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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 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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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 5:1~17)


(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2)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7)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9) 저가 강한 자에게 홀연히 패망이 임하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11)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13)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처녀 이스라엘이 넘어졌도다

어느 큰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은 방주 모양으로 매우 크고 웅장하며 건물자체로도 경건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정면 한쪽 편에는 수십억 원 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아름다운 화음을 내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성가대의 찬양은 매우 화려하고 감동적입니다. 성도들은 명품 옷들을 입고 경건하게 목사님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그 교회 품격에 맞게 교훈적이고 은혜로운 설교입니다. 교회 주차장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습니다. 마치 지상에서 구현할 수 천국의 화려함과 경건함이 이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 예배 중앙 통로로 한 사람이 걸어들어 옵니다. 그 사람은 검은 상복을 입었습니다. 그 사람은 중앙에 서더니 갑자기 애고 애고 하면 곡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 교회가 망하게 되었도다. 무너져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하고 구슬프게 노래를 부릅니다. 이 순간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건하고 은혜로운 예배를 망쳤다고 화를 냅니다. 급기야 몇몇 사람들이 그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그 사람을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제가 상상으로 묘사한 모습이 바로 1-3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아모스와 그의 메시지가 이스라엘 사회에 미친 영향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번영으로 인한 희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각 예배 처소마다 하나님의 축복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아모스라는 선지자가 이 축제 분위기를 여지없이 깨뜨렸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애가, 곧 장송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 애가가 2절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이스라엘을 처녀에 비유합니다. 한참 행복하고 아름다워야 할 처녀가 쓰러져 신음하고 있습니다. 쓰러진 곳은 자기 땅이건만 아무도 그 처녀를 일으켜 세울 자가 없습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망해서 사람들이 죽을 터인데 그 시체도 수습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철저히 망한다는 말씀입니다. 3절에서는 천 명이 살던 성읍에 불과 백명만 남고 백 명이 살던 성읍은 열 명만 남게 될 것이라 합니다. 90%가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거의 전멸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는 때는 이스라엘의 전성기입니다. 경제도 흥황하고 물질도 풍부합니다. 성전마다 제사와 찬양이 끊어지질 않습니다. 가장 행복하고 가장 희망이 넘칠 것 같은 바로 그 때에 아모스는 장송곡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보고 있는 비전입니다. 선지자는 현재의 흥청망청하는 모습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 화려함 뒤에 있는 불의함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고 그 결과 곧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태도요 또 예수님이 보신 비전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릅니다. 그 뒤로 여인들이 슬피 울며 예수님을 봅니다. 그 여인들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눅23:28-30)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예루살렘이 장차 어떻게 망하게 될지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합니다. 그 날의 고통이 너무나 심하여 차라리 자녀를 낳지 못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할 정도라 합니다. 차라리 산이 무너지고 언덕이 무너져 자기를 덮어 버렸으면 할 정도로 고통이 심할 것이라 합니다. 

실제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AD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철저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에서만 10만여 명이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자 먹을 것이 없어서 기근이 임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지붕 위는 탈진한 여자와 아이들로 가득 찼고 길에는 죽은 노인들이 가득했다.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흉하게 튀어나온 얼굴로 유령처럼 거리를 배회하다가 고통 속에 탈진하여 여기저기에 쓰러져 죽었다. 모두 지쳐서 자기 가족들을 매장할 수 없었고... 이러한 죽음에는 눈물도 애곡도 없었는데 기근이 모든 감정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자기 아이를 잡아먹는 일도 발생을 했다고 요세푸스는 전합니다. 그들이 살육당하면서 흘린 핏물 때문에 방화로 인해 활활 타오르던 불이 꺼질 정도였습니다. 이것을 미리 바라보았던 예수님이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신앙인들의 눈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기고 있지만 신앙인들은 지금 그 배에 구멍이 뚫려 기울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의 눈은 비관적인 눈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끝장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긍정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진보를 이야기 하지만 신앙인들은 곧 이 세상이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할 것을 선포합니다.

