주의 광대무변한 그 속에 한 점 먼지에 불과한 이 지구에 살면서 우리가 세계가족을 형성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너만의 불행도, 나만의 불행도 아닌 우리의 공통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슈바이처의 아프리카 관찰 중에서 생사의 기로에서 쫓기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구하는 데까지 부족의 구별부터 한다는 그것만으로도 미개한 민족이라는 치욕스러운 낙인을 받아 마땅하다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도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그 아프리카의 미개한 토인과 같은 생각으로 지나왔던 길목은 없었던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수롭지도 않게 마음을 아파하는 인간애의 애끓는 가슴도 없이 그냥 어떤 비극 앞을 지나쳐 버린 그런 무감각한 우리의 발길이 어느 길목에 남지 않았던가 하고 말입니다.(슈퍼 바이블-너와 나)

  신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섬겨야 합니다. 칼빈은 "왕이라도 섬김이 없이는 진정으로 의롭게 다스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다같이 섬기는 자가 됩시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합시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시다.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본 받아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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