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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가지 반응 (마 12;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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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반응 (마 12;22~37)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3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22-37)

오늘은 마태복음 12장 22-37절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반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한주는 여러 가지 일이 많았습니다. 노회도 있었고, 수요일에는 ‘구순연’집사님의 천국지옥 간증의 시간도 가졌습니다. 열정을 다하는 간증에 감동도 받았지만, 저는 그 간증을 들으면서 ‘나도 영안이 활짝 열려서 여기 있는 천사들을 좀 봤으면...’하고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간증을 듣고 나오니 하얀 천사 대신에 하얀 눈이 온 세상이 펑펑 내렸지요. 
    
오늘 본문말씀에 들어가기 전에 마태복음의 배경과, 오늘 본문 12장의 배경을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한분이시지만 복음서는 4권입니다. 그리고 각각 예수님의 다른 모습을 강조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순종과 희생의 종’(사 42:1)으로서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여 세상을 섬기는 종으로 사신 것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하신 일을 강조합니다. 일하시는 예수님, 송아지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누가복음은  ‘흠 없는 인자(人子)’(슥 6:12)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양자사이에서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중보자’가 되심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시험을 받으시고, 피곤해 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인자(人子)복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성자하나님’(사 40:9)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에 대한 믿음의 당위성’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분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독수리 복음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은 ‘약속된 메시야’(슥 9:9)입니다.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도래 시키시는 메시야로서 구약의 예언 성취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핵심단어는 ‘왕이신 예수’입니다. 사자복음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핵심 장이 12장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초기사역, 그리고 산상수훈, 12제자의 임명으로 이어지는 마태복음이 12장에 들어와서는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의 안식일 논쟁으로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며, 그의 권세가 하늘로부터가 아니라 사단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는 12장에서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더 큰 관심을 보이시며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본문말씀을 통해 4가지로 저와 여러분이 나아갈 진리의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로, 욕심으로 사실을 조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십니다. 
둘째로, 성령님의 이름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셋째로, 용서를 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하십니다. 
네째로, 선한 말을 쌓으라 하십니다.

이제 본문이 말씀하시는 것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욕심으로 사실을 조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십니다. 

본문의 처음에는 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이 사람은 귀신이 들린 사람입니다. 귀신 때문에 눈멀어 세상을 보지 못하고, 귀신 때문에 입이 막혀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데려 온 이 귀신 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와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반대하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고친 것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었기 때문이라는 모독적인 말까지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귀신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최악의 모욕입니다.
  
성도여러분,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들은 욕심 때문에 사실을 조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도 양심으로는 예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양심과는 반대로 말을 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의 죄를 찬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귀신들려 장님이 되고 벙어리가 된  사람보다 더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을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시고, 또 ‘악한 사람’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을 마귀를 아버지로 둔 사람, 마귀의 자녀라는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 들렸다고 비난을 했다고 기록을 합니다. 

이 서기관들이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영향력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서기관들이 먼 길을 내려온 것은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염탐과 비난을 목적으로 파견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선교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의 비판적 주의를 끌었다는 점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실제적 지배 세력인 산헤드린 공회의 지시를 받고 온 이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대한 적의를 드러내고 예수님을 혹독하게 비방합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고 합니다.  

