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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밑천 / 롬 1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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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밑천
롬 15: 13

  오늘은 로마서 15장 13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밑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말을 바꾸어서 '성도의 밑천'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밑천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자본은 하나도 없이 전부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려다가 남의 돈으로 사업을 해 보십시오. 이렇게 되면 거의 모든 수입을 이자 갚는 일 때문에 결국은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수고와 애를 쓰고도 문을 닫게 되는 어려운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밑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업에는 반드시 밑천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업은 밑천이 넉넉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농사를 지을 때는 밑거름을 두둑히 주어야 합니다. 퇴비를 많이 만들어서 땅을 갈아서 뒤엎을 때 밑거름을 많이 뿌려 주면 토양 자체가 좋아집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갈아서 뒤엎어 씨를 뿌리고 싹이 난 다음에 금비를 자꾸 주게 되면 그 곡식은 자라서 열매를 맺을는지 모르나 땅을 못 쓰게 되는 것입니다. 산성화되기 때문입니다. 밑거름을 많이 주면 토질도 좋아지고 거기에서 지어지는 모든 곡식이 잘 되고 열매가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밑거름이 두둑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성도들의 밑천, 믿음의 밑거름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믿음 안의 기쁨 (13상-)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쁨이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혼자 있어도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그저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가하면 가정에 들어갔을 때 가정 생활에 전혀 기쁨이 없다면 그 가정에 들어가고 싶겠습니까? 가정 생활이 어려워집니다. 교회 생활에 전혀 기쁨이나 재미가 없다면 결국은 교회 생활을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상 기쁨이 없다 혹은 내가 직업을 가졌는데 그 직업에 대한 기쁨이 없다면 결국은 그 직장 생활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는 생활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다고 하면 억지가 되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서 하고 마지못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삶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이 주는 기쁨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돈이 필요하고 아쉽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자녀들의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등록금이 없습니다. 자녀들은 공부하고 싶어합니다. 또 공부도 잘 합니다. 부모는 공부를 시켜 주고 싶은데 돈은 없습니다. 그 때 돈이 생긴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것은 돈이 주는 기쁨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입니다. 그런가하면 회사나 어느 직장에 친구들과 함께 들어갔는데 다른 친구들은 승진도 하고 잘 나갑니다. 그러나 나는 승진을 못합니다. 얼마나 주눅이 들겠습니까? 그 때 나에게 한 자리 높아지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굉장한 기쁨이 있을 겁니다. 그 기쁨은 자리가 주는 기쁨입니다. 즉 세상이 주는 기쁨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동안 내가 갈고 닦은 실력이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오늘에 와서 인정을 받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것은 나의 실력이 주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실력이 나 보다 앞서게 되면 나는 또 다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이 주는 기쁨은 우리 성도들의 밑천은 못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밑천이라 할 만한 기쁨은 무엇인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3절 상반절을 보면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첫째는 '하나님이 모든 기쁨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 즉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우리 성도에게는 밑천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하나님이 빼앗아 가지 않는 이상 세상 사람들이 빼앗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불러 주실 때 만사를 제쳐놓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자기의 스승 되는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님이 로마 군병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할 때 자기들은 뭔가 한 자리를 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즉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3년내지 3년 반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는 악당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거기까지만 되어도 괜찮을 텐데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과 악당들이 제자들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숨어 있으려고 하니 서로 서로가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일곱 명이 모여서 모인 자리에 문을 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 지방은 낮에는 상당히 더운 지방입니다. 그래서 문을 닫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을 닫고 있는 것은 이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님이 삼일만에 부활하사 그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너희들이 왜 이렇게 두려워하느냐? 내가 십자가 못 박혔던 못 자국을 보라"고 하시면서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창에 찔렸던 옆구리에 난 창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나는 다시 살아났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0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보고 기뻐했던 것이 아닙니다. 한 자리 올라갔다고 해서 그 자리로 인하여 기뻐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인생의 죽음이 끝난 줄 알았더니 죽음 뒤의 영화로운 주님을 보고 기뻐한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죽음이라도 빼앗아가지를 못합니다. 이제는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주를 보고 기뻐하는 기쁨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 안에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에게는 밑천이 된다는 말입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전을 지을 때의 일입니다. 채석장에서 대리석을 깎고 다듬어서 예배당 짓는 곳까지 운반하고 조립하여 건축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석공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곳에 가서 "당신은 이렇게 돌가루를 마셔가며 땀이 범벅이 되고 땀과 돌가루가 뒤섞여있는 좋지 못한 작업 환경에서 이렇게 돌 일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사람이 퉁명스럽게 "죽지 못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입니까? 불만스럽다는 말입니까? 첫째 사람은 불만이 꽉 차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 그 일이 얼마나 지겨웠겠습니까? 두 번째 사람에게 "당신은 왜 이 일을 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 수 없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해서 벌지 않으면 먹여 살릴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돌 일을 하는 일에 불행함도 없지만 그렇다고 행복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담담하게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중에는 행복도 없이, 불행도 없이 하루 하루를 담담하게 살아가시는 분들은 없으십니까? 