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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짝사랑 (롬 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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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짝사랑 (롬 5:5-11) 

헨리 나우웬이라는 심리학자이자 영성신학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처받은 치유자’의 저자로 잘 알려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학자이기도 하지만 행동하는 신앙인으로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의 예일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던 어느 날 자신이 대학교수로 생활을 하며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를 반문하면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고 실천하기 위하여 학교 강단을 떠나 재 3세계 국가인 남미의 페루 빈민가로 들어가서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참 자유함과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 대학에서 다시 강의를 하며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의 안식을 느끼지 못해 다시 강단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정신박약 장애자 공동체 ‘라르쉬’정신장애자들의 공동체에 들어가서 199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난 받는 이웃들을 위하여 그의 전인생을 바친 위대한 하나님의 삶을 산 영적 거인이 되었습니다.

한 그룹을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 후배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한 분은 목사님이고, 한 분은 사모님입니다.
아주 신실하고 지적으로도 뛰어난 후배목사는 지금 요르단이라는 복음의 사각지대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장로교 목사의 사모입니다.
제 출신교회의 후배이기도 하고 서울신학대학 후배이기도 한 이 사모님은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역시 엄청난 절벽과도 같은 모슬렘 문화와 영적인 싸움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선교사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공통점이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장애라는 십자가가 있다는 점입니다.

요르단 선교사님의 딸이 중증 장애아입니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사모님이 소아마비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의 몸을 가누기도 힘든 그들은 종교, 문화, 기후, 음식도 다른 곳에 가서 저들의 전 인생을 걸고 사역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우웬의 걸어온 길, 모슬렘에서 사역하는 장애를 갖고 있는 선교사님들의 여정을 소개했습니다.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저들이 바보가 아닌데, 아니 어찌 보면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실력과 영성이 있는 자들인데 왜 저들의 자신들의 부와 이익과 소유를 위하여 살지 않고 전혀 나의 삶의 세속적인 보장을 포기하고 이타적인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좋은 미사어구를 동원하여 설명하지 않더라도 가슴을 통하여 얻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 받은 사랑에 감격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눈물겨워서입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 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그렇습니다.
‘예수님 때문에’입니다.
저는 지금 예수님 때문에 전 인생을 걸었고 또 걸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했습니다. 

어디 이들 뿐이겠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전 인생을 건 사람들이 어디 이 사람들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도전을 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기에 이렇게 생명을 걸었느냐? 의 도전입니다.
그 해답을 오늘 로마서 17번째의 강해를 통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앞서 전술한 사람들이 그들의 전 인생을 걸게 했던 대목을 본문 6-8절에서 찾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이 주님을 위하여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먼저 행하신 나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의 극치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짝사랑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4가지의 사랑이 있습니다. 

①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② 필리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친구 간의 사랑을 말하는 우정의 단어입니다.
③ 스톨게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형제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④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기독교 변증가 C. S Lewis 는 자신의 책 “Four Talks on Love”에서 사랑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에로스를 애정으로, 필리아는 우정으로, 스톨게는 긍휼로 그리고 아가페는 자비이다.”
성경에서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의 모습의 대 전제는 짝사랑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기억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내려가 낙향하여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했던 제자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마침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자 바닷가 쪽에 서 계시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고기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잡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요한이 주님인 것을 알아보았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육지로 나오셨습니다.
잡은 고기를 가지고 조반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던 주님께서 고기와 함께 있던 떡을 주시면서 자기를 배신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 21:15절 전반절입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NIV 영어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Do you truly love me more than these?” 

우리나라 성경도, 영어성경도 요 21:15,16,17절에서 무려 세 번이나 똑같은 단어로 번역하고 있는 이 구절을 원어성경은 다르게 질문하고 대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첫 번째의 질문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의 15절의 원어성경 부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ajgapa'/" me ?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를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을 철저하게 부인했던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filevw se. (당신을 사랑합니다.)
베드로는 조건적인 사랑인 필리아의 사랑으로 고백을 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는 주님의 질문에 조건부의 사랑으로 사랑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대답은 두 번째 질문에도 동일하게 시도되었고 베드로의 대답도 동일합니다.
그러자 세 번째의 주님의 질문은 바뀝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요구에 아멘을 하지 못하는 베드로를 보시고 눈높이의 사랑으로 내려가십니다.

요한복음 21:17절의 질문입니다.
“ filevw me ”
그렇다면 필리아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를 물으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베드로에 친구 간의 사랑인 필리아의 사랑으로도 나를 사랑하느냐를 질문하셨습니다.
filevw se. 

그러자 베드로의 대답은 변하지 않고 필리아의 사랑으로 답변을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의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사랑은 짝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건적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짝사랑’이라고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 주장은 틀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저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응원하여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셨습니까?
고후 5:14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죽기까지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대상들인 우리들의 상태입니다.
우리들을 위하여 주님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우리들의 상태가 온전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상태는 만신창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할 것이라고 마음을 결심하셨을 때의 우리들의 상태를 바울은 세 가지로 지적했습니다. 

