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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관이 앉아 있는 레위 마태 / 눅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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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관이 앉아 있는 레위 마태 / 눅 5:27-32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 특유의 관찰력을 가지고 예수님의 행적을 면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 만난 길손이 사경을 헤매다가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서 살아난 이야기, 베다니 마을의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 강론 앞에서 취하는 대조적인 자세, 100마리 중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열 드라크마 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두 아들 중 잃어버린 작은아들 이야기, 재산만 늘려 나가는 어리석은 부자, 거지 나사로와 부자, 여리고성의 키 작은 삭개오 이야기....등은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기사들입니다. 특히 23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의 통곡 장면과 골고다 언덕 세 개의 십자가 묘사는 압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에 대해서도 누가복음은 나머지 복음서들과는 상당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한 청년이 세관에 앉아 있습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레위라 하는 세리’라고 소개를 합니다. 레위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셋째 아들입니다. 모세 율법 시대의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를 향하여 특수한 사역을 맡기는 규례를 정하십니다. 제사장, 찬양대원, 성막(성전) 건축과 관리, 청소, 미화등 신령한 일에 수종들 지파로 레위지파를 指定하셨습니다. 레위지파는 이 規例를 철저히 信奉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의사 누가는 마태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뭉개버리고 있습니다. 열 두 지파 중 가장 자존심을 중요시하는 레위지파 후손인 마태가 가장 더러운 세속적인 직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책상을 길거리까지 내다 놓고 거기 앉아서 여행객들의 물건을 일일이 들추어내어 세금을 물리고자 세관 앞에 나와서 앉아 있는 모습을 여지없이 공개하고 있습니다.

레위지파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왜 세리가 되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세리는 창녀와 더불어 가장 지탄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악덕 인간으로 지탄받았습니다.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의 정치와 경제를 철저히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지요. 로마의 지배자들은 유대인 하수인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동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시켰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징수에는 항상 불법, 악법, 뇌물이 자행되었으며 하급 관료들은 세금을 과잉 징수(약탈, 갈취)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세무서장(세관장)등 상관에게는 뇌물을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호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세리들은 불법으로 세금을 과징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만큼의 저주와 원성 또한 동족들로부터 원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사실 본문 27절은 “레위(지파 마태)가 성전 입구가 앉아 있는 것을 (예수께서) 보시고...” 이렇게 기록되어야 어울릴 것인데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라고 되어 있으니 마태는 자존심이 상해야 옳습니다. 마태가 청년의 나이에 세관에 앉아 있어야 했던데 는 다음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식민 통치하에서 먹고살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세관에 취직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주의요, 실리주의 인생관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공 지상주의입니다. 비난, 손가락질, 도덕(윤리)적 일탈 등에 눈을 감아 버리고 오로지 성공하기만 하면 결국 그 성공을 인정받고 상류층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눈 딱 감고 그는 레위지파 임에도 불구하고 세리가 되었으며, 지금 세관 앞에 책상을 내다 놓고 뻔뻔스러운 얼굴 그대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다시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follow me(나를 좇으라/ 나를 따르라)
마태는 처음에는 그의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설마 나를 보고하시는 말씀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마태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마태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따스한 음성으로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때의 감동과 흥분이 얼마나 컸던지 나중에 마태는 마태복음4:19에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리고 마태복음 9:9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당시 로마 침략자(정복자, 권력자)들에게 빌붙어 더럽게 살아가고 있던 마태를 향하여 ‘우리 무리에 끼워 줄 터이니 따라 오너라’고 사심 없이 따뜻하게 불러 줄 수 있는 유대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불러줄 수 있는 능력도 없었고, 능력이 있다한들 이방인 침략자들과 손잡고 그 앞잡이 노릇하면서 더럽게 먹고살고 있는 인간을 불러줄 지 만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를 불러 주십니다. 이렇게 우리 인류를 향하여 당당하게 청할 수 있는 분이 우리 예수님말고 또 있을까요?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그 누구도 이렇게 말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은 단지 우리 인간들 중에서 좀 나은 선생(선각자)일 뿐 메시야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속 사람을 들여다보면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인간이요, 죄인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입니다.(롬3:10-14,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5:14-15)

