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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곤고함에서 벗어나라 (롬 7:2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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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살론을 써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고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꽃과 같은 젊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입니다. 그는“삶은 더러운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인간은 태어난 것보다는 태어나지 않음이 좋고, 태어난 이상은 하루빨리 죽는 것이 좋다. 자살이야 말로 하나님에게 거역할 수 있는 최대의 특권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최대의 방법인 자살을 선택하라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자살을 최대의 특권이라고 주장했던 그는 28년 동안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았습니다. 그 이유 그곳이 당시 유럽을 강타했던 콜레라의 위험에서 벗어난 가장 안전한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삶은 더러운 것이요 하나님을 대항하는 최대의 특권이 자살이라고 말하면서 자살을 권한 쇼펜하우어는 1788년에 태어나 1860년에 죽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주장과 달리 그는 72살까지 안전한 곳을 건강하게 장수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말고 행동이 일치되지 않은 거짓된 인생입니까?

  왜 우리 인생이 곤고한 것일까요? 왜 삶에 재미가 없고 절망하는 것일까요?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신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했습니다. “사람의 일을 미처 모르거늘 신의 일을 내 어찌 알리요?” 다른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죽음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했습니다. “생을 아직 모르거늘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공자는 죽음도 알지 못했고, 삶도 알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선생이라는 공자는 결국 자신에 대해 모르는 인생을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로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부와 명예를 누렸던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 빈 전구처럼 공허하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사냥총을 머리에 대고 쏘아 자살했습니다. 이렇게 부와 명예를 누린 사람이 왜 인생이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 빈 전구처럼 공허하다고 한 것일까요?

  왜 우리 인생은 재미가 없는 것일까요? 왜 고독하고 힘이 들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슬프고 외로운 것일까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실존 철학이라는 철학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니이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외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말하기를 “고독은 어차피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니 피하려 들지 말고 사랑하라. 고독은 나의 고향이다”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결국 인생을 방황하고 인간에게 임하는 외로움과 고독과 고뇌 속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다가 정신병자가 되어 미쳐서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었던 믿음의 사람 파스칼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팡세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아! 인간이여, 네가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길을 네 자신에게서 아무리 찾아 봐야 소용이 없다. 네가 가진 모든 빚은 네 자신 속에서는 진리도 어떤 선도 찾을 수 없음을 밝혀 줄 뿐이다. 철학자들은 그것을 찾아 주겠다고 너에게 약속하겠지만 그 약속을 지킬 수 없다. 그들은 너의 참된 선이 무엇이며 너의 참된 갈구함이 어떤 것인지도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 너의 비참함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너의 불행함에서 구원될 수 있는 방책을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만일 네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너의 선한 본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팡세 430).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인생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사는 것이 재미있고, 의미가 있고, 기쁘고 행복하며 살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삶이 곤고하고, 외롭고, 힘들고 지치고 피곤하며 삶의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 짧은 말씀 속에서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믿고 있습니다. 인생의 삶의 참된 의미와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 자리를 떠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왜 있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깨닫고 복된 삶을 살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7장의 본문은 우리의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를 아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기록한 바울이라는 분은 인생의 초기에는 실패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라는 분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스데반 집사님을 죽일 때 증인으로 가장 먼저 돌을 던져 사람을 죽이는 일에 참여한 살인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참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라는 종교에 속해서 경건한 믿음 생활을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을 믿는 하나님을 누구보다 더욱 열심히 믿었지만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으면 기쁨이 와야 하고, 그 마음에 사람을 미워하는 미움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서도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분들을 돌로 쳐 죽이는 큰 죄악 된 일에 참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미워해도 되는 것일까요? 사람을 미워해서 사람을 돌로 쳐 죽여도 되는 것일까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다녀도 되는 것일까요?

