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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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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11) 
 

  '반고소'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신자 간의 불신법정소송 반대'라는 것은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회 내에서 아주 큰 현실적 쟁점이 되었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일제 때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되었던 소수의 목사들이 해방 후에 오히려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다수의 목사들에 의하여 총회에서 쫓겨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총회 측은 축출된 교회들을 향하여 교회당 건물을 총회의 명의로 넘겨 줄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총회로부터 단절된 교회들은 교회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런 요구를 받은 목사들 중에 일부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바친 헌금으로 지어진 교회당을 교단에 빼앗길 수가 없고 국가의 법의 보호를 받아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송상석 목사였습니다. 
반면에 한상동 목사나 박윤선 목사 같은 분들은 '교회당 건물 문제는 재산에 관한 문제이며 이것 때문에 목사들이나 교회들끼리 싸움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한상동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던 초량교회의 교인들 500여 명 중에 총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교인은 20여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절대 다수의 교인들이 전적으로 한 목사님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상동 목사님께서는 교인들을 설득시켜서 1951년 10월 14일 주일 부로 그 교회당을 총회 측에 순순히 양도하고, 그 주일의 저녁예배를 어느 장로님 댁의 뒤뜰에서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마침 비가 내리는 바람에 교인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예배를 드렸는데, 빗물보다는 눈물이 더 많이 넘치는 은혜로운 예배가 되었고 그것이 현재 부산 고신측의 모교회가 된 삼일교회의 출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반고소 정신'으로 시작되었던 교단에서 나중에 자체 내의 재산 문제를 두고 분쟁이 생기자 세상의 불신법정 앞에까지 가는 지극히 불미스러운 사태들이 발생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그것을 말리시다가 한상동 목사님과 결국 갈라서게 되었으며, 우리 원로목사님께서 35년 전에 서울에 올라오셔서 이 경향교회를 개척하시던 중에 그 교단으로부터 제명을 당한 뒤에 현재의 고려 교단를 시작하게 되었던 이유도 순전히 그런 '신자 간의 불신법정 소송'을 극구 반대하셨기 때문이며 이것이 지금의 고려신학교가 복교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하여 과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대답은 정말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실로 간단명료한 것으로서 '절대불가'입니다.
오늘 우리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이 함께 지키는 '고려신학교 주일'을 맞이하여, 기독신자들이 서로의 재산 문제를 가지고 불신자 판사들이 재판하는 세상의 법정에 가서 싸워서는 절대로 아니 될 이유들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 간의 불신법정소송은 세상을 판단할 위치에 있는 교회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까닭에 불가합니다. 

6장 1절로 4절에 기록하기를 "1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라고 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라는 말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같은 교인들 사이에 무슨 금전 문제에 대한 분규가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즉 이 "일"이란 어떤 형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민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재산상의 문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듯이 당시 로마제국 사회에서도 '소송 만능주의' 풍토가 만연했으며, 대다수의 소송이 항상 돈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여러 교인들이 섞여 살다 보니 자연히 돈에 관련된 문제들이 발생했는데, 정작 진짜 문제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는 자체보다는 그것이 발생했을 때 교인들이 취하는 자세에 있었습니다.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라는 말은, 그처럼 교인들 간에 생긴 재산 문제를 가지고 불신법정에 가서 소송을 벌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불신법정의 재판관들을 가리켜 "불의한 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이 다 불공정한 판결을 내린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자들' 즉 '불신자'라는 의미로 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내의 신자들끼리 재산상의 분규가 생기면 그처럼 세상 법정에 가서 불신 재판관들 앞에서 판결 받지 말고 그 대신에 교회 안에 "성도 앞에서" 해결해야 마땅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신자가 세상 법정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로마서 13장 3절과 4절에 보면 신자는 국가가 국민의 치안을 위해 발휘하는 공권력을 당연히 존중해야 한다고 분명히 못을 박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민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특히 재산이나 금전에 관계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하는 말인 것입니다.

