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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님을 태우는 사람, 주님을 타고 가는 사람 (요 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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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태우는 사람, 주님을 타고 가는 사람 (요 12:12~19) 
 
  
❚금 십자가, 은 십자가

예전에는 교회에서 ‘촌극’이라는 것을 참 많이 했습니다. 짤막한 연극이라는 뜻으로 ‘촌극’(寸劇)이라 부른 모양입니다. 수련회를 가도, 문학의 밤을 해도 꼭 이 촌극은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였습니다. 그 중에 고등학교 여름수련회 때 보았던 ‘금 십자가 은 십자가’라는 제목의 촌극이 생각납니다. 그 촌극 대본을 누가 쓴 것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내용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이 촌극은 우리나라 옛 이야기에 나오는 ‘금도끼 은도끼’를 패러디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실수로 십자가를 연못에 빠뜨렸습니다. 그런데 펑 하고 나타난 사람은 산신령이 아니라 전도사였습니다. 전도사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들고 나와 “이 십자가가 네 십자가냐?” 하고 묻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지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에서는 먼저 금도끼를 들고 나와 “이 도끼가 네 도끼냐?” 하는데 이 촌극은 순서가 거꾸로입니다. 

왜 그런지 끝까지 한 번 들어보세요. 전도사가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들고 나와 “이 십자가가 네 십자가냐?” 하고 묻자 사람들은 “아니요, 제 십자가가 아닙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것도 본래 이야기와 반대지요? 이번에는 전도사가 은으로 만든 십자가를 들고 나와 “이 십자가가 네 십자가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서로 제 십자가라고 우깁니다. 

마지막으로 전도사가 금으로 만든 십자가를 들고 나와 “이 십자가가 네 십자가냐?” 하고 묻자 사람들은 서로 금 십자가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난리가 났습니다. 물론 진짜 금이나 은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촌극 소품으로 그 십자가 중에 하나는 금박지로 싸고 또 하나는 은박지로 싸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도 나도 금으로 만든 십자가 은으로 만든 십자가를 갖겠다고 우기며 싸우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무로 만든 초라한 십자가를 갖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깊은 뜻을 가진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왜 금이나 은으로 만든 십자가를 가지겠다고 서로 우겼을까요? 아마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 고르라면 그렇게 금이나 은 십자가를 안 골랐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보기에는 번쩍번쩍하고 좋겠지만 금이나 은으로 만든 십자가를 지라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 십자가를 질 생각이었다면 아마 가벼운 나무 십자가를 골랐겠지요. 사람들이 앞 다투어 금이나 은 십자가를 고르는 것은 뭔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답을 말씀드릴까요?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자기가 지기 위해 고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십자가를 타기 위해, 타고 가기 위해 고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지신 초라한 나무 십자가가 아니라 번쩍번쩍하는 금 십자가, 은 십자가를 고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태우는 사람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예루살렘에 입성 장면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데서 종려주일이 유래했지요. 기왕 촌극 이야기가 나왔으니 촌극 이야기 하나 더 합시다. 어느 교회 고등부에서 종려주일 때 어른들 앞에서 이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연극으로 보여드리기로 하고 배역을 뽑게 되었습니다. 먼저 주연급인 예수님 배역은 누가 맡을까? “저요, 저요” 너도 나도 자원해서 경쟁이 치열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제자들 역을 뽑습니다. 예수님 배역에서 탈락한 학생들이 제법 많이 지원했습니다. 그 가운데 열둘을 뽑았습니다. 

이번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군중들 역할입니다. 그냥 나머지 학생들을 다 군중으로 뽑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귀 역입니다. 모두가 회피하는 3D 배역입니다. 예수님을 등 위에 태워야하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또 나귀 의상을 온몸에 뒤집어쓰니 땀나지요. 사람들이 물론 내 얼굴도 못 알아보지요. 그러니 다들 회피한 것입니다. 어쩌다 어수룩한 학생 하나가 이 나귀 역할에 뽑히게 되었습니다. 연극이 시작되자 무거운 예수님 배역을 등에 태우고 기어가는데 얼마나 무겁고 힘든지 몰라요. 온 몸은 땀으로 젖고 괜히 이 역할을 맡았구나 싶어 후회도 됩니다. 

나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예수님 배역 맡은 친구는 사람들에게 환영 받고 손 흔들며 기분 혼자 다 내는 것을 보니 속도 상합니다. 그런데 군중들이 요란한 소리로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하는 순간 나귀 역을 맡은 친구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야, 사람들이 나한테 저렇게 종려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네? 이거 기분이 제법 괜찮은데?” 그러다가 이 친구는 너무도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환영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등 위에 태운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도 등 위에 태운 예수님 덕분에 저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어린 학생은 일생일대의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내가 영광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영광 받으셔야 하는구나. 다만 내가 내 등 위에 예수님을 태우고 갈 때 나도 그 환영과 영광을 받게 되는구나.” 이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영광을 받는 것은 이 어린 나귀처럼 주님을 태우고 갈 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종려주일을 맞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어떤 영광과 환영도 받으면 안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모든 영광은 오직 주님만 받으셔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주님 받으셔야 할 영광과 존귀를 내가 가로채거나 대신 받게 된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영광 돌리고 다 내 덕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10). 사람들이 나에게 정말 수고했다고 참 잘했다고 칭찬해 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다 주님을 위해 한 것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제 모습은 십자가 뒤에 감추어 주시고 오직 십자가 위의 예수님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다만, 한 가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영광을 받고 칭찬을 받을 때는 오직 한 가지 경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린 나귀처럼 예수님을 태우고 갈 때뿐입니다. 내가 기꺼이 주님을 태우고 가는 이름 없는 나귀, 사람들이 몰라주는 비천한 나귀가 될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게 됩니다. 내가 잘 나서, 내가 잘 해서가 아니라 오직 내 등 위에 태운 주님 덕분에 그 분이 받으시는 영광과 존귀를 나도 덩달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기꺼이 비천한 나귀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 안 맡으려는 나귀 역할을 기꺼이 맡아 주님을 내 등 위에 모셔야 합니다.