위의 위인들보다 못하지 않았던 바울 사도마저도 자신의 죄성, 불완전성, 겉과 속이 다른 점, 자기 모순, 부끄러운 자화상 때문에 수없이 갈등해야 했고, 고민해야 했고, 그래서 괴로워하였고 힘들어했습니다.(롬7:21-24, 고전15:56)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부정모혈로 태어난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부정모혈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메시야 구주십니다.(요1:14)
이 분께서 지금 마태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할렐루야) 이 예수님을 우리가 만났고, 믿고, 따르고 있다니 할렐루야 너무나 크신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이제 28절을 봅시다.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이 구절을 여가적으로 해석하지 맙시다. 여러분 모두 목회자로, 선교사로 나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신도 목회자, 평신도 선교사가 더 효율적이고, 더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기만 한다면 어떤 직종이든지 모든 분야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모든 분야로 진출해야 합니다.(눅3:10-14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고전10:31)

오히려 세상 속에서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공헌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일 수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할 기회도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탁월한 영향력을 더 많이 끼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이 바로 도산 안 창호, 백범 김 구, 고당 조 만식, 우남 이 승만, 김 용기장로, 장 기려박사(장로), 이 태영변호사(한국 최초 여성 변호사, 한국 가정법률 상담소 창설자, 정 일형목사의 부인), 나 애덕(에스더)간호 선교사, 장 준하선생, 정 근모박사(장로 26세 뉴욕공대박사, 27세 교수, KAIST창설.... 04. 1월 한국 전체 과학자 서신투표 최고 득표로 한국 최고의 과학자 영예 ‘한림원’원장 선출됨) 성 유리양(장신대 신약학 교수 성 종현목사(독일 튀빙겐대)의 따님) 최 태욱, 최 성국....

세리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인생의 방향을 확실히 붙잡았다는 뜻입니다.(고후5:17, 갈2:20, 빌3:12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달려)가노라”)

이제 29절을 보십시다.
마태는 ‘예수님을 위하여 for Jesus"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배설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 만난 사건에다 자기 인생의 최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 고백의 일환으로 지금 근사한 잔치를 열고 있습니다. 잔치 손님으로는 예수께서 관심 두시는 세리와 죄인들을 많이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이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인생관이요, 철학이 되어야 합니다.(고후5:15, 갈2:20, 마6:33, 롬14:7-8, 빌3:8) 왜 삽니까? 무엇을 위해 삽니까? 마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만나자 곧 바로 인생의 방향을 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자기 인생은 ’오로지 예수님을 위하여‘라고 선명하게 정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明快한 인생관 아닙니까?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므로 지금도 히말라야나 아프리카 사막을 헤매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 성경은 ’정녕 복받은 자들/ 행복자!‘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신33:29, 눅15:7-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십시오. 의심하거나 고민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마태처럼 ‘예수님을 위하여’를 인생의 목표로, 꿈으로 삼으십시오. 가장 확실하고 성공적인 선택이 될 것입니다.(캠브리지대 출신, C. T Studd. "한 번 뿐인 인생, 그것은 곧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 그것은 영원하리라‘)

마태는 지난 날 로마인 상관들(세관장..) 에게 잘 보이고, 이권과 기득권을 계속 보장받고자 그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융숭하게 향응을 베풀곤 하였을 것입니다. 그 마태가 지금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부끄러운 향응, 허망한 잔치를 많이도 베풀었습니다. 부끄럽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의미 있고 보람있고, 가치 있는 잔치를 베풀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위하여 잔치를 배설해 봅시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집을 잔치 집으로 만듭시다. 매일 예수님 때문에 잔치합시다. 구역 식구들을 초청하여 잔치합시다. 구역모임을 잔치처럼 즐겁게 가집시다. 신앙 좋다고 자찬하던 서기관, 바리새인 그들은 언제 하나님을 위하여 잔치 한 번 연적이 있을까요? 그들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에 인생을 다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신앙인이 되지 맙시다. 사람을 건지고 살리는 천국잔치를 부지런히 배설합시다. (눅1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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