1. 우리들이 연약했을 때였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며 우리들을 사랑하실 때의 우리들의 상태는 ‘연약할 때’였습니다.
연약이라는 단어의 원어를 보면 ajsqenw'n (아스쎄논)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원어적인 의미는 ‘무력한, 병든, 힘이 없는, 나약한’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 단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의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상에서의 변형을 경험하신 뒤에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맞았던 기사가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온 아비의 간절한 절규를 듣게 되었습니다.
내 아들이 귀신이 들려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거품도 흘리고, 이도 갈고, 자꾸만 야위어 간다는 것입니다.

또 귀신들은 아들을 죽이기 위해 물에도 던지기도 하고 불에도 던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급한 나머지 당신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고침을 요구했지만 고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에게로 아들을 데리고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저는 이 아비의 절규가 오늘 주님이 우리들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면서 사랑하셨던 우리들의 상태라고 확신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 아비의 무기력함과 연약함이 오늘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능력을 갖고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물에도 던져지는 고통이 임해도, 불에도 던져지는 고통이 임해도, 삶의 현장에서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말라만 가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었습니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난주에 권 집사님을 심방했습니다.
육체적으로 고비기 있었는데 이제 한 고비를 넘기고 많이 영육의 회복을 보이고 있어서 기뻤습니다.
2월 1일 수술만 잘 진행이 되면 더 좋은 결과를 보일 것을 확신하기에 기도합니다.
심방을 마치고 병실에서 주차장까지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어 마침 입원환자와 병문안을 온 친구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너무 느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같은 병실에 중환자와 함께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환자는 간암 말기 환자였습니다.
환자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옆에서 보았습니다.
오늘은 혈변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상태가 위중하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을 해서 중환자실로 다시 옮겼다는 이야기 끝에 그 분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3일 동안 그 환자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어. 괜히 나까지 그렇게 되는 것 같아서 중환자실로 갔으니 오늘부터 잘 잘 것 같아.’

간암은 전염되지 않습니다.
이제 혈변까지 쏟으며 꺼져 가는 생명의 불꽃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환우가 옆에서 죽어가고 있는데도 오직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의 암세포가 퍼져 있는 인간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적, 영적인 무기력함 뿐입니다. 
그런데 이 연약함과 무기력에 있는 우리들을 사랑해 주셨으니 주님의 사랑은 우리들을 너무나 사랑하신 짝 사랑이 아닙니까?

그래서 본문 6절을 다시 음미하면 더 큰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2.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였습니다.

본문 8절을 주목하여 보십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접할 때 친구목사가 생각이 납니다.
제 신학교 동기 목사가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서 5:8절을 묵상하면 그냥 눈물이 나”
저는 이 말씀에 가슴에 와 닿습니다.
로마서 5:8절을 어떻게 눈물이 없이 읽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5:8절의 감동이 없는 자는 아직도 주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표현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당신의 십자가에 달리는 것임을 알았기에 그 사랑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서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죽음으로 사랑을 표현하셨다는 말입니다.

8절에서 아직 죄인이라고 표현한 원어의 단어는 ‘aJmartwlw'n’(하말토론)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는 궁사가 화살을 쏘았는데 과녁에 빗나게 상태인 ‘하말티아’ 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갖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라는 목표에서 빗나가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적인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과녁에 빗나가 도리어 사탄이라는 공중권세를 잡은 자에게 과녁이 맞추어져 있는 상태가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2:1-2절에서 이렇게 이미 갈파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마가복음 6:45-56절과 동일한 기록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던 요한복음 6:15-21절을  보면 참 많이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심으로 많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벳세다에서 기적을 맛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일이 벌어집니다.

요 6:15절을 주목해 보십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주님은 신성을 갖고 계신 분이기도 하였지만 그 분은 배도 고프셨고, 피곤도 느끼시고, 분노도 표하시던 인성을 갖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냥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보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이 넘어갈 때가 많지만 주님의 속성 중에는 나약한 인성의 모습도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 분에게 많은 대중들이 왕으로 삼으려는 대중적 인기의 최고점을 경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벳세다에서의 유혹을 물리치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났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었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인식하신 주님은 마가복음 6:45절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독려하여 그 곳 벳세다를 떠나 건너편 게네사렛(가버나움 쪽)으로 가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복음서의 기자들은 이 부분을 그냥 넘어갔지만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제자들을 재촉하다는 말 표현에서 제자들은 게네사렛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추측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벳세다에서의 주님의 대중적인 인기는 왕의 인기였기에 그곳에 머무르면 그들도 권력의 한 복판에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자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세속적인 인기, 명예, 권력, 부귀, 안락, 풍요로움 등등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저는 영성신학자 리차드 포스터의 대표 작품인 “돈.섹스.권력” 이라는 책을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그 때에 느꼈던 감정은 목회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질 추구가 죄입니까?
성욕이 죄입니까?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죄입니까? 

