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생하는 샘물 (요 4:11-19)

  • 잡초 잡초
  • 640
  • 0

첨부 1


-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지난 한 해 동안 삼만오천명이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지구촌은 자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특히 선진국은 자살률이 점점 높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데이빗 홉킨스 박사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생명 에너지의 지수라는 것을 연구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생명을 버리는가? 외형상으로 자살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자살하는가? 그 이유는 생명에너지 지수문제라고 분석을 했습니다. 많은 실험조사를 거쳐서 발표한 이 이론은 여러 사람에게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살에 이르는 것은 생명에너지 지수가 고갈될 때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생명 에너지라는 것이 지수가 높아갈수록 활력이 있고, 용기가 있고, 행복감이 있고, 감사가 있는데 이 지수가 낮아지고 바닥나면 살았지만 죽은 사람과 방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극복하라

  그러면 어떤 경우에 이 생명지수가 가장 낮아지는가? 그것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을 때라고 분석했습니다. 자살은 배고프다고, 실패했다고, 몸이 아프다고, 사업이 망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자살을 합니다. 어떤 사고를 당한 그것이 자살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수치감을 느끼고, 그 수치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결국은 자살의 길로 간다는 분석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나도 모르게 많은 수치감을 안고 있습니다. 드러나면 아주 힘든 그런 수치를 감추고 가식하며 살아갑니다.
  요즘 의사들의 말을 빌리면 신체 콤플렉스를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키 작은 콤플렉스 때문에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의사가 보면 그만하면 됐는데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키를 더 키워달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저에게 키 작은 사람이 온다면 등소평을 연구해 보라고 권유하겠습니다. 등소평은 키가 150cm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대륙을 호령하고 온 세계를 호령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변강쇠 콤플렉스, 여자는 가슴 콤플렉스 이런 환자들도 많이 찾아옵니다. 또 하나 디지털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터넷 문화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급변하는 전자문화에 뒤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벤쳐 콤플렉스도 있습니다. ‘주변에서 벤쳐 사업을 해서 모두 몫 돈을 버는데 나는 무엇인가?’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가지는 것이 벤쳐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또 하나 아주 흥미 있는 콤플렉스가 있는데 디오게네스 콤플렉스입니다. 디오게네스는 희랍의 철학자입니다. 이 사람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방문했습니다. 왕이 이 철학자 앞에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폐하, 한 걸음만 비켜 서 주십시오. 햇빛이 가려집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디오게네스 콤플렉스는 왕이 디오게네스를 만나서 가지는 불만족을 말합니다. 디오게네스가 통나무집에 사는 가난한 철학자이지만 디오게네스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을 디오게네스 콤플렉스라는 말로 현대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공자의 콤플렉스입니다.
  우리 사회는 실패하고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도 많지만 성공한 사람들이 더 콤플렉스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성공했는데도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가지고 있으면서 못 가진 자들을 구박합니다. 성공을 했는데 콤플렉스에 빠집니다. 연예인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 올라가 보면 거기서 콤플렉스에 빠집니다. 사람은 좋은 집에 살면 행복도 배가 될 줄 아는데 거기에 따른 콤플렉스가 있고, 건강하면 다 만족할 줄 알지만 건강하기 때문에 콤플렉스를 겪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디오게네스 콤플렉스입니다.