세 번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땀과 돌가루가 범벅이 되어 있는 좋지 않은 작업 환경에서 일을 하면서도 흥얼거리면서 노래를 합니다. "당신은 왜 이 일을 하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배운 것이 돌을 깎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다른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드로 성전을 짓는다는데 내가 내 기술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저는 감사함으로 일을 합니다. 기쁨으로 일을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구의 삶의 복됩니까? 세 번째 사람의 기쁨을 여러분들도 가지고 계십니까? 똑 같은 환경에서 똑 같은 일을 하면서 첫 번째 사람은 그렇게 불평이요, 불만이 가득해서 일을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담담하게 별 의미 없이 일을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나는 주님의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하고 기쁩니다"라는 생각으로 기쁨이 충만하여 일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이 기쁨만이 우리들의 밑천이라고 하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믿음 안의 평안 (13중-)

  마가복음 1장을 15절을 보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복음을 들고 세계로 나갈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준비가 안 되었었는데 이제는 준비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위한 준비가 끝났고 복음을 들고 나갈 때가 되었다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언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유럽 일대와 중동 일대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하고 대 로마제국을 건설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군사력과 정치력은 로마가 지배를 하면서도 문화는 헬라가 지배를 합니다. 로마 군대가 들어갔음에도 헬라어가 통할 뿐이요, 로마어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영어가 세계어가 되듯이 그 당시는 헬라어와 헬라 문자가 세계적인 언어가 된 것입니다. 헬라어만 하면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하는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준비가 끝이 났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둘째는 도로 준비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각 지역으로 로마 군대가 점령해 나가면서 식민지를 삼다 보니 군사들의 빠른 출동을 위해서 길이 잘 닦아져 있어야만 합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사통팔달하는 길이 얼마나 발달이 되었는지 요즘 고속도로가 잘 발달된 나라와 같았습니다. 그 당시 로마로 통하는 도로망이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전도자들이 달려가면서 이 나라 저 나라 이 동네 저 동네 복음을 전하기가 얼마나 좋습니까? 도로가 준비가 되어 이제는 복음을 들고 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것 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 없는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동네와 저 동네가 싸우고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자주 싸운다면 복음을 들고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로마가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 국가들을 점령하고 대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서 전쟁은 그치고 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는 억울한 일이나 압박 받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겉으로는 세계적인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나가 복음을 전하는데 상당히 유익했고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평화의 때가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이 이런 뜻입니다.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이 주었던 평화입니다. 그러나 로마가 망하는 것과 함께 그 평화는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힘에 의한 평화는 힘이 약화 될 때 완전히 뒤바뀌어서 오히려 난리가 더 커졌다고 하는 역사적인 교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세상이 깨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밑천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밑천이 되는 평안은 하나님이 믿음 안에서 주는 평강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이 빼앗지 않으면 빼앗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노라'(요 14:27)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합니다.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내 평안을 너에게 끼쳐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내가 먹을 것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건강하면 더 좋고 건강하지 못해도 누리는 평안이 있습니다. 가정의 평안, 교회의 평안, 사업의 평안은 주님이 주실 때는 주님이 아니면 빼앗을 수 없는 이 평안이 우리 마음에 이루어질 때 그것은 세상 것과 바꿀 수 없는 우리의 밑천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소망의 하나님이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만 주시는 평강이 성도의 밑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에 성공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일으킨 메소디스트 운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고 나중에는 감리교로 발전을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영국의 명예 혁명에 일조를 하는 귀한 일을 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레는 아주 교만해졌습니다. 그런데 미국 조지아주에는 인디안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인디안들에게 전도를 못했지만 내가 가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의 교만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로 자청해서 갔습니다. 완전히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영국으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요즘처럼 큰 배가 아니지 않습니까? 돛단배를 타고 대서양 한 가운쯤 왔는데 노도광풍이 밀려왔습니다. 일엽편주라 물결 따라 올라갈 때는 천당에 올라가는 것 같고 물결을 따라서 내려갈 때는 지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순간에 배가 뒤집혀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웨슬레가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모릅니다. 그 때 배 한 구석에서는 몇 사람이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합니다. 너무 신기해서 다가갔더니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이 와중에서 어떻게 찬송을 할 수 있고 평안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라비안 교도 중에 한 사람이 "당신 예수를 믿습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러면 거듭났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웨슬레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겨우 풍랑을 면하고 살아 돌아와서 집에 들어 앉아 한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올더스케잇이라고 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이 모이는 조그만 교회에 갔습니다. 아마 목사님이 설교 준비를 못하셨는지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그대로 읽어주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은혜 받는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서론을 읽을 때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웨슬레가 회심을 하고 거꾸러집니다. 중생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는 글을 다음과 같이 써 놓았습니다.