❚주님을 타고 가는 사람

그런데 오늘 종려주일 장면에서 우리는 나귀처럼 주님을 태우는 사람들뿐 아니라 반대로 주님을 타고 가려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일까요?

먼저 주님을 그토록 열렬히 환영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했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언젠가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고 한 메시야 바로 저분이라고 말입니다. 비록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압제 속에 허덕이며 살았지만 언젠가 메시야가 나타나 로마를 쳐부수고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라 믿고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살았는데 오늘 드디어 꿈꾸던 그 날이 온 것이지요. 

병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며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라는 분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온다는 것 아닙니까? 그 분이 메시야가 틀림없는데 어찌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가야지요. 어서 길거리로 나가 그분을 맞이하고 나뭇가지를 길가에 펴서 그분이 지나가게 하고, ‘호산나’즉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구호를 외치며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 그 분을 맞이해야지요. 그래서 그토록 수많은 군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열렬히 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큰 희망이 곧 커다란 실망이 되고 맙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해방해 줄 분이라고 믿은 그 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즉시 로마군을 찾아가 한 바탕 할 것을 기대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나와 함께 봉기해서 독립을 되찾자고 말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죽으러 왔다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는 둥(마 20:28)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예수님에게 너무도 실망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을 예수님을 타고 간 사람들이라고 했을까요? 예수님을 자신의 목적대로 이용하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 예수는 우리 기대에 맞는 메시야여야 한다. 반드시 우리를 로마에게서 구원해 주어야 한다.” 이 기대와 목적에 안 맞으니까 가차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습니까? 혹시 오늘 우리는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타고 가지 않습니까? 예수를, 신앙을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목적에 따라 신앙을 이용하고, 교회에서도 내 뜻대로 안 되고 내 주장대로 안 되면 견디지 못하고 분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타고 가려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른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이 순간 얼마나 흥분하고 어깨가 으쓱했겠습니까? 그들이 따르는 예수님이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 순간, 제자들은 틀림없이 “이제 때가 왔다. 우리가 3년이나 고생하며 주님 뒤를 따른 보람이 있다.”며 크게 기대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7에 보면 예수님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인사청탁을 한 것입니다. 

즉 주님이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우리를 하나는 좌의정, 하나는 우의정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나머지 열 제자가 막 화를 냅니다(41절).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마음속에 이미 다들 한 자리 할 기대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예수님 따르며 고생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주님이 권좌에 오르시면 우리 모두 한 자리씩 차지할 것이라는 기대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역시 주님을 태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타고 가려고 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자라는 사람들이 왜 이 모양이냐고 손가락질 하시겠습니까? 혹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한 자리 하고, 예수님 덕분에 편히 살고, 예수님 덕분에 영광 받으려는 기대를 품지 않습니까? 물론 예수님 덕에 우리는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영광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가 나귀처럼 예수님을 태울 때 나도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그 영광이 목적이 되어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타고 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 십자가를 타고 가는 사람

설교 첫머리에 ‘금 십자가 은 십자가’ 이야기를 해드렸지요? 제 신학교 은사 중에 한 분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요즈음은 십자가를 지고 가기보다 십자가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셨는데, 그래서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막 8:34)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타고 다닙니다.” 이 말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이지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 다니려고 합니다. 지고 가려는 것이 아니라 타고 다니려다 보니 좀 더 그럴듯한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차도 이왕이면 고급차 대형차를 타야 사람들 보기에 그럴 듯하고 대접도 받는 것처럼 십자가도 이왕이면 금이나 은으로 된 멋진 십자가면 더 좋겠지요. 사람들이 보고 부러워하고 인정도 해줄 테니 말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교회 다니는 것도 이력입니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요즘에 ‘제가 어느 교회 다닙니다’ 하고 말할 때 이왕이면 사람들이 다 아는 큰 교회, 유명한 교회 다닌다고 하면 ‘아! 그 교회 다니세요? 그 교회 크지요, 유명하지요’ 하고 좀 알아주지 않습니까? 하지만 작고 별 볼 일 없는 교회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도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왕이면 장로입니다, 권사입니다 하는 게 좋지요. 집사입니다, 그냥 성도입니다 하는 것보다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 수준까지 왔다면, 그래서 어느 교회 다니냐, 어느 직분이냐가 우리의 이력이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를 타고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십자가를 타고, 기왕이면 좀 더 비싼 십자가, 좀 더 보기 좋은 십자가를 타고 가겠다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교회는 내 이력이고 교회 직분도 명함에 새기기 위한 용도지 더 이상 섬김이나 헌신을 위한 용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의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이란 먼저 십자가를 질 때 영광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종려주일에, 그리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 한 주간 동안 우리가 타고 가던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사람, 기꺼이 주님을 내 등위에 태우고 가는 나귀의 신앙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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