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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요 2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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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요 21:18~23)


목사님을 세 종류로 나누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첫째, 교회에 가면 자게 하는 목사님이 있답니다. 하여튼 설교가 시작되면 재운답니다. 둘째, 졸리던 눈도 반짝 뜨이도록 하는 목사가 있답니다. 셋째는 재우는 것도 아니고 안 재우는 것도 아닌 목사가 있답니다. 이런 유형이 제일 힘들답니다. 설교 시간이 고문당하는 것 같답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정신 차리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부록 같은 설교가 아닙니다. 너무나 귀한 요한복음의 마무리입니다. 
  
21장은 베드로가 사명을 회복하는 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를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다음, “내 양을 먹이라!” 하시며 교회와 성도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서 베드로에게 중요한 예언을 하셨습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띄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께서는 19절에서 더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베드로야, 네가 정말 날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너 나중에 순교하게 될 거야!” 

어떻게 보면 무서운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순교에 대한 말씀을 주실 때, 베드로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순간 옆에 있는 요한이 보였기에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나는 순교한다면 이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처음으로 책망 조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이 나중에 ‘예수님께서 요한은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고 하셨다.’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순교할 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살아남을지 그것이 베드로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해라.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뉘앙스로 보면 그렇게 들을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해가 될 만큼 격하게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이런 내용을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에 기록하였을까요?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아무것이나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정말 그리스도이시고 또  예수님을 믿어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믿게 하려고 요한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 부분도 틀림없이 그런 뜻이 있어서 기록이 된 성경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설교를 위해서 몇 주간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부분이 도대체 왜 마지막에 기록이 되었습니까? 

요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다면 이 본문이 주는 교훈이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사명을 회복하려면 제거 받아야 할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던 일입니다. 낙심, 실패에 대한 치유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 고백으로 해결 받았습니다. 오히려 실패자를 더 쓰시는 우리 주님의 계획을 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아직 해결 받아야 할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도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 받아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름은 반석이지만 아직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 주위를 둘러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그만 중간에 다른 사람을 보거나 환경을 보면서 무너져버리는 일이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루시면서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예언하셨는데, 베드로가 말하기를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니다” (막 14:29) 고백했습니다. 그냥 “선생님, 저는 안 버릴께요.” 그렇게 말하면 괜찮을텐데 “ 이 말은 여기 있는 요한은 버려도, 안드레는 버려도, 나는 안 버립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평소에도 다른 제자들에 신경을 많이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에 대하여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대화할 때, 베드로의 눈에 요한이 들어왔습니다. 그 요한은 베드로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였고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 였습니다. 평소에 사이가 나쁜 관계는 아니었지만 베드로 마음에 ‘예수님께서 나보다 요한을 더 사랑하지는 않을까?’ 은근히 신경이 쓰이던 제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였을 때, 요한은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재판정에도 갔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에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그 현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 요한과 비교할 때 베드로는 자신이 너무 초라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이 순교할 때,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의 약점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지 않고 이처럼 주위를 바라볼 때 언제나 무너졌었습니다. 

베드로가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이 일어나 바다 속에 쑥 빠졌었습니다. 죽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베드로를 예수님이 건져주시면서 왜 믿지 못 했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도 그랬습니다.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들 눈치를 볼 때, 계집종 하나가 던진 질문 “당신, 예수의 제자이지요?”에 두려움이 확 밀려오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또 옆 사람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한눈팔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그토록 엄히 베드로를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쳐다보느냐? 그래, 내가 요한은 내가 재림해 올 때까지 편안하게 살게 한다면. 나를 따르기를 그만두겠다는 말이냐? 왜 이 중요한 순간에 다른 사람을 바라보니? 요한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네 사명의 길이 달라지느냐? 그가 네게 무슨 상관이냐?”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특히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신 것은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눈으로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으로 동행하시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도 이처럼 마음이 흔들린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때는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온전히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도 베드로와 똑같이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어지면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믿어지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순교할까 봐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지만, 예수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순교해야 할 때가 온다면 순교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순교를 해야 된다면 순교를 할 수 있는 믿음이 생기고, 내가 고난을 당하면 고난을 이길 믿음이 생기고 내가 정말 살 길을 찾아야 된다면 살길을 보는 눈이 열리게 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한눈을 팔게 되면,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면 반드시 시험에 듭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순간,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때로 자기 파괴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마음에 원망, 질투, 비난, 교만, 낙심이 왔다면 예수님만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여섯 살 때 그가 살던 집에 불이 났습니다. 1709년 2월 9일 수요일 밤의 일이었습니다. 가족 모두 급하게 집에서 빠져 나왔는데 어린 웨슬리가 2층에서 자고 있다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달려가서 목말을 타고 창문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웨슬리를 간신히 구출해냈는데 그 직후에 불탄 집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평생 이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어머니 수잔나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큰일을 시키려고 우리 아들을 그 무서운 불길에서 건져내셨구나!’ 
  