왜  이렇게 극한의 표현을 할까요?   ‘시기심과 악한 마음’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에 사로잡힙니다. 그렇다고 해서, 듣기도 하고 직접 보기도 한 예수님의 이적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해서 걸고넘어진 점이 바로 그 이적의 원인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에 의해 이미 답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중세시대에 많이 행해졌던 ‘마녀사냥’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기독교신앙이 세상을 지배하던 중세시대에 가장 유명한 것이 마녀사냥입니다. 귀신을 섬기는 사람, 악마에게 자기 영혼을 바친 사람인, 마녀들을 찾아내어 재산은 몰수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태워 죽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마녀사냥이 가져온 휴유증입니다. 그가 마녀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마녀가 아닌 줄을 압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 그는 마녀가 되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재산을 몰 수 할 수 있고, 그래야 내가 이익이 됩니다. 답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리는 것, 그것이 마녀사냥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귀신의 왕이 들렸다고 비난함으로써 예수님의 일을 비합법적인 것으로 낙인을 찍고, 그분을 마술사의 범주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사랑을 행하거나, 다른 사람의 선한 행위를 기뻐하고 격려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시기와 종교적 위선에 사로잡혀 사랑의 예수님을 저주받을 마법사로 매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그들 자신이 귀신의 왕 바알세블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오늘 날에는 이런 일이 없을까요? 물론 있지요. 경쟁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자기보다 잘난 사람, 자기보다 능력 있는 사람을 모함하여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세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했습니다.  오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의 바른 신분을 알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바르게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욕심으로 사실을 조작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는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성령님의 이름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자기를 귀신의 왕이 들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여론을 몰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예수님은  성령님의 이름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8) 예수님은 자기에게는 뭐라고 말해도 좋다. 다 용서 받는다. 그러나 성령님을 거역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가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귀신의 왕이 들렸다고 비난하는 말에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용서를 받지 못하는 죄를 지을까 오히려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몇 가지 비유를 사용하셔서 반박을 하십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 때로는 직설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나타냅니다.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나라나 집이나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면 서지 못하고 결국 망하고 마는 것처럼, 사단의 왕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라고 하신 것은, 서기관들의 비난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를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신학자 메튜헨리(M. Henry)는 “모든 사람은 사단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도, 그 자신의 이익에 반대하여 행할 리도 없다는 것을 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사단을  쫓아내는 일은 사단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사람들은 압니다.  선한 목적은 악한 방법으로는 달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사단의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는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자신의 축귀가 귀신의 왕을 힘입은 것이 아님을 소극적인 비유로 설명하신 예수님은 이제는 적극적인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27). 사람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강한 자는 사단입니다. 사단은 죄와 질병, 고난과 죽음 등을 통해 인간을 지배하려는 강한자입니다.  세간은 사단이 사악한 통치를 하는 데 가치 있는 것들인 “사단의 도구와 기구들” 그리고 사단에게 속한 인간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요지는 사단보다 더 강한 자인 자신이, 강한 자인 사단을 제압하고, 그 집에 있는 사단의 소유된 사람들을 탈취하여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귀신을 쫒아내는 축귀의 권능은 예수님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단의 힘은 제압되었으며,   성령으로 사단의 왕국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성령으로 메시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와 나라는 더욱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도 이 성령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용서를 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라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용서받지 못하는 단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가 있지요. 그것이 ‘성령 훼방죄’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힘은  인간을 용서하고, 자유롭게 하며,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힘은 불의와 거짓과 증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고, 속박하며, 멸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문제는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성령의 힘을 사단의 힘으로 뒤바꾸어 예수님을 비난함으로써 ‘성령 훼방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악의 힘과 속박에서 불운한 인간을 자유롭게 하셨을 때, 율법 선생들, 즉 서기관들은 그것을 사단의 힘으로 돌립니다. 시기와 질투와 편견 등으로 굳어진 마음은 성령의 역사를 눈앞에서 보고서도 마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단의 힘으로, 하나님의 선(善)을 사단의 악(惡)으로 보게 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표현이 여러 번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사람이 성령을 근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사람이 말로 성령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마침내 성령을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성령을 훼방하는 자가 용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특별한 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성령을 통해 죄를 인식하고, 성령을 통해 회개하고,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주(主)로 믿어야 하는데,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은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헨드릭슨은 마음이 굳어지고 무관심해져서 (hardened and indifferent) 성령을 근심케 하고 성령의 역사를 소멸하는 죄라고 했고, 박윤선 목사는 “회개하게 하는 성령님을 배척하는 죄”라고 했습니다. 즉 ‘성령 훼방 죄’는 성령의 조명을 거절하고, 성령의 역사를 반대하고, 일부러 예수님을 잘못  선전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정당화하는 의도적이고 맹목의 죄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성령의 용서하게 하시는 역사를 거부하니 영원한 죄에 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만일 성령을 훼방한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면 그도 역시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뭇사람 앞에서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사하심을 받고 사도(司徒)로 쓰임 받은 사실로도 알 수 있습니다. 회개를 안 하는 것이 문제이지, 회개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 사탄도 회개하면 천사가 될 것입니다. 

네째로, 선한 말을 쌓으라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결론처럼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것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결론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고 ‘정말 말조심해야 하는 구나’하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결론을 내려서 좀 이상한가요?  이상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35절) 하지 않습니까?   

성도여러분, 말은 어디서 나옵니까? 말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이며, 그 사람의 인격이고, 그 사람의  신앙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32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말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말은 곧  신앙이며, 말은 곧 인격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나 자신입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33절)  말은 열매이고,  속에 있는 신앙과 인격은 나무입니다. 나무와 열매 둘은 하나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왜  예수님을 비난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할까요? 이어지는 성경이 그 이유를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34-35절)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속에 쌓은 것이 넘쳐흘러서 밖으로 나온 것이 내가 하는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쳤을 때, 사람들의 두 가지로 반응을 했습니다.  하나는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 들렸다”였습니다. 이 두 가지 반응은 곧 두 가지 말입니다.  한 가지 사건을 보고 왜  이렇게 전혀 다른 두 가지 반응이 나올까요?  쌓은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선(善)을 자기 마음에 쌓았고, 다른 사람은 악(惡)을 자기 마음에 쌓았습니다. 그리고 쌓은 대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말을 조심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말, 칭찬의 말, 격려의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마음에 쌓으시기 바랍니다. 쌓은 대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로 심판을 받습니다. 사실 말조심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저도 이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왜냐면 저도 선(善)을 별로 쌓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저의 설교 준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내용’이 아니라 ‘표현’입니다. 은혜스러운 표현, 부드러운 표현이 참 어렵습니다.  싸나운 말, 치는 말, 정죄하는 말이 훨씬 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 지친 성도님들에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상처받은 마음이 상처가 싸매지고, 힘이 다시 생겨나고, 은혜로 다시 충만케 하는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여러분, 
첫째로, 욕심으로 사실을 조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십니다. 
둘째로, 성령님의 이름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셋째로, 용서를 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하십니다. 
네째로, 선한 말을 쌓으라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큰 은혜가 있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상처를 치료받고, 은혜 받기를, 그런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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