  그는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그것이 참으로 바른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것이 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4절과 15절 말씀을 통해 바울이라는 분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그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도저히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는 정말 착하게 살고 싶고, 기쁘게 살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고, 자식들에게 아내에게 좋은 남편 아내가 되기를 원하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정말 바르게 살고 싶지만 마음의 뜻대로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계속 미워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하면서도 잊혀 지지 않고 분노가 쌓이더라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에 보면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해서, 내가 정말 선을 행하고 싶지만 이상하게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분노하며, 마음에 이상한 죄 된 생각으로 가득 찬 나를 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이 얼마나 힘든 인생이 되겠습니까? 마음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일치되지 않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두 마음으로 살아가는 힘이 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 마음에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본성적으로 선을 행하려고 하지만 내 속에 죄가 나를 붙들고 “안돼, 가지마!”하고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얼마나 선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충성된 하나님의 일군입니까? 그런 다윗이 강간범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다윗이 비겁하게 남의 뒤통수를 처서 죽인 야비한 살인자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는 자신의 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강간하게 되었고, 그의 남편을 야비한 방법으로 전쟁에 내보내, 죽이게 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렇게 된 원인을 고백하는 가운데 시편 51: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은 자기가 착하고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알고 봤더니 너무나도 죄로 가득한 추잡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내 속에 원래 죄가 있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 글을 기록한 바울은 자신이 한 가지 도를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 도는 내가 마음으로는 진실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나에게 그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이 계속해서 내 속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 전쟁은 내 힘이나 의지나 내가 가진 지식이나 양심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있는 그런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영적인 전쟁으로 죄 와의 전쟁이요 그 죄의 괴수인 마귀와의 전쟁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내 속의 변화가 없이는 이길 수 없는 백전백패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아는 순간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내 속에 있는 나를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변화 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그는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겠느냐? 이 인생의 곤고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겠느냐?”라고 소리쳐 외쳤던 것입니다.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주 훌륭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인류 최초로 정신분석학을 만든 오스트리아의 의사인 프로이드입니다. 그는 골초로서 아주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사는 그의 심장도 나쁘고 건강을 위해 흡연을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의사인 그는 흡연이 얼마나 자신의 몸에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생 동안 담배를 끊지 못하고 참으로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과도한 흡연으로 턱뼈 암에 걸려 무려 자신의 턱을 35번을 수술을 받아야하는 고통을 당했고, 그리고 마침내 아래턱을 완전히 들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정신분석학자요 의사였지만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담배의 유혹에 붙들려 고통을 받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의지력으로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로 행복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는 우리가 가진 어떤 의지보다 강한 힘이 있습니다. 다윗도 죄악의 유혹의 올무에 걸려 고통당했고, 오늘 본문의 바울도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어 구원할 수 있겠는가?”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나 바울이 니이체나 쇼펜하워나 혹은 헤밍웨이처럼“오히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사망의 사람이다. 나는 죄의 사람이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허무하고 의미가 없는 것인가?”이렇게 외치다가 그 인생들이 끝난 것일까요? 그 대답은 “결코 아니다”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바울도 곤고한 인생이었고, 다윗도 곤고한 인생이었고, 철학자들처럼 부르짖고 고통당하고 인생의 고독 외로움과 삶의 의미를 찾아 고통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로마서 8:37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승리의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 7:25절에는“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정말로 곤고한 인생이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내가 이 모든 일을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승리의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는 “내 인생은 이렇게 저렇게 살아서 참으로 곤고하고 힘들고 고독한 삶을 과거에 살았지만 이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인생의 곤고에서 벗어나 감사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기쁘게 되었습니다.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즐겁게 되었습니다. 왜 내가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바울의 곤고한 인생을 감사의 인생으로 바꾸고 행복한 인생으로 바꾸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모르겠지만 한번 만날만하지 않습니까?