  수가성 여인과 샘물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콤플렉스 덩어리입니다. 이 여인은 옛날 사마리아에 살았던 여인이 아니라 오늘 우리 이웃에 살고 있고, 우리 집안 식구일 수 있고, 더 구체적으로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안고 있는 콤플렉스를 보면 심각합니다. 이 여인은 낮에 물을 길러 혼자 나왔습니다. 여기에 이 여인의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한 낮은 40-50℃ 되는 더운 기온입니다. 한 낮에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물을 길러 나오지 않는 그 시간에 홀로 이 여인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사람에 대한 콤플렉스입니다. 사람이 밉고 사람 만나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사람 콤플렉스에 걸린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여자여, 내게 물을 좀 달라.” 예수님의 말에 이 여인은 그만 콤플렉스가 막 쏟아져 나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 이 말에 두 가지 문제가 나옵니다. 유대인에 대한 콤플렉스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많이 구박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여인은 “당신들이 유대인인데 어째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리고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합니까?” 남성 콤플렉스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너에게 물을 달라하는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물을 달라했을 것이고, 나는 생수를 너에게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인은 깜짝 놀랍니다. “당신은 물을 길을 그릇도 없는데 어떻게 나에게 물을 준다는 말입니까? 이 우물은 야곱의 우물인데 어떻게 당신이 물을 긷는다는 것입니까?” 동문서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도하신대로 말씀을 계속합니다.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토록 영생하는 샘물이 되리라.” 여인이 말합니다. “그런 물이 있으면 내게도 주셔서 이 우물에 물을 길러 나오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여인이 아직도 경계심을 가지고 그 물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남편이 없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지만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 이 여인은 남성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남자를 5명이나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남편도 유부남입니다. 남의 남편을 빼앗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성에 대한 복수입니다. 남성에 대한 복수심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남성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여자도 있지만 여자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남자도 있습니다. 이런 여자에게 걸린 남자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알고 보면 심각한 문제의 여성입니다. 갈등 덩어리입니다. 동네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으면서 인간을 미워하는 인간갈등이 있고, 유대인에 대한 갈등이 있고, 남자에 대한 갈등이 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하여 주님은 남편이 5명이나 있었다는 것과 지금 있는 남편도 정식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자 이 여인은 깜짝 놀랍니다.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보통 평범한 남자가 아니고 선지자입니다.” 그러면서 대화의 국면을 바꿉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들고 나온 대화의 주제가 바로 예배의 문제입니다.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 하고 우리 조상들은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어느 것이 옳습니까?” 이 말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유대인들이 금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 백성들이 혼혈족이라 해서 구박을 했습니다. 이 구박은 극심합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는 한이 맺혔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면서 잘난 척하고 우리를 구박했는데 당신이 선지자이면 말을 해 보시오. 어느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 때 주님이 예배에 관하여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하나님은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고 하면서 주님은 자신을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려고 지금까지 우물, 남편, 예배이야기를 다 하신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내가 바로 예배를 받을 하나님이다.” “나를 예배하라.” “내 이름으로 예배하라.” “내가 너희 조상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이다”라고 자기를 드러 내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남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28절에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으로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고 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아주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이 여인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물을 길어 가야 합니다. 그런데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에 뛰어 들어갔다는 것은 이 여인의 모습이 급변한 것입니다. 물을 길러 나오는 것이 자기의 주 업무였습니다. 그 주 업무를 잊어버리고 동네에 뛰어 들어가서 평소에 만나기 싫었던 사람들, 미워했던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그리스도에게 와보라. 그리스도가 우리 동네에 오셨다. 내가 만났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동네 사람들이 이 여인을 좇아 예수님께 많이 나아와서 믿더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갈등 덩어리를 안고 살았습니다. 이 여인은 민족적인 갈등, 유대인에 대한 갈등, 사회적인 갈등, 자기 자신에 대한 갈등의 콤플렉스 덩어리로 살았지만 이것을 깨트리고 메시야를 만난 후 사람이 돌변했습니다. 완전히 변했습니다. 이 여인의 속에서 영원토록 샘솟는 생명의 생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미움이 넘쳐나던 그 여인, 갈등이 넘쳐나던 그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원한 생수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자기 감옥을 탈옥하라

  사람은 자기 감옥을 탈옥해야 합니다. 많은 저술가,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들까지 이 문제를 똑같이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자기를 가둔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착의 감옥을 탈옥해야 합니다. 자기의 두꺼운 감옥을 깨치고 나오지 않고는 답이 없습니다. 이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도 자기 감옥 안에 갇혀 있었던 여인입니다. 그가 자기를 깨치고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있었습니다. 이것이 답인데 정말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순 중의 모순은 주인 아닌 사람이 주인 노릇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돈 집에 가서 주인처럼 행세하면 안 됩니다. 여름휴가 가서 남의 집에서 민박을 할 때 주인처럼 행동하면 안 됩니다. 주말농장에 가서 주인처럼 행동하면 안 됩니다. 주인 아닌 사람이 주인처럼 행동하는 것만큼 모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보다 더 큰 모순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살이의 모습은 그런 모순을 범하고도 정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비행기는 조종사 마음대로 떴다가 마음대로 앉는 줄 압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비행기는 이륙할 때부터 이륙하는 시간과 장소, 지점, 방향까지 전부 관제탑과 교신을 해서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비행기가 항로를 나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정해진 항로를 가야 합니다. 그리고 착륙을 할 때도 관제탑의 교신을 받아서 시간, 장소, 지점을 정확하게 착륙을 해야 합니다. 비행기는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떠서 자기 마음대로 착륙하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태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 때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창조자의 뜻이 아닙니다. 그 분의 뜻대로 살다가 그 분이 부르는 시간에 그 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정해진 길입니다. 인간의 배후에는 주인이 계십니다. 인생의 주가 계십니다. 그 주인이 우리를 보냈고, 살게 하시고, 사는 동안에 우리를 통해 영광받기를 원하고, 우리를 쓰기 원하고, 마음껏 쓰시다가 때가 되면 우리를 불러 가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 앞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주인처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주인의 영역을 범한 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나라는 감옥을 깨치고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구원의 주임과 동시에 내 삶을 주도하시는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주인 배후를 정확하게 하면서 내가 그 주인에게 충실한 하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외국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삽니다. 그 분들이 쓴 글들이 근간에 많이 나오는데 그 글속에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그 사람들은 정확하게 인식을 하고 우리 이야기를 해 줍니다. 우리는 우리를 잘 모릅니다. 그 분들이 이 땅에 살아보니까 한국인이 갖고 있는 장단점을 그들의 철학적 시각으로 볼 때 정확하게 평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진 좁은 식견에 의해서도 보면 한국인이 한반도에 태어나서 한국에서 교육을 받아서 살면 예수 믿는데 장애되는 의식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순종하는데 방해되는 어떤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는데도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 민족의식이 이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한국의식의 감옥을 벗어나라

