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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유월절 어린양의 피 (출 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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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유월절 규정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본문 앞에 있는 출애굽기 11장의 열 번째 재앙과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했지만, 애굽왕 바로가 순순히 백성들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재앙이 그들에게 임했지만, 아홉 번째 재앙을 받고서도 여전히 바로는 완고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애굽에 장자와 짐승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게 하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내리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를 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명령하십니다. “흠없는 어린 숫양을 잡아서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죽음의 천사가 너희의 집을 넘어갈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명령에 순종해서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뿌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재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앙이 넘어갔다고 해서, 재앙이 유월한 것을 기념하며 지키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출애굽 사건이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고 어린 양의 피와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텐데, 답을 먼저 말씀드리면 대단히 관계가 깊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중요한 것은, 출애굽 사건은 단순히 한 노예 민족 이스라엘이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정치적 사건을 가리키는 차원을 넘어서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출애굽에 비유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구원의 예표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얘기할 때에 유월절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과 유월절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건의 두 양상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출애굽은 유월절로 말미암아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의 양의 피가 없었다면 유월절이 존재할 수 없었고, 유월절이 없었다면 출애굽 사건도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출애굽 사건,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서로 관련을 맺고 있고, 우리의 구원, 우리의 신앙과 우리 인생에서도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유월절 규례를 살펴보면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님의 피, 그 보혈의 은혜와 능력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3절에서 6절의 말씀을 보면, 양을 취하는 규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양을 취하는 방법은 우선 정월 10일에 가족 식구 수대로 양을 취하는데, 식구수가 너무 적으면 이웃과 함께 한 마리를 취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취하게 될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염소도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조금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유월절에는 양만 잡아야 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염소도 된다고 하면, 유월절 어린 염소라는 말도 존재해야 될 것 같은데, 왜 유월절 어린 염소라는 말은 없는가?”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라 간단합니다. 염소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염소는 양과 같은 기준으로 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염소에 대한 것까지는 얘기하지 않고 생략하고 있는 것이고, 유월절 어린양이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양만을 부각시켜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을 기준으로 해서 계속 말씀하고 있는데, 염소도 가능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유월절에 취하게 될 양은 흠 없는 순전한 것이어야 하고, - 한 살짜리 양이 가장 비싸다고 하는데-, 가장 좋은 일년 된 수컷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월 14일 해질 때에 그 양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이 양을 잡는 규례를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우리에게 주시는 멧세지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가장 기본적으로는 유월절 어린양이 예수님의 예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사용될 양은 흠 없고 점 없는 양이어야 했습니다. 점이라고 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고, 흠은 후천적으로 생기는 것인데, 예수님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즉,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는 순결하신 분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흠 없는 유월절 어린 양은 이렇게 흠 없고 점 없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는 “죽어야 했던 어린양”입니다. 흠 없고 가장 이쁘고 귀한 양이 피를 흘리고 희생당해 죽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은혜 가운데 하나는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 죄를 우리에게로 돌리지 않으시고 대속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어땠습니까? 누가 죄를 지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범죄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죽습니까? 짐승이 죽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내가 선악과를 먹고 내가 범죄했는데,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짐승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가죽으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휩쓸고 갈 때에 어느 집이 애굽 사람의 집이고, 어느 집이 이스라엘 백성의 집인지를 단순히 분간하기 위함이었다면, 굳이 어린양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냥 문 앞에다가 양 한 마리를 묶어놓았다면, 죽음의 천사가 문 앞에 매여 있는 양을 보고서 그냥 지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피가 뿌려져야 했습니다. 