  [나는 인디안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나를 회심시킬 자는 그 누구랴? 나는 쾌청한 여름철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말도 잘 할 수 있었다. 아니 위험이 가까이 없는 동안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죽음이 정면으로 나를 노려볼 때 내 영혼은 쩔쩔매고 말았다. 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두려움에서 건져줄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온실 안의 꽃처럼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믿음 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감리교 운동을 성공했다고 자신 있게 거만하고 도도한 마음으로 인디안 선교를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면서 대서양 한 복판에서 그 폭풍우를 만나서 두려워하던 그 장면을 짧은 기록이지만 낱낱이 그리고 심도 있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요한 웨슬레와 같이 온실에서 곱게 자라고 있는 믿음 생활, 환난이나 풍파나 어려움이 닥쳐오면 쩔쩔매는 평안이 전혀 없는 그런 믿음생활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 안에서 즉 믿음 안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이 풍광 속에서도 예배하고 찬송하면서 기쁨과 평안을 가졌던 그 평안이 우리들에게는 믿음의 밑천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이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믿음 안에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믿음 안의 소망 (13하-)

  본문으로 돌아가서 13절 하반절을 보면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넘치게 하시는 소망만이 성도의 밑천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진정한 소망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소망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죽으면 그 소망도 죽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죽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함께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는 산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산 소망은 죽어도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 건너편에 소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 아니하는 죽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산 소망은 첫째로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닌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산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인 동시에 우리의 부활이기도 합니다. 셋째로 성령으로 거듭남 때문에 산 소망이 있습니다. 거듭난 자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죽음이요, 예수님의 천당은 내 천당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거듭남 까닭에 우리는 죽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하늘 나라 소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다른 것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하나님이 계시는 한 우리의 소망은 얼마든지 살아 있는 산 소망입니다.

  왓츠라고 하는 사람이 그린 "희망"이라고 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둥근 지구 위에 여인 하나가 앉아 있습니다. 여인의 눈은 손수건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손에는 비파를 들고 있는데 그 비파는 줄이 끊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히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그 한 줄을 가지고 비파를 켜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런 소망 저런 소망이 전부 끊어졌다고 할지라도 한 가닥 소망은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것에 대한 소망, 저것에 대한 소망이 끊어지고, 이런 절망, 저런 절망이 우리에게 많다고 할지라도 한가닥 끊어질 수 없는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요, 예수님이 주시는 소망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소망이 되는 그 소망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절망하고 실의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로서 천상천하의 주인이시오, 천상천하의 갑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세상의 소망이 전부 끊어져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우리 성도들의 밑천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면 모르지만 살아 있는데 왜 우리에게 절망과 실의와 낙담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있는 한 절대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도우시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밑천은 첫째 믿음 안에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요,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여러분들의 생활에 하나의 밑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믿음 안에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빼앗아 가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이 빼앗지 않는 이상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어떠한 고통과 불행 중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평안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믿음 안의 소망입니다. 죽은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거듭남 까닭에 죽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곧 소망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한 우리를 돌봐 주시지 못한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한 우리에게 실망과 낙담과 실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하나님을 소망하시고 이 소망 중에 항상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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