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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용서합니다 (골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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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지난주일 우리는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또 다른 각도에서 사랑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랑이란 정말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게 되었고 사랑 받기 위해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또한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우리 삶의 열쇠입니다. 우리 삶의 의미를 해독하는 코드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궁극적인 시금석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상처를 줄 때에 나타납니다. 어떻게 여러분은 반응하십니까? 기분이 상합니까? 아니면 원한을 품습니까?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힐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응합니까?

고린도 전서 13장 5절은 이렇게도 번역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행한 잘못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부부가 싸우게 되면 아내가 모든 옛날 기록을 다 가지고 있는 역사학자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진 않았습니까? 화가 나면 단지 히스테리칼 한 것만이 아니라 히스토리칼하게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옛날부터 여러분이 잘못한 모든 것을 다 들추어 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잘못에 대한 기록을 보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긴 여자만 아니라 남자들도 개인 문서보관소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상처를 주면 그 모든 기록을 무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용서란 지금껏 우리가 다룬 주제 사랑실천 시리즈 설교 가운데서 어쩌면 가장 어려운 주제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사랑의 행동이 바로 용서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이 어려운 일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헤어져서 생각해 봐도 용서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란 만만찮은 작업입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잘못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주 오해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용서를 다루기 전에 잘못된 생각을 걷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는 다섯 가지 퀴즈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대답을 하실 차례입니다. 제가 하는 말이 맞으면 여러분이 저를 쳐다보시면 됩니다. 제가 하는 말이 맞지 않다 싶으면 눈길을 저한테서 돌리면 됩니다. 

1. 용서란 해달라고 할 때까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2. 용서란 고통과 상처를 축소시키는 것을 뜻한다.

3. 용서란 관계의 회복과 재결합을 의미한다.

4. 받은 상처를 잊어버리기까지는 진정으로 용서한 것이 아니다.

5.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다섯 가지 명제가 다 잘못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는 저를 쳐다보시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오늘은 자주 쳐다봤다면 실점을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듣게 될 것입니다.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 여러분들은 무엇이 용서가 아닌지를 먼저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섯 가지를 차례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용서란 조건적이 아닙니다. 달리 말해 다른 사람의 반응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조건적일 수 없습니다. 참된 용서란 값을 지불해야 얻는 것도 아닙니다. 노력을 통해 얻는 것도 아니며 흥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란 비 조건적입니다.


2. 용서란 심각한 잘못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별로 큰 문제가 아니야,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 나는 별로 마음 상한 게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것과 상처를 입히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비의도적인 사고일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란 살면서 이런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인내해야 하며 수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잘못을 하면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두 가지는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아무데나 용서를 쉽게 갖다 붙입니다. 제가 평소에 입은 옷이 여러분의 취향에 맞지 않아서 여러분을 괴롭혔다면 내가 용서받아야 할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괴롭힐 의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의도적으로 했다면 다른 이야기입니다. 용서란 의도적인 잘못에만 한정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용서란 조건적이 아닙니다. 용서란 상처의 심각함을 얼버무리는 것도 아닙니다.


3. 용서란 변화 없이 관계회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가장 빈번한 오해 중 하나입니다. 용서란 관계회복과는 다른 것입니다. 용서하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용서를 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서로 친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다시 결혼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습니다.

관계의 회복과 용서는 서로 두 가지 다른 사안입니다. 용서는 바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용서는 결코 관계회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용서란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를 향한 여러분의 몫의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는 가해자가 용서와 상관없이 세 가지를 해야만 합니다.

첫째로 정말로 자기가 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됩니다. 진정한 회개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로 입힌 손상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야 합니다.

셋째로 가해자는 시간을 두고 자신이 바뀐 것을 입증하므로 여러분의 신뢰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모두 용서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식구라도 좋고 이전의 배우자거나 같은 직장의 친구라도 상관이 없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거듭거듭 잘못하고 상처를 입힌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거듭거듭 용서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신뢰해야 할 의무가 있거나 즉시 관계를 회복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술에 중독이 되어서 배우자를 함부로 다루고 아이들조차도 함부로 때리고 구타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갈라서기로 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찾아와서 말합니다. “여보 미안하오, 내가 한 짓 생각해 보니 정말 부끄럽소. 용서해주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용서 해 줘야 됩니다. “용서하지요”라고 대답 한다고 해서 “그러면 집으로 다시 돌아가도 되는 거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관계가 회복되려면 변화된 삶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관계회복은 용서 이상입니다. 신뢰를 필요로 합니다. 신뢰는 시간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용서한다고 해서 이전관계로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확인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4. 용서란 일어난 일을 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결코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일을 잊고 싶지 않아서 용서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흔히 용서하고 잊어버리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듣기에는 그럴 듯 합니다. 문제는 말처럼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잊어버리려고 노력할수록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두뇌는 아주 고성능 영상 녹화기와 같습니다. 보고 들은 것은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의식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불현듯이 선명하게 다시 재현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판 주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여러분은 여러분의 양심을 덮고 살았던 모든 일 조차도 순식간에 쫙 펼쳐질 것입니다. “주마등 같이”그런 이야기들 하시죠? 한번 들어가면 그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상처일수록 망각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것을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위에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녹음테이프 반복해서 아무리 들어도 안 지워 지잖아요? 그러나 그 테이프를 가지고 다시 그 위에다 녹음을 하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 고통스런 상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셨다는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상처가 치유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가능합니다. 성도들은 다시 녹음 할 수 있는 기능이 회복된 것입니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는 것과 기억하고 있지만 봐주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고통이나 상처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붙들고 살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은 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문제는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쉽지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렌즈를 통해서 재조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판, 형들의 일에 대해서 은혜의 렌즈로 바라보았습니다. 말이 그렇지 형들에 의해서 낯 모르는 이방사람들에게 팔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비는데도 불구하고 열명이 하나도 도와주지 않고 팔려서 가면 그런 상처는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형들을 볼 때 마다 그것을 기억하게 될 것인데 어떻게 그게 잊혀집니까? 그러나 요셉은 한 날 이렇게 말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여기 판 것을 인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여기에 보내셨습니다.”그래서 그는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상처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권한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해자만이 용서해 줄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은 그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직 피해자만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떤 딸아이가 강간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고 해도 여러분들이 가해자를 향해서 우리가 너를 용서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용서 할 테니까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시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용서할 권리가 없습니다. 용서는 그 부모가, 그 형자가, 그 친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에도 값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에도 값이 있습니다.

