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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마 9:35 - 마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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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 이미지와 '추수' 이미지>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12 제자들을 뽑으셔서 선교의 귀중한 사명을 위임하셨다는 말씀이 뒤이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나가 주님을 위해 대신 일할 일꾼들을 오늘도 찾으십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여러분들도 주님께서 귀하게 쓸 수 있는 일꾼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본문 37-38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주님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첫째로,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일꾼들이 턱없이 부족해서 일손이 크게 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로, 농장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많이 보내달라고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추수라는 것은 당연히 상징적인 이미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추수'는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추수'라는 영적인 비유가 부정적으로 쓰여졌을 경우 세상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추수 때는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마지막 때가 아닙니까?
그리하여 농부들이 곡식에 낫을 대서 신속하게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세상 끝 날이 될 때 영혼의 추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심판을 서두르신다는 것이지요.
마 13: 30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 때의 추수 때는 분명히 가라지와 알곡을 가려내는 심판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추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하신 적도 있습니다.
추수는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죄와 죽음 속에 허덕이는
인생들이 구원을 받는 기쁨의 날이라는 것이지요.
추수 때가 농부들에게 큰 축제요 기쁨의 시간이 되듯이 복음이 전파되는
그 시간 역시 큰 축제요 기쁨의 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추수는 낫으로 가라지를 베듯이 영혼을 심판하는 시간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축제와 기쁨의 시간이 됩니다!

여러분,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추수' 이미지와 함께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이미지가 나오는데 바로 '목자' 이미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추수 이미지는 목자 이미지의 결과로서 언급된 것입니다.
이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세상을 보니 추수할 때가 다 되어서 일꾼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흔히 예수님을 양들을 돌보는 목자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 10: 11은 예수님을 양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35-36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목자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유대의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온 세상을 돌며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대하여 힘써 교육하셨다는 것이지요.
둘째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열심히 전도하셨다는 것이지요.
셋째로, 온갖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
봉사하셨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예수님의 3대 사역은 교육, 전도, 봉사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무리를 민망히 여겨 추수꾼을 부르시는 예수님>
자,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교육, 전도, 봉사의 사역을 하실 때
예수님의 태도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36절에 보면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다 빠져 있었기 때문에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세상에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싸매시는 중에
너무나 안타까운 사람들을 많이 보시고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세상을 보세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양은 본래 어리석은 짐승인지라 목자의 도움 없이는 꼼짝없이 죽고 맙니다.
시력이 약해서 몇 미터 앞을 볼 수 없으니 목자가 도와주지 않으면
천길 낭떠러지로 쉽게 추락하고 맙니다.
목자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맹수의 밥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다녀보니 이렇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위험하고 불안정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깊은 연민의 마음을 품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홀로 이 불쌍한 무리들을 다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들이 너무 부족하구나!" 하면서 탄식하셨던 것이지요!

세상에 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보고, 전도해보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다 보니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에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일꾼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길잃은 양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세상죄 한가운데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탄식하셨습니다.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일꾼이 너무 부족하구나!"
"하나님, 추수할 일꾼들을 많이 보내주소서!"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탄식하시고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부르셔서 세상에 내보내셨습니다.

여러분, 10: 1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우선 급한 대로 12제자들을 부르셔서 세상으로 파송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을 그냥 세상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권능을 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교육과 전도와 봉사를 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에서 똑같은 일을 하기 원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부르심은 오늘도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12제자들을 뽑아 세상에 추수하는 일꾼으로 내보내신 예수님은
오늘도 일꾼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오늘 우리 시대나 사람들은 여전합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갈 바를 모르고 위태위태하게 삽니다.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이 필요합니다!
추수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추수꾼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런 추수꾼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이제 저는 감동적인 이야기 한 편을 들려드림으로서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고이라는 일본 선생님이 어느 고등학교의 1학년 반의 담임을 맡아 출석을 부르는데
한 학생의 이름은 조금 특이한 방법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야마다 다로'라는 학생의 차례가 되면 꼭 '다로'라는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성을 부르는데 다로 한 사람만 '야다마'라는 성 대신에
'다로'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지요.

