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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한 알의 밀알처럼 (요 12: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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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아니고, 단순히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에 일어난 돌발 사건도 아닙니다.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고난당하시기 몇 달 전부터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죽임당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사지(死地)를 향하여 걸음을 옮기신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사정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것으로 자신을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도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어둡고 축축하고 차디찬 흙에 파묻혀서 죽고 썩으면 어떻게 될까요? 놀랍게도 그 썩은 씨앗 속에서 새 생명이 돋아납니다. 그리고 그 밀 이삭이 자라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많은 결실을 맺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 생명의 원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한 알의 밀알처럼 자기를 희생하셨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하신 대로,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습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 것인데, 앞으로 몇 십 년 후에는 사람의 수명이 백세를 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물론 대단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백세를 살더라도 죽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노아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보통 500년 이상 길게는 천 년 가까이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 뒤에는 똑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가 〇〇〇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좀 더 오래 살기도 하고, 좀 더 적게 살기도 하지만, ‘죽었더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죽음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병이나 노쇠나 사고로 죽지만, 아주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죽는 죽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도쿄 신오쿠보 역에서 전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고 숨진 이수현 씨와 같이 순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롬 5:7) 라고 했듯이, 간혹 남을 위해 죽는 사람들이 있어 사람들의 칭송을 받습니다. 전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이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위험한 상황에 뛰어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지, 위험에 처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집행을 앞둔 사형수를 대신해서 죽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죽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사람 가운데서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에 불과하므로 결국은 자기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원리가 예수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8절에 이르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대속물이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바쳤던 속죄제사에서 비롯된 말로서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제물로 바쳐진 짐승을 가리킵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에 의해서 송아지나 염소나 어린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 때 이 짐승이 희생당함으로써 제물을 바친 사람의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때 제물로 바쳐진 짐승은 순전히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실상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멸망 받을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사람은 누구나 다 불난 집 안에 갇혀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또는 망망대해에서 조난당한 것과도 같습니다. 죽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이해하려면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비극적인 운명에 대하여 올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영적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며, 스스로 의로운 줄로 생각합니다. 그 결과, 구세주의 필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기독교인 가운데도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에 대하여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사건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한갓 종교적인 설화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으며 지금도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 때문에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셨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 각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예수님의 죽음이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그 죽음이 아무리 고귀할지라도 다른 이타적인 죽음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만족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일전에 어느 신문에 보니,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해 주었으나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의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은 자기의 부주의한 행동이 부끄러워서  그랬을 것이지만, 아무리 좋게 보아줄지라도 그것은 그런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취할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수현 씨처럼 누가 그를 구출하고 목숨을 희생했다면 그 사람은 배은망덕한 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목숨을 희생하셨다는 말을 듣고서도 무덤덤하다면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교인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확실하다면 주님의 죽음에 대하여 덤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독교 신앙은 타종교들과 같이 단지 신을 섬기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싫어합니다. 이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당하실 죽음은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것도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모든 추악한 죄를 다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시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시는데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르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신 구세주의 고통을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피하려고 하셨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안전한 길을 택하지 않으시고 뻔히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앞의 기도에 이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는 기도를 올리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친히 죄인의 신분이 되셔서 심문을 당하셨고, 채찍질을 당하셨으며, 가시관을 쓰셨고, 드디어는 손발에 대못이 박혀서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옆구리에 창을 받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8).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한 알의 밀알처럼 철저히 자기를 희생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으신 열매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단지 머리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찌 보면, 인격적인 관계라는 표현조차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도적은 마귀를 가리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로서 그가 하는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짓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말에 속아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범죄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삶은 마귀에게 철저히 도적질 당하고 파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마귀는 죽이는 것은 명수지만 살리는 일을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따라 살면 결국 죽는 것으로 결말이 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처럼 마귀에 의해 파괴되고 사망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를 믿는 우리의 모든 죄가 청산되었습니다. 우리를 얽어매었던 죄의 사슬이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되, 주홍 같고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양털 같이 희게 해 주시며(사 1:),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우리 죄를 기억조차 아니하십니다(사 43:25).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함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화목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4장에 보니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또는 아들이 되었다 함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예한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에 참예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성경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셨음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바로 이점이 기독교가 타종교들과 다른 점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가 도달하는 최상의 상태를 열반이라 또는 적멸(寂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적멸은 존재의 소멸을 의미할 뿐입니다. 존재가 없어짐으로써 번뇌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번뇌를 없앨 수 없는 인간이 궁리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적멸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번뇌의 원인인 죄를 없애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셔서 누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과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함께 동일한 생명에 참여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지가 포도나무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진액을 공급받는 한 가지는 포도나무와 일체를 이루며, 그리하여 포도나무의 실과를 맺습니다.

밀과 밀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거기서 싹이 나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밀이삭이 있으므로 열매가 존재합니다. 이 때 밀이삭과 열매는 동일한 생명에 참여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주 안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본받아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 역시 주님을 본받아 자기를 희생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말씀하시기를 “1)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고 하셨습니다.

과수(果樹)를 선별하는 기준은 나무의 크기나 생김새가 아니라 그 나무가 얼마나 좋은 과실을 많이 맺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우리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느냐를 보십니다.

유리구슬이나 돌멩이는 아무리 땅에 심고 물을 주어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밀알은 땅에 심고 물을 주면 얼마 지나면 싹이 나옵니다. 밀알 속에 있는 생명이 움터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결심을 해도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7절로 8절에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착한 행위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으면 선한 열매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선악의 최종 심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본받아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여러분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열매 없이 지내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 우리가 자기 희생을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밀알 속에 생명이 있더라도 땅에 떨어져 죽기를 겁내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자기의 뜻과 생각과 고집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의 뜻을 버리고 순종하기만 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고 아낍니다. 그래야만 오래오래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와는 거꾸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대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120년 전에 벽안의 선교사들이 보장된 장래를 포기하고 이 땅에 와서 그들의 젊음과 꿈과 힘을 다 바쳐 복음을 전한 결과입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초창기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자기들의 나라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고, 신식 학교와 병원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그들의 희생 위에 맺힌 열매와도 같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을 구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먼저 믿은 가족의 희생을 통해서 가능하게 됩니다. 이는 교회에도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목회자를 비롯해서 온 성도님들이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처럼 자기를 희생할 때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 권리를 다 지키고, 내 자존심 다 지키고, 섬김을 받기만 하고 섬길 줄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결국 그 생명조차 잃어버리고 맙니다. 반면에,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데 힘쓰는 사람은 그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선한 감화를 끼쳐서 바른 길로 인도하며 그 자신도 생명이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주님을 섬기지만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는 싫습니다. 내 생각대로 살렵니다.” 그래서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묵묵히 따라가는 것, 또한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사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면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참말을 해야 하고, 저들은 불의와 타협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정직하게 행하다 보니,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도 묵묵히 섬김의 삶을 실천합니다. 성도들을 섬기되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섬깁니다. 그리할 때 그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40)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모든 행동이 주님을 위한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람은 누구나 살기를 원하지 죽기를 원치 않으며, 섬김 받기를 좋아하지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듯이 먼저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그런 것에 구애받지 말고 이 길이 영생의 길이요 주님을 따르는 길이므로 순종해야 합니다.

프란체스코가 기도하였듯이,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가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마다 주님을 본받아 한 알의 밀알처럼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선한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 아버지의 귀히 여김을 받고 영생에 참예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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