하지만 돈 문제라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중요한 것인데, 왜 그 문제에 대하여 신자끼리는 세상 법정에 소송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누워서 침 뱉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은, 예수님 재림 때에 완전히 성화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불신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동참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이 사실을 가리켜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뿐 아니라 "천사도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타락한 천사' 즉 사단과 마귀들을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2장 4절에서도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처럼 세상과 천사를 판단할 정도의 지혜와 권위를 가진 존재라면, 교회 안에서 교인들 사이에 생기는 재산 문제란 상대적으로 "지극히 작은 일"일 뿐이며 별것 아닌 "세상 일"에 불과한 것이니 그 정도야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함이 지극히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 사건"이 교인들 사이에 발생할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 즉 세상 사회에서는 판사로 높임을 받는다 하더라도 교회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영적으로 지극히 수준 낮은 불신자 앞에 가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나 다름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된 기독신자는 중생 받은 성도들의 판단과 교회의 법에 따른 판결을 실로 존중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마땅합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감화 감동에 의하여 내리는 판단력은 분명히 불신 세상의 법규나 상식보다 월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의 법률이 판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존중하면서도 성경 원리에 따라 당회가 치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비판하면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아주 이상한 버릇을 가진 교인들이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우리나라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대한민국의 국법은 우습게 여기고 우리나라의 문제를 북한의 김정일의 생각에 따라 판단을 내리려 하는 사람들과 꼭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실로 기독신자가 세상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줄 알고 믿는 자라면 그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권위와 명예를 오히려 세상 앞에서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신자 간의 불신법정소송'을 결코 행할 수 없음을 똑바로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 간의 불신법정소송은 사랑을 베풀어야 할 형제에 대한 배신인 까닭에 불가합니다. 

5절 이하 8절 말씀에 "5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한다"라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아예 정면으로 면박을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 창피한 줄을 알아라. 정말이지 낯 뜨겁기 짝이 없는 일이다.'라는 말입니다.
같은 교회의 교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교회 자체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지혜 있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불신법정까지 가지고 가는 것은 정말 지지리도 못난 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 사도 바울이 '성도'나 '교회'라는 말 대신에 "형제"라는 단어를 수차례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같은 교회 성도들 간에 당연히 나누어져야 할 사랑의 관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피 받아 한 몸 된 형제'라는 자들이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그것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소송을 해서 이기기만 하면 내가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신자끼리 소송하는 경우에서는 큰 오산이라고 일깨워 줍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다른 신자를 소송하는 자체가 "이미 완연한 허물" 즉 이미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범죄 행위가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라고 한 대로, 신자가 다른 신자를 소송했다는 그 자체만 해도 누가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이미 '불의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중에 소송의 결과로 누가 이기고 지고 하는 따위도 역시 아무 상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서로 물어뜯고 싸운다면 누가 이기든지 간에 그 상처는 외부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 가운데" 즉 그 몸 되신 교회 안에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둘 줄 안다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사도 바울은 호소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0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는 말씀도 바로 이런 뜻이 아니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개인적으로 금전적인 손해, 재산상의 손실을 당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이 형제끼리 치고받고 싸움으로써 생기는 손실, 안으로 성도 간의 우애를 망치고 밖으로 교회의 이름에 먹칠하게 되는 손실보다는 훨씬 더 경미한 것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너희 형제" 즉 목숨까지 대신 줄 수 있는 각오로 사랑해야 할 성도를 돈 문제 때문에 마치 원수처럼 대하기 십상이 됩니다.
여기 "너희는... 속이는구나"라는 말은, 소송이라는 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실제로는 오히려 상대방을 속여 빼앗아 먹는 불법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예나 지금이나 흔히 벌어지는 일입니다.
비싼 변호사를 쓰고 판사를 뇌물로 구워삶고 해서 결국은 '합법적으로 보이는 불법', '정당한 것처럼 여겨지는 사기'를 저지르는 것은 보통 사람의 탈을 쓰고도 못할 짓인데, 그것을 신자라는 얼굴을 가지고서 그것도 주 안에서 형제 된 교우에게 저지른다는 것이야 어디 말이라도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금전관계라는 것이 항상 얼마나 어렵고 문제 많은 것인지는 바로 이것 때문에 친구지간이나 부모자녀지간까지 쉽게 망치고 마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 문제를 두고 싸우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항상 추접스런 일이지만 특히 그것이 가까워야 할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 생기게 되면 더욱 꼴불견이 됩니다.