성경의 그 어느 곳에도 이러한 일들이 죄라고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조금 더 세밀하게 오늘의 주제처럼 죄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는 물질, 하나님 없는 성, 하나님이 없는 권력”
이것이 바로 우리들을 죄의 범주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죄악입니다. 

제자들은 벳세다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주님의 재촉함으로 벳세다를 떠나 게네사렛을 건너가기 위하여 갈릴리 바닷가를 항해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가기 싫은 길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바람이 거스르는 풍랑까지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중고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도, 마가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네사렛 쪽으로 항해를 하는 어간,
풍랑의 고통이 임하는 어간,

주님은 바로 그 곳 게네사렛 쪽의 바닷가에 서 계시다가 제자들에게 오셔서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고 제자들을 구원하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얻는 진한 감동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힘들어도 주님이 계신 쪽으로 가야 승리한다.” 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왜 죄악에서 허덕입니까?
주님에게서 빗나가기 때문입니다.
벳세다에 있으려고 하지 게네사렛으로는 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벳세다에 계시지 않고 게네사렛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의치 않고 벳세다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벳세다에 머무는 것이 죄입니다.
그곳에서 안주하려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극복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계시는 가버나움으로 가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제천중앙의 교우들이 주님이 계시는 곳으로 초점을 맞추어 항해하는 멋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런데 말을 잇지 못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아직 우리들이 벳세다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도저히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말이 되게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슴없이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십자가는 주님 사랑의 climax 이다.” 

이 은혜를 곱씹으며 롬 5:8절을 묵상하며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 주님의 진한 짝사랑을.
 

3. 우리들이 주님과 원수였을 때였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세 번째의 대목은 강도가 훨씬 더 강해졌습니다.
주님이 우리들을 짝사랑하셔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시며 죽기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신 상태는 연약할 때였고, 죄인이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이렇게 강도를 높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원수 되었을 때였다고 말입니다.
원수라는 단어 ‘ejcqroi;’(엑스로스)는 증오한다. 반대한다.’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0절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반대하며 하나님을 증오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화목하고 싶으셔서 아들을 죽였다고 말입니다.

원수가 누구입니까?
아들을 죽인 장본인이면 원수가 아니겠습니까?
손양원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양아들로 삼은 일을 우리는 잘 알지만 그것은 극히 드문 예이고 아들을 죽인 자는 원수라고 표현을 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할 수없이 아들을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죽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얼어 놓았습니다.
신학적인 구원론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생각으로 접근해 보십시다.
우리들은 아들을 죽인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주님의 짝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그렇게 원수인 우리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다윗과 압살롬에 대한 성경 말씀을 예화로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비를 죽여서 왕위를 찬탈하고자 반란을 아들 압살롬이 일으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의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다윗에게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재정비된 요압을 중심으로 한 다윗의 군대는 압살롬의 군대를 물리칩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단 패륜아 압살롬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는 요압에게 다윗이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왕이 자신의 부하에게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삼하 18:5절입니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압살롬을 살려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르앗 전투에서 요압은 압살롬을 살해합니다.
이 소식을 다윗이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다윗의 모습을 사무엘 기자가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삼하 18:31-33절입니다.
“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저는 다윗의 이 심정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심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원수였던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을 짝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대신 너를 대신하여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다윗의 심정으로 원수인 우리들을 위하여 아들을 대신 죽이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짝사랑입니다.
이 은혜의 전제를 갖고 본문 10절을 다시 보면 감동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성결인인 대중가수 이문세 집사의 오늘이 있기 까지 그의 수많은 히트곡을 작사, 작곡해 준 이영훈씨와의 기사가 눈에 들어와 스크랩을 해 두었습니다.

작곡가 이영훈씨가 대장암 말기로 투병생활을 하는데 이문세씨가 찾아가서 그를 위해 병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기사입니다.

이문세집사의 기도의 기사는 이렇습니다.
"우리 두 사람, 세상을 위해 아름다운 음악을 더 많이 만들게 해주시옵소서."

가수 이문세씨와 작곡가 이영훈씨는 병상 옆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두 사람은 기도가 끝난 뒤에도 두 손을 꼭 맞잡고 "아멘, 아멘"을 한참 되풀이했다.

저는 이 기사를 읽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말입니다.

누구입니까?
우리들을 너무나 사랑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죽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우리가 연약했을 때,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도 사랑하신 짝사랑이었다는 점입니다.

교우 여러분!
너무나 감사한 사랑이 아닙니까?
그 은혜가 너무나 크지 않습니까?
이 은혜의 감격해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11절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11절을 선포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가 563장을 부르고 기도합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 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가게 하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세상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 가는 날 천국 가게 하소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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