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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영혼의 강자 (눅 22: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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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주님의 초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

모든 일에는 시작이 중요한 것처럼 마지막도 중요합니다. 시작이 잘못 되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없고, 시작과 과정이 좋아도 마지막이 나쁘면 허무한 것입니다.

요새 교회 세습으로 말이 많습니다. 많은 뜻있는 목회자들은 “교회 세습은 본인이 지난 세월에 했던 3-40년의 목회와 설교를 전면 부인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설교에서 “성도의 가치관을 가지라!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라! 돈과 주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욕심을 버리라!”고 했겠습니까?

그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성도들은 힘써 자기 것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목회자가 그 바친 것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고 아들에게 물려주면 그 동안 “바치라!”고 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바치라!”는 말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어제 한분이 전화를 하면서 “그렇게 세습하면 결국 기독교 교황 가계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교회생활에 회의가 생깁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떠날 때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떠날 때에도 그 초심(初心)과 사랑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구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에는 변질도 없었고, 포기도 없었습니다. 복음이란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대 우화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모아 인간을 창조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그때 ‘의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온갖 불의를 저지를 것입니다.” 그 말에 ‘성결의 천사’가 맞장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면 그들은 세상을 더럽힐 것입니다.” 그러자 ‘빛의 천사’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어둡게 만들 것입니다.”

바로 그때 긍휼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 때문에 세상이 불의해지고, 더러워지고, 어두워져도 저는 그 때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고, 그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결국 그 긍휼의 천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합니다.

사람을 대하다 보면 실망할 부분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 성찬에 담겨 있는 의미 >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만찬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베푸신 최후의 실물교육이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교훈과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성찬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1.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의미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에 거행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양의 피로 애굽에서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와 비슷한 개념으로 성찬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의식입니다.

본문 19-20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실 때 사례하시고 나눠주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례하셨다”는 말은 “감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성찬을 영어로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하는데, 그 말은 감사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성찬의 핵심적인 의미는 감사에 있습니다. 무엇을 감사합니까? 물론 범사에 감사해야 하지만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눠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것은 감사의 우선성과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감사는 축복 받은 후에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감사 표현을 해야 진정한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우선순위의 삶은 감사생활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 쓰다 남은 것을 드리지 말고 먼저 좋은 것을 구별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것이 생기면 자녀들에게 그것을 주고 싶습니다. 그처럼 좋은 것이 생길 때 자녀에게 주고 싶은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먼저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그 마음이 감사를 아는 마음입니다.

어떤 분은 헌금할 때도 은행에서 새 돈을 찾아 헌금하고, 새 옷을 사면 교회에 올 때 처음 입고 오고, 첫 월급이나 장학금은 하나님께 바칩니다. 물론 그런 자세가 약간 율법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자기처럼 하지 않는다고 “잘못되었다!”고 정죄하지 않고 그냥 본인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면 그것은 율법주의가 아니고 아름다운 헌신입니다. 그런 모습 속에 하나님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감사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가끔 보면 60이 넘으신 장로님이 40도 되지 않은 젊은 담임목사님을 잘 섬겨주는 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담임목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거의 모독에 가까운 말입니다. 그것은 담임목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앞세우는 삶의 표현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먼저 마음을 드리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주님께 충성하는 서약의 의미

본문 19절에서 주님은 성찬식을 행하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은 주님을 높이고 기리는 의식입니다.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성찬에는 주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 서약의 의미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찬은 주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충성 서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을 하면서 이렇게 다짐해야 합니다. “주님! 이제 주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고,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고, 주님 뜻대로 살고, 주님의 소명을 이행하기 위해 힘써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가끔 십자가와 헌신을 설교하면 두 가지 반응이 생깁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이제까지 그렇게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마음속에 감동을 느끼고, 영이 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헌신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반대 반응을 보입니다. 윤리와 상식을 설교하면 좋아하고, 만담처럼 재밌게 설교하면 즐거워하고, 축복을 강조하면 눈을 반짝이고, 위로하는 말씀을 들으면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헌신을 설교하면 “부담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씀씀이를 보면 주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사실 사람에게 부담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부담이 있다는 것은 “결코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는 가장 분명한 표식입니다.