웨슬리 목사님이 50세인 1753년 11월에 심한 병에 걸려서 죽을 뻔했을 때 자기 비석에 새길 글을 스스로 적어 놓았는데,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찬사를 늘어놓을까 봐 “여기에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존 웨슬리의 육신이 누워 있다.”라고 적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그때 돌아가셨다면 이 말의 그의 비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웨슬리 목사님을 회복시켜서 40년 가까이 더 일하게 하셨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여든여섯 살 때의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11시경 내 생각에 떠오른 것은 지금이 내가 80년 전에 화마에서 구출된 그날이고 그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 놀라운 섭리에 대하여 잠시 기도드렸다. 찬양과 감사의 음성이 하늘로 치솟았고 주님 앞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교회를 새롭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여섯 살 때 죽어야 할 자기를 화재에서 구해 주셨다고 분명히 믿었고,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나만 생각하면 시험 될 것이 없습니다. 
불평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은혜를 작게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부족하게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은혜를 여기 있는 우리 중에 못 받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을 못 받은 사람이 여기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는데 바로 데려가시지 않은 것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사명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십자가의 은혜, 성령의 축복이 감사할 뿐입니다. 사명까지 주셨으니 찬양할 뿐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순간이든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문제가 있나 없나 만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용서하고 사랑하는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시험 될 일도 없습니다. 그것이 답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에 갑자기 내 속이 뒤집힙니다. “왜 나만, 왜 나는” 하게 됩니다. 감사가 불만이 되고 기쁨이 불평이 됩니다. 

남과 비교하는 자는 
① 아무리 가져도 영원히 만족함이 없습니다. 
② 축복을 받아도 누리지를 못합니다. 
③ 불필요한 열등감에 계속 고통을 당합니다. 

하루 품삯을 다 받은 종이 마지막 한 시간만 일하고 똑같은 품삯을 받은 사람을 보고 속이 뒤집혔습니다. 주인하고 나만 생각하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랬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자포자기,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랬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님과 자기만 생각하면 문제 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능력대로 주셨다고 했는데. 그런데 두 달란트 받은 종, 다섯 달란트 받은 종하고 비교하는 순간에 속이 뒤집혔습니다. 그만 일할 맛이 안 생기더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 주일 아침에 한 성도가 강아지를 데리고 왔다가 안내 위원들이 “저희에게 맡겨 놓으세요! 잘 맡아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강아지 잘 맡아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예배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20분쯤 후에 예배 도중에 나왔습니다. 강아지 생각으로 불안해서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마음에 강아지 데리고 들어온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강아지 때문에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말씀을 들어도 온갖 염려, 생각, 신경 쓰는 것 때문에 실제로는 예배드리지 못하는 이들은 마음속에 있는 강아지를 내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마음에 시험이 있다면, 불평이 있고 원망이 있다면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명을 받는 그 중요한 순간에 그만 예수님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시험이 확 들어온 것처럼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느 여 성도님이 평소에 늘 남편에게 시달리고 매 맞고 살다가 새벽기도하고 난 다음부터 남편과 싸울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새벽기도에 와서 능력을 받고는 남편이 때리면 너 죽고 나 죽자고 하면서 달려들어 남편을 이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진짜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 '내가 이미 죽었구나! 예수님께서 내 생명이시구나!.’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생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죽으니까 자유가 오고. 마음에 평화가 오고. 위로가 되는 겁니다. 
  