지금껏 우리는 무엇이 용서가 아닌지를 살폈습니다. 이제 참된 용서의 세 단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진정한 용서란 보복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핵심입니다. 복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 하였습니다.”(롬12:19, 표준새번역)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보복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고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공평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용서하는 일이 공평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일을 공평하신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우리를 용서 해 준 것이 그것이 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는 공정한 것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자기에게 공평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보복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란 본래 공정한 것이 없습니다. 용서란 공정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그래서 은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신 은혜가 용서입니다. 한 날 하나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결론 내리실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분과 제가 할 일은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평강이 찾아 들 것입니다. 그 평강을 누리시고 공평은 한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보다 더 공평하게 처리하실 분이 있습니까? 누가 잘잘못을 정말로 공평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보복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용서의 출발점입니다. 만약 보복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밤낮없이 원한의 덫에 사로잡혀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계속해서 상처를 입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짓에 불과합니다. 한번 받았던 상처도 아픈 것인데 왜 그 상처에서 여러분은 계속 뒹굴고 있어야 합니까? 여러분이 상처받은 것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그들은 여러분에게 상처를 계속 입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복할 권리를 포기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어느 아무라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응답하는 일에서 실패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응답하지 아니하면 너무 쉽게 그 안에 나쁜 마음이 자리합니다. 그런 마음은 그 자체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독을 끼칩니다.”(히12:15, 필립스역)

원한과 미움은 대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미워함으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쓸데없는 감정을 고수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보복할 권리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보복할 권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포기한 사람입니다.


2. 선으로 악을 갚으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아니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요? 저주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하라고요?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요?” 예, 여러분과 나의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 된 우리를 향하여서 그렇게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것 쉬운 것 아닙니다. 장난스러운 게 아닙니다. 한가하게 일주일 마다 한번씩 옷 차려입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것을 할 수 있냐고요? 네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아 버려야 됩니다. 여러분의 옛 사람은 그런 것을, 하나님의 요구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끝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그 알량한 착한 마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선대하는 것이요 축복하는 것이며 위하여 잘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용서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러분이 용서했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축복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니 그들의 상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여러분이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한 사람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사실 상처를 줍니다. 자기 내면에 상처가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구역에서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나 이 구역에 못 다니겠어. 이 구역에서 나한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상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안에 상처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하고 같이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자기가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자기도 훨씬 더 많은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배우면 자신의 상처만 보지 않고 상대방의 상처도 보게 됩니다.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까? 그렇다면 부모님 안에도 많은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어머니를 여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른 나이에 고향을 떠나서 객지 생활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장성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았지만 아버지가 그 자녀를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지 보고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보게 되면 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알게 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보복할 권리를 포기하고 더 나아가서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자연인으로서 우리의 모습 가지고는 불가능 합니다. 우리는 오른뺨을 맞으면 그냥 멱살을 붙들고 몇 번씩 흔들고 두 번 세 번 때려줘도 속이 풀리지 않습니다. 왜 나를 때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주께서 뭘 말씀하십니까?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라”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이고 교회가 여러분에게 따르기를 원하는 진리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자존심을 요만큼이라도 가지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한대 맞으면 열대를 때려도 분이 풀리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오른 뺨을 맞고도 왼 뺨을 돌려 댈 수 있으면 그는 자신에 대해서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기 때문에 폭력을 가하는 사람을 향해서 용서의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넘쳐나기 때문에, 사랑의 눈빛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고 욕하는 사람에게 같이 욕하지 않고 마음으로 그의 축복을 빌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상대방의 잘못에 대한 기록을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해 두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것을 덮어주고 잊어버리는 것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매일 용서의 주님을 만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 가십시오.


