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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은 내가 결단하는 것(행 5: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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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내가 결단하는것(행 5:33~42)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가정에 늘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서로 축복해주실까요? “항상 예수님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중요한 방법 중에 하나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행동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이삭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모습을 보시고 이삭을 살려주시며 아브라함에게도 큰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시고 오히려 복을 주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이 모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인물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야 할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공격하여 사람과 동물을 모두 죽이라고 하셨으나 자기 생각에 좋은 동물은 죽이지 않고 가져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게 좋겠다고 하여 살려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죄였습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며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는 것보다 아무것도 바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게 더 바른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 인물의 행동을 볼 때 그것이 본받아야 할 모습인지 피해야 할 모습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물론 성경이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직접 평가를 해주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습이나 사울이 아말렉의 가축을 죽이지 않은 것은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성경이 직접 가르쳐주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 행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평가해주지 않을 때는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에 비춰서 그 인물의 행동을 잘 판단해야 합니다. 만일 잘못 판단하면 본받아야 할 행동은 피하고 본받지 말아야 할 행동을 본받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기껏 하나님 뜻대로 살며 복을 받으려고 성경을 읽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벌을 받게 됩니다. 이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성경 인물의 행동을 보면서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그 행동이 피해야 할 모습인데 오히려 본받아야 할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인물의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모습으로 착각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이 평소에 훌륭한 신앙인으로 칭찬을 받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사람이니 이 행동도 의례 본받아야 할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행동의 결과가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행동해서 잘 되었으니 본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두 가지는 절대 올바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해서 아무 실수도 하지 않고 항상 모범적인 행동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모든 행동이 본받을만한 모범은 아닌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지만 애굽에 갔을 때 자기 아내 사라가 미인이라 애굽 사람들이 사라를 뺏기 위해 자기를 죽일까봐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이라고 해도 이것은 우리가 본받을 행동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나 악을 이용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악한 행동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좋게 나왔다고 해서 그 행동이 반드시 선하고 모범적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우리에게 복이 되는 사건이 뭐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 가룟 유다의 행동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까?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욕심을 위해 악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 악을 이용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가 선하다고 해서 그 행동이 본받아야 할 모범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의 행동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 하시고 성령님이 강림하신 후에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워져서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 복음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우선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하여 자기들을 메시야 죽인 사람으로 만드니 좋을 리가 없습니다. 

또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데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여 자기들의 교리를 부인하니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기적을 행하여 인기가 높아지니까 시기하는 마음까지 생겨 더욱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붙잡아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인 공회 앞에서 심문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또다시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공회원들은 화가 나서 사도들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공회원 중에 특별히 존경받던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동안 가짜 메시야들이 많이 일어나 백성을 미혹하여 큰 무리를 이끌고 다녔지만 지도자가 죽으면 그 무리가 다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따르는 이 무리도 그냥 내버려둡시다. 만일 이 무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무리가 아니라면 예수가 죽었으니 이 무리도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세우신 무리라면 우리가 이 무리를 쓰러뜨릴 수 없을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까 두렵습니다.”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공회는 사도들을 죽이지 않고 그냥 채찍질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한 후에 놓아주었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핍박을 받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가말리엘이 틀린 말을 했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은 가짜 메시야의 무리는 내버려둬도 망할 것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야의 무리는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다는 말이 틀렸습니까?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또 가말리엘의 말은 좋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말리엘의 말은 사도들의 목숨을 구해줬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일로 인해 한 동안 교회가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스데반이 나타나 강력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할 때까지 교회가 큰 어려움 없이 선교할 수 있었던 것은 가말리엘의 이 말 덕분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말리엘의 행동은 분명히 교회에 큰 유익을 끼쳤습니다.

그러면 가말리엘의 행동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까?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전도를 하다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교회 나가면 좋지요. 저도 그래서 저는 교회 안 나가지만 제 아이들은 교회에 보냅니다.” 여러분도 이런 사람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잘하고 있는 겁니까?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들으면 “참 잘하고 계시는군요. 됐습니다.” 하고 돌아옵니까? 아니지요. 이 사람은 잘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자기가 믿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시는데 “하나님 저는 안 믿지만 제가 다른 사람을 믿게 만들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만족하시겠습니까? 

가말리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들으면서 자기는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중립적인 자세로 그냥 내버려두자고 한 것입니다. 이론은 맞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면 우리가 방해하면 안 되니 내버려두는 게 좋고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 아니면 내버려둬도 망할 것이니 내버려두면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게 이론적으로는 말이 되는지 몰라도 참 신앙의 모습은 아닙니다. 