이 애가가 듣기 싫지만 우리는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립니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7:2) 인생은 죽음의 사실 앞에서 겸손해 집니다. 죽음의 사실 앞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의 어떤 지혜로운 왕은 매일 하인에게 “왕이시여 당신은 반드시 죽습니다.” 말을 아침마다 하게 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반드시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지혜로워집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가 대 파국과 함께 끝날 것을 알아야 역사가 겸손해 집니다. 자기의 민족과 자기의 권력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서 자리를 내려오게 됩니다. 악의 제국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은 새 힘을 얻습니다. 이 종말론의 힘을 알고 있기에 일제는 40년대 침략기에 우리 성경에서 요한계시록을 제거했습니다. 찬송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통치와 하나님나라에 관한 찬송 등을 삭제하거나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아모스 한 사람의 애곡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애곡은 모두의 애곡이 될 것입니다. 5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지금은 다림줄에서 조금 벗어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잡으면 쉽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리를 외면하다가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고 맙니다.

공법과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

아모스가 이렇게 심판을 외치는 이유는 그 사회가 불의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7절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여기 공법과 정의는 아모스서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공법은 히브리어로 ‘미쉬파트’라고 합니다. 이는 법정에서 내려지는 정의를 말합니다. 정의는 히브리어로 ‘체다카’입니다. 이는 인간관계에서 정당하고 적법한 태도를 말합니다. 미쉬파트와 체다카는 법정이든 개인 관계 등 사회 모든 영역에서 불의하지 않고 공평한 정의가 시행될 것을 요구합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는 성문에서 이루어지는 법정의 정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0절입니다.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이스라엘에서 재판은 주로 성문 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억울한 일이 생기면 성문 앞으로 와서 탄원을 합니다. 그러면 나라에서 임명하거나 그 성에서 임명된 재판관과 배심원들이 이를 판결합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나라가 불의하다보니 권력을 가진 자나 부유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12절에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한다”고 아모스는 비판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법정도 비슷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부자와 힘센 권력자에 대한 재판은 관대하고 가난한 자에 대한 재판은 가혹할 정도입니다. 최근에 보니 미국에서는 650억 달러에 이르는 초대형 금융사기를 친 사람에게 150년의 형을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대기업을 운영하면서 부실경영을 하고 회계를 분식하는 거짓을 행하고 배임이나 횡령을 통해서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끼쳐도 가볍게 선고하고 또 보석이나 가석방으로 풀어주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것들을 자주 보다 보면 사람들의 마음에서 정의가 사라집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사회가 10절에서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한다고 꼬집습니다. 올바른 소리는 자기 이익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소리를 하는 자는 실질적인 해를 주거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잠잠케 만듭니다. 아모스는 13절에서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고 합니다. 

마치 지금의 사회분위기가 그렇습니다. 시민단체나 전교조가 시국선언을 한다고 해서 징계를 주며 탄압을 합니다. 정직한 소리를 안 듣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몇 번 탄압을 하면 사람들은 움츠러들어 바른 말을 못하게 됩니다. 혹은 스스로 체념하고 맙니다. 

지혜자나 정직한 자가 잠잠해집니다. 그러면 당장 자기 편한 대로 일은 할 수 있지만 사회가 위험해집니다. 지혜자들은 무리하거나 정상을 벗어난 사람에게 ‘그렇게 살면 건강을 해칩니다.’ 하고 경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외면하고 묵살하다가 결국 큰 병에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나라의 안정이나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쓴 소리를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어야 사회가 건강해집니다.

정직한 자의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것은 나라보다 교회가 더 심합니다. 교회에서는 정직한 의견에 대해서 부정적이며 비판적이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목회자나 당회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이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면 교회 내에서 고립되도록 분위기를 만듭니다. 