하루는 남편이 또 술 먹고 와서 시비를 걸며 때리는데 여느 때 같으면 눈을 똑바로 뜨고 “나 죽여! 나 죽여!”할 텐데 “주여! 주여!” 하게 되더랍니다. 아내의 음성이 바뀌어 버렸어요. 남편이 생각했답니다. ‘내가 지금 때리는 것이 내 아내냐, 주님이냐?’ 주님 때리다가는 벼락 맞겠다는 마음의 생각이 떠오르면서 손을 놓고 “미쳤느냐?” 했더니. “여보!”하고 대답하는데 음성이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음성이더랍니다  “여보, 나 안 미쳤어. 당신이 나를 때리는데 불쌍한 생각이 들어. 여보, 나를 때려서 마음이 편하다면 더 때려.” 완전히 이전 여자가 아니에요. 아내 얼굴에서 살기도 빠졌고. 원망도 빠졌습니다. 남편이 자기도 모르게 아내에게 “미안해.” 했답니다. 그렇게 하고는 한 달 후에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왔어요. 아멘! 
예수님만 바라보면 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분명히 “나를 사랑하는 너는 나중에 순교하게 될 거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죽음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순교가 축복이고 영광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말씀을 하실 때 아주 무겁게, 베드로가 걱정된다, 너 조심해라 이런 뜻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기쁜 소식을 주려고 그런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번에 주핑 선교사님이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훈련받으러 떠나셨는데 그 비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젊은이교회에서 그 비용을 마련해 드렸습니다. 선교사님은 부담 드린 것 같아 죄송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선교사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 교회의 복이니 그런 말씀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처럼 당당하실 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도 그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순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음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순교한다면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묻는 수준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아직 하나님이 영광을 보지 못하였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 2장에 가면 베드로가 답을 얻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 충만을 받고 난 다음 당당해진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도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실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주님을 만나는 순간, 돌짝밭 사명이 더 큰 복입니다. 편하게 사는 것이 복인 줄 알았는데, 우리 주님을 알고 주님의 나라가 올 것을 아니까 고생하는 그 길이 복 받는 길임을 알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순교하는데 요한은 끝까지 죽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더 감사할 일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소망이 없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제 엄청난 역사가 시작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이렇게 끝나면서 사도행전이 놀랍게 시작이 됩니다. 

저는 처음에 요한복음 강해를 끝내고 구약에 있는 성경을 강해하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강권하여 ‘사도행전으로 넘어가!’ 하셨습니다. 

다음 주에 제가 소아시아 지방 성지순례를 갑니다. 모든 정황이 사도행전으로 건너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어떻게 바뀌었는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 가면 놀라운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뜨이고 나니까 그렇게 바뀐 것입니다.

올 초 성지순례를 가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보았는데,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이나 웅장하고 거대한 신전들을 보고 입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변변한 건축물 하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보이지 않는 말씀입니다. 제2계명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거대한 석상들의 왕국인 이집트를 보고 나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신전은 건축한 왕의 위세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망했습니다. 
  지금 이집트의 영광은 관광객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더욱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눈이 뜨여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그런 분들은 더욱 믿음의 눈을 뜨고 달려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혹시 이 시간에 마음이 흔들리는 분이 있습니까? 원망, 불평, 시험, 낙심에 빠진 분이 있으십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을 놓졌기 때문입니다. 세상 바라보고 사람 바라보니까 시험이 오고 낙심이 오고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따라갈 힘이 생깁니다. 감격이요 감사뿐입니다. 지금 주님만 따르는 이는 복 받는 이 길을 달려갑시다!
그러나 한 눈 파는 분은 정신 차리세요! 시험이 거기서 오고 낙심과 불평이 거기서 생기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죽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영생과 세상과 바꾸게도 됩니다.
불평, 원망, 시기, 낙심, 시험이 오면 주님의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그가 너와 무슨 상관이냐?”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무엇이 사는 길이고 무엇이 죽는 길인지, 무엇이 감사할 일이고 무엇이 슬퍼해야 할 일인지 분별하는 눈이 뜨여야 합니다. 
주님 바라보시는 순간 완전한 은혜, 완전한 사랑이 여러분에게 부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살길이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가 깨달아집니다. 이 시간에 예수님을 붙잡으십시오.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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