세상의 형제지간에서도 재산문제 때문에 법정에까지 가게 된다면 정말 집안 창피한 일인데, 같은 교회의 교인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와 똑같은 싸움이 벌어진다면 그것을 보는 불신자들의 눈총이 어떠하겠습니까?
참된 신자는 바로 그런 손실을 자기 개인의 금전적인 손해보다도 훨씬 더 염려하고 아까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 해도 돈 앞에는 별 수 없구나.'라는 한 마디의 핀잔을 듣게 되는 것, '이웃사랑 한답시고 만날 떠들면서도 정작 교회 안에서 저희들끼리는 악착같이 싸우는구나.'라는 빈축을 불신사회로부터 받게 되는 것을 차라리 내가 좀 속고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아프게 여길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자 간의 불신법정소송은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모독이 되는 까닭에 절대불가합니다. 

계속되는 9절부터 11절까지에 기록하기를 "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전후 문맥에 동시에 연결될 수 있는 문단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2절 이하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로 신자들의 영적 상식에 호소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그런 간절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너무나도 당연한 말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이하에 예로 들고 있는 '불의한 자'들은 대부분이 다 세상 윤리와 법에 비추어 보아도 엄연히 나쁜 자라고 당연히 낙인찍힐 사람들입니다.
"음란,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람, 술취함, 후욕, 토색" 등 이런 너무나도 뻔한 악행을 버젓이 행하고 있는데도 그런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 즉 천당에 갈 수 있겠느냐는 것은 설의법적인 질문입니다.
물론 그 대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즉 그런 악인들이 천당 구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 것은 당연지사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놀라운 말이 그 뒤를 따라옵니다.
바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라는 선언입니다.
천당 갈 자격 같은 것은 거의 보이지 않던 사람, 아니 천당 갈 가망성조차 아예 전무해 보이던 사람들이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즉 지금은 교인이 되었지만, 그들 과거의 생활을 보면 세상 윤리에만 비추어 보아도 도저히 천당 같은 곳의 입구에 발끝조차 내디딜 수 없을, 철두철미하게 "불의한 자들"이 고린도교회 안에도 꽤나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훨씬 더 놀라운 말이 또 그 뒤를 따라 나옵니다.
  바로 그처럼 불의했던 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완전히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어 버리는, 실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기적적인 변화의 과정은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불의했던 인생들이 과거의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다 '씻음' 받았고, 이제는 남은 생명을 성령의 인도 따라 살도록 '거룩'하게 성별되었으며, 장차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절대로 정죄당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이미 '의롭다'고 인정된 새로운 존재로 180도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성령' - 바로 성삼위일체께서 이런 신기하고 놀라운 일을 베풀어 주신 까닭에 그 '불의한 자'들이 이제는 '거룩하고 의로운 새 사람'들로 완전히 변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정말 이런 구원과 칭의와 성화의 은총을 진실로 체험한 신자라면, 함께 주님께로부터 용서받고 교회의 일원이 된 다른 성도를 물질 문제 때문에 불신법정에까지 끌고 갈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주인에게서 탕감 받은 자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기 동관 하나를 만났을 때 '목을 잡고' 독촉하며 돈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는' 행동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육십만 배의 은혜'를 거저 받았다는 사람이 '육십만 분의 일의 빚'을 가지고 형제를 고발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가 교인들 사이에서 빌려 주고 돌려받는 액수가 많아 보았자 얼마나 많이 된다고 그것이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짜로 탕감 받은 액수와 비교나 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아예 돈 빌려 줄 때부터 혹 못 돌려받게 되더라도 조금도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각오를 하고, 그러면서도 조금도 인색하지 않고 사랑과 최선을 다해 도와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용서의 은혜가 이처럼 한없는 것임을 진정으로 체험하고 믿는 성도라면, '신자 간의 불신법정소송'이란 정말 일고의 여지조차 없는 것임을 꼭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앞서 고린도전서 5장을 보면 '권징 실시'의 원리를 통하여 '교회에는 교회법이 있다.'라는 사실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6장에서는 '교회의 법은 세상의 법에 우선한다.'라는 원칙을 통하여 '같은 기독신자끼리 불신 법정에서 소송을 벌이는 일은 절대불가하다.'라는 사실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며 그 정결함과 화평함을 이루도록 노력할 것"을 서약하고서 정식 세례교인이나 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관할과 치리'라는 것에는 바로 이처럼 '같은 교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금전문제에 대한 판결'도 포함됩니다.
