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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 소망 (벧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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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무 목사

  1899-1902년 사이에 일어난 ‘보아 전쟁’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죄명은 ‘낙담 시키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이 얼마나 강한지 왜 방어하기 어려운지를 설명했고, 이 도시는 필경 점령될 것이라고 떠벌리며 다녔습니다. 그는 총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군인들은 이미 의욕을 상실하고, 모두 무기력해졌으며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체나 개인의 소망을 훔쳐가는 것은 이렇게 큰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소망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요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해서 ‘자살 공화국’이란 불유쾌한 오명이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자살자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소망을 상실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내일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야할 목적이나 존재이유가 없기 때문에 쉽게 자살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소망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삶의 환경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 속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다시금 생의 용기와 도전정신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망일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핍박과 시련을 겪어온 시기는 초대교회입니다.

  주후 64년 7월 19일에 로마에 대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로마는 좁은 도로와 목조 고층건물이 많았기에 불길은 삽시간에 전시가지로 번져나갔습니다. 밤낮 3일간 계속되었습니다. 한 번 불이 꺼지지도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붙여져서 더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습니다. 로마시민들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에게 비난의 화살이 퍼부어졌습니다. 네로는 건축에 광신적인 정열을 가지고 있었기에 새로운 로마를 건설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화재를 일으켰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네로는 이제 자신을 향한 비난과 원성을 돌릴 대상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네로는 크리스챤들이 로마에 불을 질렀다고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입증이나 하듯 크리스챤들을 마구 잡아들였습니다. 잔혹한 네로는 시민들의 관심을 끌기위해 상상 할 수 없는 처형방법을 강구하였습니다. 크리스챤들을 송진 가운데 굴려서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불을 그 몸에 붙여서 정원을 밝히는 횃불로 사용하였습니다. 또 짐승들의 가죽을 벗겨 성도들에게 입힌 후 사냥개를 풀어놓아 그들의 손과 발을 찢게 하였습니다.


  이 맹렬한 박해 속에서 성도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죽음이 두려워 자신은 크리스챤이 아니라고 항변하기도 하였지만 대 부분의 크리스챤들은 그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음속에 분명하고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는 각지에 흩어져 신앙적 핍박 속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베드로서신을 보내어 그들을 격려하면서 끝까지 소망 안에서 승리할 것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특별히 성도들이 소유해야할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살아있는 산 소망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살던 시대와 지금 이 시대와는 분명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소망은 동일하게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위협과 계속되는 테러, 각종 재난과 가난, 그리고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혼란의 시대 속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도 ‘산 소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산 소망을 가질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이유 때문에 이 절망적인 시대에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까?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만큼 더 확실한 소망의 근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오늘 본문 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 3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죽음을 깨치고 부활하심으로 이제 우리에게도 영원한 부활의 희망을 선물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요 인류의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요 소망인 것을 믿으십니까?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4절은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심 사심을 믿을 진대...”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믿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산 소망을 가져야할 근거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준비된 기업 때문입니다.

  본문말씀 4절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여러분 우리의 기업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가끔 전화가 와서 받아보면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용인에 좋은 땅이 있는데 관심 없으세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끊습니다. “예, 저는 땅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땅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물론 우리는 살아가는 삶의 현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천국에 있어야 합니다.


  지난 아테네 올림픽에서 한국의 크리스챤 선수들이 참 선전하였습니다. 금메달 9개중 7개를 얻은 사람들이 다 크리스챤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이번 올림픽은 첫 금메달을 딴 유도선수 이원희의 감사기도로 시작해서 마지막 금메달을 딴 태권도의 문대성 선수의 감사기도로 끝났다고... 흘러내리던 땀을 닦기도 전에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매트리스 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돌리는 두 선수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 두선수의 기업이 이 땅에 있다면 그들은 금메달을 얻음으로 이미 모든 것의 절반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업은 금메달이나 세상적인 부를 획득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올림픽의 영웅이면서도 저 중국선교사가 되어 일생을 보낸 에릭 리델의 삶처럼 저 하늘에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기업을 바라보고 산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금메달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 영원하신 하늘의 기업이 아닐까요?