가끔 저에게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상담을 듣고는 결론적으로 그냥 조용히 있을 것을 조언할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건설적인 의견을 교회에 제시하는 일도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왕따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하고 그 교회를 떠날 생각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나 당회나 성도들이 민주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장로교는 교황제나 감독제와는 달리 민주정치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중 대표자들로 장로들을 선출하고 그들이 교회를 이끌어 갑니다. 장로들 중 설교를 전담하는 장로가 설교 장로 곧 목회자입니다. 

장로는 성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생략되고 목회자 - 장로 - 성도에 이르는 군대식 구조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군대식 구조가 전쟁 상황이나 선교의 과정에서는 좋습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또 잘못 운영되면 독재가 되고 한 개인의 사적 욕심이나 어리석음에 의해서 휘둘리기 쉽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권력자나 부자는 항상 사회의 소수라는 점입니다. 불과 몇 퍼센트가 안 됩니다. 대다수는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소수만 편안하고 부유한 나라는 위험합니다. 이 게 극에 달하다보니 공산주의가 나왔고, 서구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복지제도라는 것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까? 아모스는 정확히 보고 있습니다. 소수만이 배부른 사회는 위험하다는 것을.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그런데 이렇게 하면 소수의 부자는 행복할 수 있는가? 아모스는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11절 하반절입니다.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다듬은 돌로 건축한 집은 그들의 호화로움을 보여줍니다. 보통은 벽돌을 쌓고 그 사이에 진흙으로 틈새를 막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부유한 사람들은 아주 고급 돌을 깎아서 틈이 없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했습니다. 아모스는 이들을 향하여 너희가 그렇게 수고하여 세운 것들을 결코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었지만 그 포도주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불의로 쌓으면 가난한 자도 힘들고 부한 자도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한국 경제도 이제 궤도를 수정해야 할 시점에 왔습니다. 경제가 성장해도 그것이 고용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고, 오히려 부가 소수에게 몰리는 일들이 발생을 합니다. 

그래서 다수를 차지하는 저소득층의 소비가 줄면서 경기는 더 위축됩니다. 이제는 함께 잘사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살 수 있는 길들을 찾아야 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불만 없이 어울려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살 길을 제시합니다.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6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8절에 묘사한 대로 묘성, 곧 여름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황소자리와 삼성, 곧 겨울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오리온 자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사망의 그늘을 바꾸어 희망찬 아침을 만드는 분이요, 환한 백주 대낮을 어둠으로 만들어버리시는 분입니다. 경계가 한정되어 있는 바닷물의 한계를 풀어 지면을 덮으시는 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그 분에게 가야 살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던 자들의 교회에 나와서 다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까? 아모스는 ‘그것이 아니다.’라고 선포합니다. 5절에서 벧엘을 찾지 말라고 합니다. 길갈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세 곳은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성지들입니다.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무엇을 하겠습니까? 제사 곧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쁨의 축제를 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찾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14절에 하나님을 찾는 길에 대해서 분명히 제시합니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여기서 선은 이스라엘에 정의와 공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옷을 찢고 마음을 찢는 것보다 삶을 돌이키는 행실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가 80년대 이후로 수많은 회개운동을 벌였고 또한 수없이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회개보다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질 중심의 삶을 회개한다면 이제 물질의 탐욕에서 벗어난 가난하고 자족한 삶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었음을 회개한다면 이제는 베품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미움과 증오의 죄를 회개했다면 이제는 용서하고 품에 안아야 합니다. 분열을 회개했다면 이제는 개교회주의를 벗어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만하고 권력지향적인 삶에 대해서 회개한다면 이제는 낮아지고 섬겨야 합니다. 불의에 대해서 회개했다면 이제는 악에서 돌이켜야 하고, 불의에 대해서 저항하는 용기를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을 단지 심리적인 위로로만 만족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 받으러 온 무리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7-8)고 선포했습니다. 

무리가 묻기를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하자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에게는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살길을 열어주십니다. 15절입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여기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는 말씀에서 ‘혹시’는 구원해 주실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뜻합니다. 살리고 죽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 앞에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구와 그에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보일 뿐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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