  한국 초대교회사에 보면 김익두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목사가 되기 전에 깡패였습니다. 그는 어려서 부모님을 일찍 잃고 사기 당해 사업에 실패하자 깡패가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지독한 깡패였는지 장날이 되면 사람들이 시장에 오다가 성황당을 들려“오늘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빌 정도였습니다. 그의 변명은 “김내라”였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날 평양 거리를 지날 때 서양 여선교사가 그에게 전도지를 전해 주며, “예수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뭐 나 보고 양 귀신을 믿으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전도지로 코를 풀려고 했습니다. 이 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그 여 선교사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라고 했고, 그 말에 그는 분노하여 심한 폭행과 폭언을 행사했습니다. 집에 와 주머니를 뒤져보니 이상한 것이 나왔습니다. 자신의 주머니 속에 구겨진 전도지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전도지에는 "인생이란 무엇이냐?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깡패 김익두는 '세세토록'이란 글자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세세토록'이란 말은 '영생'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까? 그날부터 그의 머리에는“세세토록”이라는 말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 여자 선교사에게 폭언과 폭언을 행한 것이 이상하게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큰 죄책감이 되어 밤을 새우며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 죄책감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돈을 빼앗을 때와는 다른 견디기 힘든 죄책감이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친구 박태후라는 사람의 인도로 교회로 부흥회로 인도함을 받았고, 그곳에서 미국 선교사 스왈렌의 설교에 감동하여 1901년 세례를 받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0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성령 체험을 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예수를 믿은지 2개월 만에 확실히 성령을 받았다. 나는 눈물 속에서 얼마 동안 통회의 생활을 했다. 드디어 나는 완전히 세상과 작별하게 되었고, 전에 좋아 하던 것과 시원히 영원히 결별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남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이 생기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성령의 체험을 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김익두는 죽었다”라는 부고장을 보낸 것입니다. 순식간에 평양 시내는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부고장을 받은 사람은 고함을 치며 좋아 했습니다. 평소에 얼마나 못된 짓을 했으면 평양 시내가 축제의 자리가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죽었다는 김익두가 평안 시내에 얼마 후에 나타난 것입니다. 더욱이 손에 성경책을 들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고 돌아다는 것입니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들을 부고장으로 놀렸다는 이 사실에 너무나도 분노해서 그의 얼굴에 구정물을 끼얹어버렸습니다.  순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조용해진 사람들을 처다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을 툭툭 털고는 물을 끼얹은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야.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면 당신 오늘 내손에 작살났어.”그렇게 말하고 예수 믿으라고 권하였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성령님의 은혜를 받으면 누구든지 새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내 속에 있는 악한 죄를 누르고, 내 마음의 악한 생각을 누르고 인생의 곤고함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육신의 삶을 살던 사람도 변화 될 수 있습니다. 깡패도 변화되고, 살인자도 변화되고, 도적도 변화됩니다. 하물며 우리들도 변화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도 그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력한 죄의 욕망과 육신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는 태풍보다 강하고 어떤 토네이도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멸망시키고 분노하게 만들고 살인하게 하며, 시기와 분쟁과 고통 속에 빠뜨리는 멸망의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간단하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들이 인생의 곤고함에서 벗어나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착하게도 살아 보았고, 율법을 지키며 불교나 로마 가톨릭처럼 제사 중심의 삶을 살아 보았지만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인생이 곤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마음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고, 정말 예수 그리스도 만이 참된 길이요 생명이요 참된 진리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인생의 곤고함에서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 가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시 말해 그는 “옛사람은 죽었다. 죄의 사람은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달리실 때 이미 죽었다”라고 선언 한 것입니다. 우리도 죄의 사람이 죽기를 원합니다. 옛 사람이 죽고, 인생의 곤고함에서 벗어나 행복하고 복되고 기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감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은 불평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의 인생은 곤고함과 갈등과 인생의 고독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시인인 앤디 앤드류스라는 분은 말하기를 “감사하는 마음에는 절망의 씨앗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바울 선생은 곤고한 몸에서 자신을 변화 시킨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이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곤고한 인생에서 구원하시고,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지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가 넘쳐 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용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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