  하늘의 기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잘 지은 집도 20-30년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잘생긴 미남 미녀도 곧 쭈글쭈글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업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혀 손상되지 않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합니다. 누구도 손댈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하늘의 기업을 인하여 산 소망을 소유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산 소망을 가져야할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능력으로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 5절입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기 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함을 입습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단의 공격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세상의 온갖 위험에서 안전하게 돌보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안전하게 지키십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미국의 ‘수잔 앤더슨’ 부인은 시력이 나빠서 수술을 했는데 그만 수술이 잘못되어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매일 아내의 직장까지 인도해주었습니다. 1달이 지난 어느 날 저녁 남편이 아내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당신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오. 당신도 언제까지나 날 의지할 수 없으니까 이제부터는 당신 혼자 출근하시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몹시 섭섭했습니다. 배신감과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기 넘어지고 저기 부딪치면서 혼자 조금씩 적응해 갔습니다. 혼자 다니기 시작한지 보름쯤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기사가 앤더슨 부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부인은 참 좋겠어요. 아주 훌륭한 남편을 두셔서. 매일 한 결같이 부인을 보살펴 주는 군요” 라고 말입니다.
알고 보니 남편은 아내가 버스를 타면 같이 타서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아내가 내리면 같이 내렸고 회사에 들어가는 것을 본 다음에야 자기 직장에 출근해 왔던 것입니다. 아내보고는 혼자가라고 했지만 남편은 늘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날마다 소망가운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소망을 가질 근거는 믿음의 시련이 칭찬과 영광 존귀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 6-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인생에는 시험과 고난이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근심도 하고 걱정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삶에 비하면 잠깐에 불과합니다. 믿음의 시련 당함이 불로 연단을 받는 금보다도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 때문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과 금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금은 뜨거운 용광로의 연단을 거치면 거칠수록 불순물은 빠져나가고 더욱 순수하고 깨끗한 정금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도 동일합니다. 믿음도 연단의 용광로를 거칠수록 더 순결하고 아름다워져서 주님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의 벽시계에는 보통 추가 달려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벽시계를 바라보다가 ‘저 무거운 추는 왜 붙이고 다니는고? 저걸 떼어버리면 훨씬 더 가볍게 움직이지 않겠나’ 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계를 도와 줄양으로 무거운 추를 떼어버렸더니 시계는 더 이상 가지 않고 멈추어 섰습니다. 거추장스럽지만 시계는 추의 무게 때문에 갑니다.


  한 농부의 당나귀가 실수로 빈 우물에 빠졌습니다. 마침 물이 없었기에 죽지는 않았지만 워낙 깊은 우물이라 구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지혜로운 농부가 삽을 들고 흙을 파서는 우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당나귀는 슬프게 울며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우물에 흙이 쌓이면 쌓일수록 당나귀는 몸부림을 치면서 흙더미를 다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디딤돌로 해서 결국 우물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앞에 시련과 연단이 있다고 낙심치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더 영광스런 모습으로 그리스도 앞에 세울 것입니다. 오늘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 내일의 칭찬과 영광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잃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힘을 모아 착공하는 성전건축은 참으로 소망스런 일입니다. 저는 건축만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왜냐하면 건축은 우리에게 힘들고 어렵고 버거운 일이지만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유익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가 자라날 것입니다. 그리고 건축을 통해서 5110의 비전을 이루어나갈 것입니다. 지역사회 봉사의 센터로 서고,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하며 개척교회를 통하여 영광을 돌리는 교회로 발전해 갈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답고 보람된 일에 함께 힘을 모아 참여함으로 날마다 소망가운데 전진하는 영신교회와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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