참 신앙은 이렇게 중립적으로 그냥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라면 내가 참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백성을 미혹하면 내가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내가 결단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남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거기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다른 사람을 교회에 가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가말리엘과 정반대의 행동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이 거짓이라고 믿을 때는 열심을 다해 복음을 막다가 복음이 진리라고 믿을 때는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누군지 아시겠지요?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믿었을 때는 예수를 메시야라고 하는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믿고부터는 오직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지 결단하고 그 신앙에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들도 같습니다. 이들도 자신이 결단하고 복음을 위해 몸을 바쳤습니다. 심지어 복음을 위해 박해 받은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내가 결단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많이 듣고 좋은 말을 많이 해도 내가 결단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행동은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말리엘이 이 말을 했다고 천국에 갑니까? 아버지가 자녀들을 열심히 교회 보냈다고 그 아버지가 천국에 갑니까?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이고 내가 주님께 나의 몸을 바쳐 헌신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주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내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람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구원을 받고 싶어 하지만 구원이 뭡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른 사람 옆에 있다가 그 사람이 받는 축복을 조금 얻어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해도 하나님의 자녀 옆에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축복을 조금 얻어서 누릴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요셉이 섬기던 보디발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면 요셉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때 같은 집에 있던 보디발은 받지 않았습니까?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보디발이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훌륭한 신앙인이어서 하나님이 그 자녀들도 보호해주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이 좋아서 가정에 복이 임하고 자녀들이 함께 그 복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아내의 믿음이 좋아서 그 기도의 응답으로 남편의 사업이 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 자녀가 받는 복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복은 속에서 한없이 솟아나는 샘물과 같습니다. 그 사람 자신이 복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은혜와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옆에서 그냥 복을 함께 누린 사람은 속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게 아니라 샘물 옆에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샘물을 떠나게 되면 더 이상 물을 얻지 못합니다. 비참한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던 사랑하는 아버지가 떠나면 그 동안 아버지 덕에 얻어먹던 축복이 그칩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 세상에서의 허무와 불행과 오는 세상에서의 지옥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가족과 이웃도 자신이 신앙의 결단을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위해서 기도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신앙은 내가 결단하는 것인데 우리 신앙생활에는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의 결단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악한 세상에 살면서 이 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결단해야 할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혹은 틀림없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지만 내가 이 일에 참여해야 할 것인지 나는 다른 일에 참여해야 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 중에 어느 것도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결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삶은 어떤 행동이든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한 후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23이 이렇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우리는 어떤 행동도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결단하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직하게 살기 어려운 사회에서 정직하게 할 것인가 사회의 관습에 따라 남들처럼 살 것인가의 문제도 내가 결단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정직하게 살지 않기로 결단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로 결단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악한 결단을 하지 않고 다만 경우에 따라 적당하게 살려고만 해도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정의의 하나님이 결국은 세상을 의롭게 이끌어 가실 것이라고 믿어도 내 자신이 손해를 무릅쓰고 정직하게 살려고 결단하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좋은 신앙입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시고 또 세상을 밝히실 것이라고 믿는 것도 좋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려고 할 때 내가 결단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결단에 대해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 결단은 항상 참여하기로 결단하는 것만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참여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성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양육과 성경공부를 개설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모든 성도들이 다 양육에도 참석하고 성경공부에도 참석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결단하는 겁니까? 내가 하나님과 이웃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여기에 참여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봉사활동이 있을 때 나는 바쁘지만 그래도 시간을 쪼개서 할 수 있으니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참여하겠다고 결단할 수도 있습니다. 거꾸로 나는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적합할 것이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결단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결단하더라도 믿음 안에서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지 않거나 그냥 남 따라 한다면 믿음으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0:31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음식 하나를 먹을 때도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어야 할 것인지 먹지 말아야 할 것인지 확인하여 하나님 영광을 위해 먹는다는 결단 속에 먹으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이렇게 모든 일에 믿음으로 결단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결단하여 참여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헌신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결단과 기도와 헌신이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풍성히 이루어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상급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자신도 보람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교회도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결단도 하지 않고 아무 헌신도 하지 않은 사람도 다 그 열매의 유익을 누립니다. 교회의 부흥과 시설의 발전과 혹은 따뜻한 분위기의 유익을 같이 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그런 유익을 누린다고 내가 좋은 신앙인이라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좋은 성도들 덕에 교회에 임한 은혜를 얻어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유익은 보디발이 요셉의 축복을 조금 같이 누린 것과 같습니다. 요셉이 떠나면 축복도 떠납니다. 좋은 성도들이 떠나면 교회에 임하던 축복도 떠납니다. 

왜 교회가 한두 사람의 목회자나 몇 명의 헌신자로 인해 좋아졌다가 그런 사람이 사라지면 금방 다툼과 분쟁이 생기며 나쁜 교회가 됩니까? 참된 믿음의 결단으로 주님과 교회를 섬긴 사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믿음의 결단 속에 하나님과 교회를 섬긴다면, 아니 반만 그렇게 섬겨도 교회는 흔들림 없이 속에서 솟아오르는 주님의 축복을 누리며 성장하고 열매를 맺어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신앙은 내가 주님을 믿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주님을 믿으라고 권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있어도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믿기로 결단하고 주님의 뜻을 확인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 결단하는 게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제 우리 가족과 이웃이 이런 결단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권하여 그들 각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축복을 누리도록 도와야 합니다. 

또한 교회를 섬길 때도 옳은 말, 좋은 말만 하는 데서 그치면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결단하고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참된 믿음의 결단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울러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와 상급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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