  외국인들이 우리를 대하는데 제일 힘들어 하는 것은 수직적 가족의식입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중요시 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가족에게 돌아올 것, 나에게 돌아올 몫을 잘라서 사회에 나누는 일을 동시적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이 할 것을 다 해놓고 사회를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이런 의식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덜 먹어도 내 것을 잘라서 남에게 도와주는 사회성이 약합니다. 우리가 반성해볼 만한 일입니다. 외국인들이 우리와 살아보니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 가족의 것을 다 챙긴 다음에 남을 보려하니 타이밍이 맞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인들에게 있는 유교적 의식, 거슬러 올라가면 성리학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의식은 선비사상입니다. 우리는 선비하면 아주 품위 있고, 고상하고, 존경받는 신분으로 상당히 좋게 평가하는 면이 있습니다. 제가 글을 통해서 만나본 선비는 아주 힘든 사람입니다. 선비가 우리 교회에 등록하면 골치 아플 것입니다. 선비는 선비사상의 결정적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선비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일은 종들이 다 합니다. 일을 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선비가 되어야 합니다. 출세를 해야 합니다. 왜 양반이 되려 합니까? 일을 하지 않고 먹고 사는 것이 양반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행복 안에는 일을 하지 않고 잘 사는 그 사람을 최고 행복한 사람으로 봅니다. ‘저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아도 잘 산다.’ ‘저 사람은 이제 일이 다 끝났다.’ 이것은 선비사상입니다. 선비는 내일 먹을 것이 없어도 아주 태연해야 합니다. 냉수를 마시고 나가도 쇠고기국 먹은 것처럼 행세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비가 가지고 있는 체면문화입니다. 선비사상의 제일 중요한 것은 체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고도 이 체면의 감옥을 탈출하지 못하면 주님의 제자답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부 체면문화입니다.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선비사상의 장점이면서 단점입니다. 선비는 자기가 쓴 글을 상대 선비가 해독을 하지 못해야 최고의 글입니다. 내가 쓴 글이 다른 사람이 해독을 하지 못할 때 최고의 글입니다. 이와 같은 선비의식이 우리 머릿속에 가득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결정적인 방해물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 의식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입니다. 은혜 받고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거듭나서 우리가 신자이긴 하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아닙니다. 외국인들이 우리 한국인들을 가까이 대해 보려고 할 때 이  장벽이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여러분, 저는 그런 글을 읽으면서 내 자신을 체크해 보았습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를 대하기도 이처럼 어려운데 성령이 우리를 사용하실 때 얼마나 힘들어 하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리려고 할 때 얼마나 힘드실까? 우리가 이것을 극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너무 두꺼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 감옥을 탈옥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생수, 영원한 샘물, 우리 안에 넘쳐나는 생수의 근원이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실제로 보여주는 현상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사마리아 여인이 갖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갈등, 남자에 대한 갈등, 예배에 대한 갈등, 온갖 갈등으로만 넘쳐나는 여인이 아니라 예수의 생수가 넘쳐나서 그 적개심을 가지고 상종을 하지 않았던 동네 사람들 속에 뛰어 들어가는 여인의 모습이 하나님이 의도하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요즘 홍수가 나고 비가 많이 오는 계절입니다. 물난리가 나면 불행하게 물에 떠내려가는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구조대가 던지는 그 줄을 잡으면 삽니다. 구조대가 던지는 줄을 몸에 걸치면 살게 됩니다. 그러나 통나무를 안고 있으면 살 가능성이 없습니다. 통나무는 밧줄보다는 견고합니다. 듬직합니다. 나무를 안고 있으면 물에서는 듬직합니다. 그러나 통나무는 함께 떠내려가기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밧줄은 약해 보이지만 그 밧줄의 근원은 물 밖에 있습니다. 구조대가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밧줄을 잡은 사람은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함께 떠내려가는 것을 붙잡고 그것이 소망인줄 압니다. 거기에 행복의 전부인 줄 압니다. 심지어 거기에 영생이 있는 줄 착각을 합니다. 인간이 안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 건강이 몇 년 갑니까? 우리의 재물이 몇 년 갑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몇 년 갑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그렇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함께 떠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원한 소망이 없습니다. 거기에 영원한 생수가 없습니다. 함께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영원한 소망이요 밧줄입니다. 그 밧줄을 붙잡은 자로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밧줄을 놓친 사람은 어떤 것을 붙잡아도 함께 떠내려갑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인간의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늘도 함께 떠내려가고 있는 것을 붙잡고 웃고, 만족하고, 행복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지만 잠시 후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생하는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가 근원입니다. 이 샘물은 근원에서 흘러나와서 우리 가운데 넘쳐나는 샘물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영생하는 샘물이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