수업 첫 시간에 다로는 물론이고 학생 전체가 놀랐습니다.
처음에 다로는 선생님을 오해했습니다.
"혹시 내신 기록부에 나에 대해서 좋지 않은 내용이 쓰여있어서
내 이름만 따로 부르는게 아닌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1학기가 지나고 2학기가 지나도 고이 선생님의 '다로 이름 부르기'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로는 자기 이름만 다르게 부르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어서
어떨 때에는 반항하는 마음으로 아예 대답을 안 하거나 퉁명스럽게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이 선생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다로만 성을 부르는 대신에
"다로야!" 하면서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이 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런데 꼭 다로가 면회 오기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로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병원에 갔습니다.

고이 선생님은 머리카락이 다 빠진 채 아주 수척한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 계셨습니다.
다로를 발견한 선생님은 기쁜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여셨습니다.
"다로야, 너 고등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내가 다로라고 불러서 싫었지?
이제 내가 왜 너만 성을 부르는 대신에 이름을 부르게 되었는지 설명해주마.
나는 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쓴 작문을 읽은 적이 있단다."

그 순간 다로는 자기가 썼던 작문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다로의 부모님은 모두 언어와 청각 장애가 있어서 말도 하지 못하고 전혀 듣지도 못했습니다. 어느 날 다로가 같은 반 친구와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로는 자기보다 덩치가 더 큰 상대를 엎어 뜨려놓은 채
막 주먹을 휘두르려고 하는 순간 친구로부터 가슴을 후비는 말을 들었습니다.
"야, 니 엄마 아빠 벙어리지? 귀머거리지?
야, 너 한번도 니 부모님이 니 이름 부른 거 들은 적 없지?
개나 고양이도 다 이름이 있는데 너는 한번도 니 부모님으로부터 이름을 들은 적 없지!
앞으로도 쭉 니 이름이 불려질 일은 없을 거야!"

이 말을 들은 다로는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손에 힘이 쭉 빠져서 그 친구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
"부모가 이름을 불러준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다로의 빰에는 닭똥같은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집에 돌아와 한번도 그러지 않았는데 아빠를 노려보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아빠! 내 이름 좀 불러 봐요!
부모라면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당연하잖아.
지난 번 운동회 때 아이들이 달리기하다 넘어졌을 때
여기저기서 부모님이 아이들 이름을 다 불렀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넘어졌을 때에는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단 말이야.
아빠,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발 내 이름 좀 불러주세요! …
이름도 불리지 못하는 나같은 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다로는 아버지를 붙들고 몸을 흔들면서 서럽게 목놓아 울었습니다.

다로는 이 이야기를 작문으로 썼는데 우연히 고이 선생님이 읽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아들이 다로와 초등학교 동급생이었기에 이 글을 읽고 감동을 받게 된 것이지요.
"아, 언어와 청각 장애가 있는 부모와 자식간에는 이런 아픔이 있겠구나."
선생님은 다로 가족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고이 선생님은 자신이 맡은 학생들 가운데
'야마다 다로'라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 기뻤습니다.
"다로야, 이럴 때 너의 아버지였다면 너의 이름을 어떻게 불렀을까?
나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로, 다로' 하고 네 이름을 불러왔던 것이란다."

선생님의 말을 들은 다로는 자기도 모르게 오열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 선생님 그랬군요.
왜 진작 말해주시지 않고요.
전에 버스 타고 견학 갔을 때였어요.
출발하기 전에 손목시계를 가리키면서 '다로야, 이제 갈 시간이다.'
저는 그 때 제 아버지가 제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 같아 정말 기뻤단 말이에요."
다로는 선생님이 얼마나 자기를 아끼고 사랑했던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고이 선생님은 결국 다로가 문병을 한 지 사흘만에 돌아가셨지만
선생님이 "다로야"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셨던 따스한 목소리는 잊을 수 없었습니다.
다로에게 고이 선생님은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신 큰 스승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처럼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들이 너무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셨듯이 오늘 또 다시 추수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추수꾼들이 되십시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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