만일 한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 합의되지 못하는 금전이나 재산 문제가 발생하면 절대로 세상 법정에 가서 소송해서는 아니 됩니다.
반드시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회의 치리'를 통하여 해결해야만 합니다.
쌍방이 다 진실한 신자라면 그 판결에 승복할 것이며, 만일 어느 한쪽이 그 교회의 판결에 불복하면 교회는 그 교인을 권징할 것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불복하면 이미 신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정하고 그 사람을 출교시키게 될 것이며 그처럼 교적을 상실한 사람은 세상 법정에 고소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자가 불신자를 상대로 소송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피차 참된 성도들 사이에서만 적용되어야 할 교회법을 실제로는 불신자인 사람이 교인이란 이름만 달고서 악용하려 할 때, 이런 뻔한 수법에 신자가 속고 당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양자가 공히 진실한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 사이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불신법정으로 가지는 말아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에 그 지역의 한 한인교포가 아들을 데리고 가출한 아내로부터 그 아들에 대한 양육권을 찾으려고 소송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증인석에 세워서 자기 어머니를 나쁘게 말하는 일을 차마 시킬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스스로 소송을 취하하고 말았습니다.
신자끼리 불신법정에서 다투게 될 때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고 형제자매의 사랑이 깨어지게 되는 것을 적어도 그 아버지가 법정에서 자기 가족들끼리 싸우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것보다는 더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까 서론에서 우리 교단과 고려신학교가 바로 이처럼 '신자 간의 불신법정소송 반대'를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렸지만, 이런 경우는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미국의 그레이스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 언젠가 원로목사님께서 그 신학교의 교무주임 교수님과 면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원로목사님께서 우리 교단이 바로 이런 연유로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리니까, 그 교수님께서 자기네들도 원래 있던 교단 내에서 재산문제 때문에 법정소송까지 가는 일이 생겼을 때에 그것을 반대한 목사님들이 모여서 지금의 교단과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무척이나 반가워하셨습니다.
피차 작은 교단이기는 했지만 참된 신자와 교회는 신앙뿐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도 오직 성경 말씀대로만 따라야 한다는 정신은 이처럼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처음으로 만난 사이에서도 훨씬 이전부터 이미 똑같이 통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명예'와 '기독신자로서의 이름'을 적어도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보다는 더 귀중히 여길 줄 알아야만 진정 '교우'라고, '하나님의 자녀'요 '주 안의 권속'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는 이 무상무한(無償無限)의 은혜를 진실로 감사하고 있다면, 세상의 그 어떤 금전적인 손실이라도 그렇겠지만 더구나 같은 성도를 돕다가 조금 잃게 된 것이 내 인생 전체를 손해로 만들지 못할 것은 너무나도 간단한 계산이 아니겠습니까?
몇 푼의 돈 때문에 싸우고 갈라지는 것은 불신사회에서도 그렇지만 더욱이 신자 간에 있어서는 정말 '부끄럽게 여겨야' 마땅한 일이며, '세상은 물론이요 천사들까지도 판단할 위치'에 있는 교회가 재산문제를 두고 불신법정 앞에 나간다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불가'한 행동일 뿐입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더라도, 오직 교회의 이름을 높이고 형제의 사랑을 지키고 이미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감사히 여길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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