  2차 대전 당시에 유월절 사건과 비슷한 실화가 있었습니다.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어느 날, 독일군들이 한 작은 마을을 습격하게 됐습니다. 독일군들은 집집마다 돌면서 숨어있는 유태인들을 찾아내서 그들을 체포하고 학살했습니다. 그 마을에 한 유태인 가정이 있었는데, 그 집 식구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숨어 있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아이들은 무서워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이들을 향해서 “얘들아!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말해 주면서, 짐승 한 마리를 잡아서 그 피를 집 대문 앞과 마당에 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독일군들이 그 집 앞에 이르렀습니다. 집 앞이 피로 얼룩져 있는 걸 본 독일군들은 “여기는 우리 동료들이 앞서서 이 집을 수색하고 갔나보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그 피를 보고 그냥 그 집을 지나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짐승이 대신 죽고 가족 식구들을 살렸습니다. 만약에, 짐승이 죽지 않고, 그 피가 뿌려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냥 문 앞에 묶어놨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다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도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훌륭한 삶, 우리의 본보기가 되는 위대한 삶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어린양의 보혈의 피가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월절에 죽임을 당해야 했던 양은 그날 당장 가서 기분 내키는 대로 한 마리 골라다가 잡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0일에 택해서 준비해 뒀다가 14일 저녁에 잡으라고 하셨으니까, 적어도 4일 전에 미리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미리 예비된 그 어린양을 4일 동안 지켜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의 의미를 깊이 새겼을 것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 가족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 어린양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내가 죄악의 애굽에 거주하고 있어서, 죽음의 천사가 지나갈 때에 내 장자가 죽어야 하고, 내가 바로 죽어야 하는 그 장자인데,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양이 나 대신 죽어야 한다는 것에 마음 아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픈 마음 가운데서도 희생제물을 통해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더욱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대신 죽게 하시고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사순절은 바로 이러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깨달음 없는 한 끼의 금식보다도, 아니, 하루를 금식하고, 일주일을 금식하는 것보다도,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드릴 줄 아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더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기는, 이 사순절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구원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감격으로 넘쳐나게 될 때에, 이 사순절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값지고 소중한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7절 말씀을 보면, 양의 피를 집 문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양은 그냥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피가 흘려졌고, 그릇에 담겨진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피는 사용되어져야 했습니다. 양의 피는 재앙을 넘어가게 하는 데에 사용되어졌습니다. 열 번째 재앙이 온 애굽을 덮을 때 양의 피가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져 있는 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린양의 피를 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문 앞에 짐승의 피를 바르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을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이 하는 짓을 비웃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모세와 아론이 피를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일러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슨 효험이 있겠나 하는 생각으로 의심하면서 지시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도 혹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애굽 사람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간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집은 다음 날 아침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오직 양의 피를 바른 집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유심히 살펴볼 것은 하나님은 양의 피를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했고, 문지방에 바르거나 현관에 뿌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의 피는 문지방에 뿌려지거나 현관에 뿌려져서 발에 밟혀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는 짓밟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는 값없이 짓밟힐 수 있는 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떻습니까? 보배로운 어린양이, 그 피가 얼마나 많이 짓밟혀지고 있습니까? 

  우리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불리면서 짓밟히는 정도가 아니라, 시궁창에 쏟아 부어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우리가 바로 어린양의 피를 땅바닥에 쏟아 붓게 한 장본인들 아닙니까? 사순절 기간 동안에 우리가 참회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대를 향해서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양의 피가 바닥에 흩뿌려져서 짓밟히고 있음을 통감하고, 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일에 힘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어린양의 피는 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만으로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설주와 인방에 피를 발랐다고 해서 그 집이 다 무사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로, 어린양의 피를 설주와 인방에 바른 문 안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유효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많이 바른다고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을 온통 양의 피로 채색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의 피를 내 몸에 바르고, 피로 내 온 몸을 적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피의 공로 안에 들어왔을 때에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그 피 안에 들어오는 자에게만 유효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인류를 다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보혈의 양은 충분히 있지만,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구경만 했거나, 오랜 세월 동안 양의 피에 대해서 수없이 들어만 왔다거나, 양의 피를 만져보기만 해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보혈의 공로와 능력을 믿는 자만이, 보혈 아래 있을 때에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얼마나 의롭게 사는지를 보고 넘어가리라”가 아닙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보고 넘어가리라”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피를 보고 넘어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이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른 문 안에 들어와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왔더라도,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줄로 착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더라도 문 밖에 있으면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문안에 잘 들어가 있다가도 바깥 세상이 보고 싶어서 문 열고 밖으로 나가면 죽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린양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만 재앙을 물리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보혈만이 죄를 씻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만이 구속의 능력, 생명으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혈 아래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우리 영혼의 설주와 인방에 발라야 하고, 우리 안에 예수님의 보혈이 흘러야 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주님의 보혈을 더욱 깊이 묵상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혈의 능력 아래 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사순절기 동안에 보혈의 은혜가 우리 안에 강같이 흐르고 넘쳐나는 체험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어린양은 죽임을 당해야 했고, 그 피는 뿌려져 사용되어야 했고, 어린양의 고기까지도 먹어져야 했습니다. 8절과 11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유월절 만찬 규정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규정을 보면, 양의 고기는 불에 구워서 무교병과 쓴나물과 함께 머리와 내장까지도 아침까지 다 구워 먹으라고 하셨고 남은 것은 다 불태우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어린양의 “고기”까지도 전부 먹어야 했습니다.