영어로 부담이란 charge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어로 다시 충전해서 쓸 수 있는 제품이나 건전지를 rechargeable(다시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제품이라고 합니다. 다시 부담을 질 수 있는 건전지는 계속 쓰임 받지만 부담을 지지 못하는 건전지는 버려지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부담으로 생각하고 지지 않으면 축복의 자리에서 버림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헌신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신앙생활 하는 모습은 결코 축복된 모습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고 축복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를 위해 헌신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모든 열쇠를 주님에게 넘겨드리고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제 돈과 생명도 당신 것이고, 제 시간과 재능도 모두 주님 것입니다. 이제 제 인생의 열쇠를 주님께 넘겨드립니다. 주님, 저를 마음껏 사용하소서!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고, 성경도 읽고, 온갖 교회 봉사는 하지만 주님을 거절하고 문밖에 세워두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한 분은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서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찬송가 325장입니다.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

오늘날 가장 수치스러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름을 부르지만 헌신할 줄 모르고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두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항상 주님 앞에 우리 인생의 주도권을 넘겨드리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성도간의 아름다운 교제의 의미

오늘 본문 17절 말씀에서 주님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은 주님 안에서 한 몸이 된 성도들끼리 사랑의 교제를 하고, 서로의 필요를 나누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어떻게 하면 형제에게 더 사랑을 베풀까? 어떻게 내가 속한 사랑의 공동체에 힘을 보태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힘쓸까?”를 생각하고 공동체의 좋은 일원이 되기를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성도의 최대 축복은 평화에 있습니다. 어떻게 그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인정해주고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힘쓰면 됩니다(엡 4:3). 그런데 지금 교회 간에, 그리고 교단 간에 얼마나 벽이 높은지 모릅니다. 개신교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교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열고 벽을 낮추는 것이 선교입니다.

목회자들의 모임에 가면 초면에 대뜸 “어느 교파요?”라고 교단부터 묻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언어가 듣는 상대방에게 얼마나 거만한 태도로 보이겠습니까? 사람이 처음 만나서 대뜸 “어느 대학 출신이요?”라고 물으면 좋게 보이겠습니까? 성도는 다리를 놓는 도사들이 되어야지 벽을 쌓는 도사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뜻이 안 맞아도 항상 화합하고 소인은 뜻을 같이하면서도 항상 불화한다.” 진짜 큰 사람은 작은 것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다. 다양성은 일치의 한 표현입니다. 보수파와 진보파는 서로 “내가 부족한 분야를 그분들이 메워주고 있구나!”고 서로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와 조금만 맞지 않아도 모든 관계를 산산조각 만들고 원수처럼 행동하는 모습은 복된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그 엄청난 차이까지 이어주려고 선교사의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큰 마음을 가지고 큰 생각과 선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교하는 마음은 자기중심적인 나바론의 요새를 무너뜨리고 사랑의 하늘 다리를 놓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선교해야 합니다. 선교하다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보다 큰 가슴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CMA의 한국인 2호 선교사인 몽고의 임준호 선교사님은 첫째 아들 이름을 ‘선교’라고 지었습니다. 사실 우리들 모두의 영적인 이름도 ‘선교’가 되어야 합니다.

신령한 척 하는 사람은 “이것은 안 된다. 저것은 안 된다”고 구별하면서 자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진짜 신령한 사람은 하늘같은 마음을 가지고 땅을 안고 성화시킵니다. 남편이 방황할 때 신령한 것처럼 행동하는 아내는 “저게 남편이냐? 사단이지!”라고 남편을 ‘사단의 하수인’처럼 몰아가지만 진짜 신령한 아내는 남편을 ‘더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볼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평화의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성공한 사람은 돈과 명예를 얻은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어도 사방에 원수를 만들고 평화를 만들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낳는 것’입니다.

