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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터전을 주옵소서 (마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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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1월4일 말씀 
제목 : 생명의 터전을 주옵소서 
본문 : 마태복음 16:18 

2004년 한 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으로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한 해동안 좋은 생각 많이 하고, 한 해 동안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고,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004년의 주제는 “생명의 터전을 주옵소서”이다. 우리가 지금 성전을 건축 중에 있는데 이 성전을 통해서 감당해야할 사명이 바로 “생명의 터전”이다. 터전이라는 말의 의미는 땅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초, 기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짓는 성전을 통해서 생명의 기지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작년에 남극의 세종 기지에서 기후로 인하여 사고가 있었다. 여덟명이 실종되어 모두 죽었는 줄 알았는데 한 사람만 죽고 모두 무사하였다. 남극의 예측할 수 없는 기후와 추위 속에서도 그들에게는 세종기지가 있다. 그곳 세종 기지는 생명의 터전이다. 생명의 기지이다. 실종되었다가 세종기지로 되돌아온 남편의 부인 인터뷰에서 “우리 남편과 우리 식구는 모두가 지옥에 갔다가 천국으로 되돌아왔다”고 고백한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마치 남극에 있는 세종기지와 같은 곳이다. 남극은 지구의 끝이다. 세종기지를 떠나면 그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불가능하다. 남극에 있는 그곳은 생명의 터전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끝에서 나를 지탱해 주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세상에서 살다가 밀려 밀려 끝까지 밀릴 때가 있다.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에 교회는 “끝에서 나를 지탱해 주는 곳”이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어디가리까”

어느 신문사에서 봉두완씨가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서 인터뷰한 내용을 실었다. 내용은 정치적인 혼란의 상황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님이 인터뷰의 마무리를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를 인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 빅터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의사이다. 그는 의미요법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 죽음의 위기 속에서 살아남게 하는 힘은 뭔가 의미있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랭클이 말하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라는 말을 하였다. 내가 지금 나치 수용소에서 다 죽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은 아직 Yes이다.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 내가 지금 고칠 수 없는 병으로 다 죽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은 Yes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해 두셨다. 정치적으로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이다. 우리가 살다가 끝까지 밀려서 끝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 이다.

우리 주변에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음부의 권세, 죽음의 권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오면 Yes의 메시지가 선포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같이 교회는 어떠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는 생명의 터전이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문이 열리는 생명의 터전이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는 이같은 생명의 터전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 때문이다. 베드로 자신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 자신이 생명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 고백의 내용이 생명의 기초가 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로 이 고백이 생명의 기초가 된다.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한 곳이 가리사랴 빌립보라는 것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본래 이스라엘 최북방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이 도시를 건설하면서 로마 황제의 칭호인 카이사르에 자기의 이름 빌립을 붙였다. 그래서 가이사랴 빌립보가 되었다. 당시 로마 제국에 속한 영토 내에는 로마 황제의 이름이나 칭호를 붙인 도시가 여럿 있었지만 아무 도시에나 로마 황제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했다. 첫째는 로마 황제의 위용에 걸 맞는 규모를 갖추어야 했다. 황제의 이름을 아무 곳에나 붙인다면 그것은 황제에 대한 모독일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조건은, 그 도시의 중심이나 혹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반드시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지상의 신이었다. 그러므로 헤롯 빌립이 건설한 도시에 황제의 칭호가 붙었다는 것은 바로 이 두 조건이 충족되었음을 의미한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한마디로,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였다.