  왜 먹어야 했습니까? 재앙이 넘어가게 하는 데에 소용되는 것은 어린양의 피니까, 피만 취하고 고기는 먹거나 남을 주거나 버리거나 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왜 먹어야 했습니까?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물로 내 배를 채우고 불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 속에 포함된 모든 것을 내가 믿노라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먹는 것은 일종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성찬 때에 빵을 먹는 것은 배가 고파서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몸을 기념하면서 먹는 것이고, 주님의 몸을 먹으면서 주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공로 없지만,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음을 우리는 성찬을 통해 고백하게 됩니다. 어린양의 고기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족을 살리시기 위해서 어린양을 희생시키시고 그 은혜로 내가 살게 되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감사하며 먹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 만찬은 저녁밥을 먹었다고 해서 안 먹을 수 없습니다. 입맛이 없고, 양고기가 입맛에 맞지 않다고 안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녁 대신 먹는 것이 아니고, 취사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것으로만 만족하고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데는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단 구원 받는 일에는 성공을 한 것 같고, 구원 받았으면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지,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흡족해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적인 영양분을 섭취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앞에서 말씀드린 ‘죽어야 했던 어린양’과, ‘사용되어져야 했던 어린양의 피’는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면, 이 유월절 만찬에 관한 부분은 구원 그 이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박영덕 목사님이 쓰신 “이왕 믿은 김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절판이 돼서 요즘에는 출판이 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책은 구원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면, 구원 받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을 짚어주면서 구원 받은 자들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이지만, 이것으로 전부가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은 사람답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단하고 실행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계속해서 우리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생명의 떡 되시는 예수님을 먹으면서 우리 영혼을 살찌우고, 누룩 없는 떡, 무교병을 먹고 쓴나물을 먹어야 합니다. 

  누룩은 죄와 옛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된 모습, 옛 생활은 제거하고 신령한 음식을 먹어야 하고, 애굽에서 쓰라린 노예 생활을 상징하는 쓴나물을 먹으면서 우리의 옛 신분을 되새기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순절이 시작된 오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어느 때보다도 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섭취하고, 우리 삶 가운데 있는 누룩들을 제거해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고, 죄 아래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우리에게 베푸신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모습입니다. 

  이야기 하나를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면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가슴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저녁 무렵에 깊은 생각 후에 잿빛털을 가진 작은 새 한 마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진홍가슴새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새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있는데 제 이름을 어떻게 ‘진홍가슴새’라고 지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네가 참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진홍가슴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그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던 진홍가슴새는 그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였는지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로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그 사람의 이마에는 가시관이 씌어져 있는데 그 가시가 박힌 상처에서 피가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새는 자신의 부리로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아 나와서 이 작은 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 새는 지칠 때까지 그 가시들을 뽑다가 안타깝게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새는 자신의 가슴에 묻은 피를 씻기 위해서 냇가로 내려갔습니다. 날갯짓을 하면서 피를 씻어보았지만, 도무지 씻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새는 자신의 모습을 물 위에 비추어 봤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아름다운 색깔이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이 잿빛털에서 아름다운 진홍색으로 변해 있었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새끼들도 모두 가슴에 진홍색을 갖고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진홍가슴새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인해 그 운명이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게 했고, 구원을 얻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로 인해 새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그 은혜와 능력을 우리가 알고 믿는다면, 우리의 삶도 보혈 아래에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진홍가슴새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순절기 동안에 주님의보혈의 은혜와 능력을 다시 한 번 묵상하면서 주님의 보혈 아래 새로운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결단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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