3. 이 과정을 계속해서 필요한 만큼 반복하십시오. 용서란 일회적이 아닙니다. 한 방에 끝내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원샷에 날릴 수 있으면 큰마음 먹고 한번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누군들 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잘못을 행할 때 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용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베드로가 주님께 그렇게 질문 한 적이 있죠? “주님 도대체 내가 몇 번이나 나한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해야 됩니까? 일곱 번쯤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주님 말씀하시기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라.”(마18:21-22, 표준새번역)그렇게 명하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사백구십 번입니까? 제가 중학교 1학년때 성경시험에 그렇게 썼는데 선생님께서 은혜로 맞다고 해 주시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그 이후 그것이 맞은 답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 선생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십수년 전에 신길성결교회에서 저보고 집회하러 와 달라고 해서 내가 그 은혜 갚기 위해서 그곳에 가서 집회 한 적이 있습니다. 490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 플러스 알파 입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어떻게 우리에게 가능합니까? 그건 우리에게는 불가능 한 것 입니다. 우리 자연인의 본래적인 우리 모습 가지고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척 하면 당신은, 여러분들은 위선자 입니다. 불가능 하다는 것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찬양하는 사람, 항복의 손을 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상처를 입힌 사람이라도 용서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러분의 부름입니다. 그렇다고 꼭 그 사람을 찾아가서 만나야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상처 준 사람은 기억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헤어진 사람은 재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찾아가면 사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사를 가서 찾을 수도 없거나 죽어서 만날 수 없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는 방법의 하나는 맞은 편에 빈 의자를 하나 갖다놓고 그 사람이 앉아 있다고 상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상처를 받았는지 다 이야기합니다. 남김없이. “그러나 십자가에서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말 하십시오. 그 방법이 어색하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낱낱이 받았던 상처들을 다 쓰십시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용서 받은 자로서 당신을 용서합니다.” 만나고 싶지 않을 때 그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붙이는 편지가 아닙니다.

물론 듣는 것처럼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관계가 파괴되는 것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그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서 입니다. 그것이 친구관계를 파괴하고 결혼관계를 파괴합니다.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모든 관계가 다 깨어지는 것입니다.

세 가지 말씀 드렸습니다. 진정한 용서란 보복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갚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비록 한 대로 반복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단계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여러분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따르지 마십시오. 주님 안에 확고히 서십시오.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까? 용서할 기분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아무도 용서할 기분이 드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상처가 아니면 모르지만 큰 상처를 받으면 용서할 기분은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분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과 저의 부름에 따라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아들을 값으로 치루셨습니다. 모든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모든 죄를 청산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저를 흠 없는 자로 이 자리에 앉히시기 위해서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이상 벌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주간에 여러분이 기억해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은 보다 알아듣기 쉽도록 번역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받아들여 주고,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릴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서로 용서하길 기대하십니다.

골로새에 보낸 편지뿐 아니라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2,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지만 용서받았습니다. 잘해서가 아닙니다. 선한 일이 충분해서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제발 용서해달라고 매달렸기 때문에 용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여러분을 대신해서 처형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가 베푸신 용서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살아오면서 많은 상처를 받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거부당하기도 하고 배신도 당하고 여러 가지 고통을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수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생생하게 때로는 기억 날 수 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계속해서 고통을 당하며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이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왜 용서해야 합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보다 더 큰 용서를 여러분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베풀 수 없습니다.

둘째로 미운 감정은 그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계속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용서라고 하는 것은 양방향 도로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용서의 다리를 파괴해 버리면 한날 여러분에게 필요한 엄청난 하나님의 용서의 통로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죄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길을 파괴해 버리면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처에 초점을 맞추면 계속 상처를 준 사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 사람 생각을 하게 되면 여러분도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런 말 했잖아요? 시어머니 욕하면서 며느리 닮아간다고. 욕하면서 그런 시어머니를 떠올리게 되면 여러분이 그렇게 닮아간다니까요. 여러분이 의식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제가 젊고 멋있을 때 결혼해서 아들 둘 남겨놓고 외국으로 유학가게 되니까 집사람이 거창 촌에서 생활하는데 좀 도움이 될까 해서 자전거를 가르쳐 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운동장에 자전거를 가져가서 뒤를 붙잡고 가르쳐 줍니다. 자전거는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넘어지는 쪽으로 천천히 방향만 틀어주면 바로 균형을 잡습니다. 그래서 운동장에서 가르치는데 손만 떼면 우리 집사람은 두려워서 가는 데가 있어요. 기둥을 향해서 가는 거예요. 왜? 남편이 손을 뗐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에 거기 부딪힐까 걱정이 되니까 자꾸 그쪽으로 가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 잊어버려야 됩니다. 그 기둥이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탈만 하니까 내가 손을 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열심히 가르쳐서 떠났는데 뒤에 편지 받아보니까 한번은 큰아들 뒤에 싣고 작은아들 광주리에 담아서 시장 봐서 오다가 바구니에 있는 아들을 엎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제부터 잊어버리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들은 지금이 가장 좋은 때 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또 여러분이 마땅히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용서의 도로를 폭파 시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길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모든 기록들을 빨간 줄을 그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처리해 버렸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난 용서의 새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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