< 축복과 저주는 자신이 결정합니다 >

요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벌까?”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남을 섬길까?”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겸손히 남을 섬겨줄 때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3권, 즉 영권(靈權, 영적인 권세)과 인권(人權, 인적인 권세)과 물권(物權, 물적인 권세)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 바로 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주님은 지극히 큰 일에서도 위대하셨고 지극히 작은 일에서도 위대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기 발만은 씻겨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무 황송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발에 무좀이 많아서 그랬을 것이라는 유머도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시는 장면을 생각하면 우리가 이제까지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를 새로이 깨닫게 됩니다. 불신앙은 교만한 자리에서 영광을 느끼고, 신앙은 겸손한 자리에서 영광을 느낍니다.

어느 날, 성 프랜시스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프랜시스는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한번만 진실로 쳐다보게나. 그러면 인간은 결코 교만할 수가 없네.” 예수님은 위대한 것은 평범한 것에 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자랑이 넘치면 예수님과 점차 멀어지는 증거이고, 우리에게 사랑이 넘치면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발을 씻겨주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주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축복해주셨습니까? 이웃의 발을 씻겨주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습니까? 이웃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주님의 은혜를 갚는 방법입니다. 누가 저주 받고 누가 축복 받습니까? 그것은 관상쟁이나 점쟁이가 결정하지 않고 자신이 결정합니다. 이웃을 짓밟으면 저주 받고, 이웃을 섬겨주면 축복 받습니다.

19세기에 다윈은 ‘적자생존’을 주장하며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만약 그 말이 맞으면 산에는 온통 사자와 호랑이와 이리떼들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에는 온통 다람쥐와 토끼들만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남을 잡아먹으면 결국 저주 받아 사라지고, 남을 섬겨주면 결국 축복 받아 살아남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면 점차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힘을 남과 나누면 점차 풍성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힘이 많은 것이 아니라 가진 힘을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없어도 그 힘을 남을 위해 사용하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혼의 강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강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영혼의 강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지게꾼’이 되어 남의 짐을 져주면 신기하게도 내 인생의 짐은 훨씬 가볍게 될 것이고, 우리가 ‘영적 의사’가 되어 남의 상처를 싸매주면 신기하게도 내 인생의 상처는 훨씬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축복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는 ‘영적 다리’가 되어 주면 신기하게도 내 인생의 고독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꺼운 이기심의 벽을 깨고 이웃을 위해 지금보다 조금 더 시간과 물질을 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이웃에게는 지나치게 인색하지만 우리는 이웃에게는 조금 더 관대하고 나 자신에게는 조금 더 인색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따뜻한 마음과 말 한 마디라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다니는 한 대학부 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자살 이유는 “교회에 나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외롭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런 고독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끼니를 잇기 힘든 사람들이 몇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면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찾아 도와주어야 합니다. 방파제를 막고 있는 이름 없는 돌 하나라도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줄 때 불행의 거센 급류가 우리 인생으로 흘러들어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기적을 추구하는 인생보다 연약한 자를 찾아 수고의 손길을 베푸는 인생이 더 기적적인 삶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이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일 예배만 드리고 그냥 지내지 마시고 “내가 줄 것이 없나, 베풀 것이 없나?”를 생각하며 주위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시간과 물질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머니가 비어서 줄 것이 없으면 따뜻한 말 한 마디, 따뜻한 미소 하나라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선교사이셨던 주님을 따르는 작은 선교사들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존재였지만 주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 형제 사랑을 일깨우기 위해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을 통해 사랑의 떡과 잔을 나눠주셨습니다. 오늘 성찬 예식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다시 한번 주님께 충성을 다짐하고, 겸손히 이웃을 섬겨주기로 결심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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