당시 로마제국이 추구하고 또 자랑하던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힘이었다. 권력, 군사력, 경제력 - 이 절대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해 그들은 도시나 건물을 세울 때면 으레 웅장한 석재와 화려한 대리석을 동원하였다. 둘째, 지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높은 학문을 자랑하기 위하여 도시마다 대형 도서관을 건립하였고, 가정마다 서재의 크기를 경쟁하였다. 셋째는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시가지는 물론이요 집 안 곳곳에,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여인의 나신상과 우람한 근육의 남자 조각상을 즐비하게 세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로마의 도시 장관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황제의 도시에 시골 갈릴리 출신의 주님 일행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머물게 되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보다도 로마 황제 신전의 문지기가 훨씬 더 값진 옷을 입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처럼 초라한 모습의 주님께서 바로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 여기고 있는지를 물으셨다.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대답 속에는 이곳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있지만, 로마제국이 자랑하는 권력과 지식과 육체의 건강이 있지만 그러한 모든 것은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오직 주님 만이 내 인생의 그리스도요, 오직 주님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라고 외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이러한 신앙 고백 때문이다.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이러한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교회는 곧 생명의 터전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바라보라. 생명의 터전보다는 죽음의 문화가 훨씬 많다. 일본 상지대학의 호세·데·베라 교수의 연구 보고에 의하면 한 어린이가 취학 전까지 TV를 보는 시간은 약 9000시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평균 12000시간을 학교 교실에서 보내는데 TV를 시청하는 시간은 무려 그 배에 가까운 20000시간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충격적인 사실을 수많은 화면 속에서 15000건 이상의 살인 사건을 보게 된다고 한다. 우리 주변의 문화는 이같이 죽음의 문화가 판을 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라고 외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세상은 온통 죽음의 문화 사탄의 문화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가 있는 한 죽음의 권세,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지난 주에 인천에서 집회를 하였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옆에 교회에서의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을 보았다. 한 밤 중에 불을 밝히는 죽음의 문화가 이 세상을 온통 덮는 것 같지만 이른 새벽에 눈물을 흘려 기도하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교회가 있기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라고 외칠 수 있다.

이같이 믿음의 고백위에 세워진 교회는 생명의 터전이다. 우리 교회가 아름 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데 바로 이 성전이 믿음의 고백위에 세워지는 생명의 터전이 될 줄로 믿는다.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열쇠는 잠긴 문을 여는 기능을 갖고 있다. 사무실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열쇠는 닫힌 문을 여는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열쇠도 많이 있다. 대학에 진학하려면, 즉 대학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면 실력이라는 열쇠가 있어야 한다. 몸이 아파서 고생을 할 때에 약을 먹고 나으려면 약사의 조제한 약을 먹어야 할 때가 있다. 여기에 약사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적절한 약을 조제하여 준다. 이와 같이 실력이나 지식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보이지 아니하는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열쇠는 영원하지 못하다.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과할 때는 아무리 좋은 벤츠 자동차 열쇠를 가지고 갈 수 없고, 아무리 좋은 맨션 아파트 열쇠를 가지고 가야 소용없고, 아무리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 있어도 실력이라는 열쇠도 소용이 없다. 이러한 열쇠는 오직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만 필요한 유용한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무덤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천국열쇠는 죽음과 절망으로 굳게 잠겨진 무덤의 문을 열게 한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그 시신은 돌무덤에 묻혔다. 그리고 돌문으로 닫고, 인봉하고 로마의 군인들이 그 무덤을 지켰다. 십자가 상에서의 죽으심은 절망이요, 돌무덤으로 굳게 닫힌 완전한 절망이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절망과 공포의 돌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죽음을 생각해 보자. 모든 식구들을 남기고, 좋아하던 음식도 못먹고, 즐거움도 없고, 쓸쓸히 땅 속에 묻혀야 하는 완전한 절망이 아닌가 ? 죽음을 생각하면 공포에 질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천국열쇠를 주셨다. 이것이야 말로 완전한 절망과 공포의 문을 열 수 있는 진짜열쇠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사업의 실패, 질병, 사람들과의 갈등, 미움, 시기, 질투, 등으로 우리의 마음은 쉽게 절망하고 낙망하는 문이 우리를 꽉 막아 놓았지만, 천국열쇠, 진짜열쇠는 그 모든 문을 열게 될 줄로 믿는다.

사랑하는 성도여!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는 생명의 터전이다.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생명의 터전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온 세상은 모두 절망적인 것 같아도 믿음의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이다. 이 교회에 천국 열쇠를 전해 주셨다. 이 성전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기를 바란다. 세상에 살면서 콱 막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새로운 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한다. 바로 이 성전을 통해서 이 한해에도 형통한 길이 열려지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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