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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종으로 은혜의 문이 열린다 (왕하 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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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하 5장 1~14절
제목 / 순종으로 은혜의 문이 열린다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서 평가를 할 때 많은 이력과 경력들이 따라붙습니다.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나아만이라는 사람에게도 다양한 수식어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그는 아람 왕의 총애를 받은 군대장관일 뿐 아니라 전쟁 영웅이고 국가 공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와 권력, 명성을 다 가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왕하 5:1)」 

자신이 가진 수많은 것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정적인 결함이 그의 인생을 어둡게 했습니다. 사실, 부분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허약성입니다. 아무리 행복의 조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한 가지 불행한 조건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정적인 한 가지 결함, 이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누리는 행복은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은 있는데 건강이 없고, 어떤 사람은 건강은 좋은데 인간관계가 흔들립니다. 성공은 했는데 주변에 사람이 없거나, 인기는 있는데 미칠 정도로 외롭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늘 결함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나는 모든 것이 완전하다” 

인간에게 그런 순간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한 가지의 결함이 지배할 때 불행은 한순간에 찾아옵니다. 나아만 장군을 보면 그렇습니다. 사실 그는 성경에 언급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방 나라 아람 왕의 군대장관이고, 당시에 아람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환경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성공한 사람으로,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군대 장관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장면이 감동적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몇 가지 단계를 통해서 찾아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은혜에 연결될 수 있는 고리는 결함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나병이 없었다면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었을텐데 그 한 가지 결함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15절을 보면 나아만이 치유를 받고 난 다음, 대단한 고백을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이방의 군대 장관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결함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연약함이 없으면 하나님이 부르셔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 안에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결함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고 세상적으로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부러워하지만, 그런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멉니다. 어려움이 하나도 없는데 누가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연약함을 통해서 나를 부르십니다. 그 결함을 통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사도 바울도 약함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립니다. 그 매달림을 통해 마지막까지 승리의 완주를 할 수 있었고, 바울이 바울 되게 했던 힘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매달리다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이나 문제들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의 연약함, 결함, 부족함, 문제, 고통을 통해서 찾아옵니다. 평소 같으면 나아만 장군이 어린 노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겠습니까?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습니다. 또 무엇인가를 이룬 성공한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에게 찾아온 결함은 어린 여종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습니다. 약한 상태가 축복이 됩니다. 약함이 은혜의 통로입니다. 결함이 풍성함으로 가는 기회가 됩니다. 내가 약할 때 겸손해지고 절박해집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결함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나에게 찾아온 결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는 통로가 됩니다. 오늘 나아만은 이 결함 때문에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던 인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찬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도 어떤 결함으로 하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우리 집안은 기독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절을 소유한 절집이었고, 아버지는 주지였고, 목탁 소리가 익숙했습니다. 그런데 실패와 아픔이 고리가 되어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결핍이나 문제가 있다면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통로가 될 것입니다. 문제를 그냥 문제로만 보지 마십시오. 자세히 보면 문제 안에 하나님의 선물 상자가 담겨 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은혜는 의외의 사건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3절에 보면 한 어린 소녀가 등장합니다. 전쟁으로 이스라엘에서 붙잡아 와서 나아만 장군의 아내의 몸종으로 삼은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소녀가 나아만 장군을 살릴 복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제의 답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게 하십니다. 집에 있던 보잘 것 없는 노예 소녀가 문제를 푸는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누가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로 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뜻밖의 사람이나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문제를 푸는 길은 의외의 사건과 만남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1절을 자세히 보면 나아만의 문제와 해답이 같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였음이라” 이스라엘과 아람과의 전쟁에서 아람이 이기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다는 뜻이지만, 전쟁의 승리로 잡아온 소녀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의 가정 안에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올 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측하지 않았던 길로 인도하실 때도 많습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무시하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일들, 어떤 관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올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내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닿을 수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뛰어넘을 때 찾아옵니다. 

소녀가 전해준 말을 믿고 나아만은 이스라엘로 떠났습니다. 아람왕의 총애를 입은 사람답게 자기가 낫게 될 경우에 보답할 답례품들을 가지고 거창한 행차를 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선지자 엘리사는 보이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어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버럭 화를 냅니다. 자신의 행차에 이스라엘 전체가 환영해줄 줄 알았고, 선지자가 나아와서 자기의 상처에 손을 얹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11)」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나아만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엘리사는 그가 이스라엘 국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나라의 최고 군대 장관이 아니라 나병환자로 취급했습니다. 나아만은 자존심을 생명처럼 붙들고 살아왔으며 어디를 가나 환대를 받았던 사람인데 완전히 묵살을 당하고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록 나병에 걸리긴 했지만 그는 자존심이 죽지 않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치명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것으로 꽉 차 있습니다. 죽고 사느냐의 문제 앞에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인간적 체면을 붙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분노하면서 그곳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아만에게 중요한 것은 병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 것은 핵심 주제가 아닙니다. 메신저가 누구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입니다. 오늘도 설교를 들을 때 설교를 하는 메신저가 누구인가보다 메시지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도 중요한 것은 메시지입니다.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그것보다 엉뚱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나아만은 지금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을 잊어버렸습니다. 환대가 없는 것 때문에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람의 장관으로 온 것이 아니라 환자로 왔습니다. 얻고자 하는 것은 치료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병보다 더 무서운 병이 교만이라는 병입니다. 나아만은 나병이 나을 수 있는 치료 직전에 와 있습니다.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목욕만 하면 분명히 낫습니다. 죽을 병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말만 따르면 됩니다. 그런데 교만한 마음이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복음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교만 때문에 사람이 죽습니다.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있지만, 교만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나아만이 요단 강에 들어가 목욕을 하려고 하면 화려한 훈장과 계급장이 있는 옷을 벗어야 합니다. 옷을 벗고 들어간다는 것은 계급장을 뗀다는 말입니다. 나아만에게는 계급장과 훈장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별 훈장들을 다 달고 다닙니다. 일생 동안 쌓아온 자존심들은 아무도 못 건드립니다. 훈장이 달린 군복을 입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교회에 와서도 은혜를 받으려고 하면 그런 것들을 다 떼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이래 봬도, 왕년에” 교회를 옮겼다면 처음 믿는 마음으로, 이전 교회에서의 직분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려고 하면 세상의 자랑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은 벌거벗는 것입니다. 내가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꼿꼿이 세우고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냥 죄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야 할 만큼 끔찍한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십자가도 받아들이고 내 자존심도 살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겉으로 나를 포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간판이나 계급, 세상의 명예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자존심을 기가 막히게 세워줍니다. 현대의 상업주의는 VIP 제도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줍니다. 나아만 장군에게 필요한 것은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한 번은 확실하게 나의 죄인 됨을 정직하고, 분명하게 인정하고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가 자랑하던 의의 옷들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자기 자랑을 모두 내던지고, 나의 자존심이 완전히 깨어지고 부끄러움을 감수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앞에 서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냥 내가 인간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화려함을 입고 살다 죽을 것인지, 아니면 부끄럽지만 내가 붙들고 있던 옷들을 과감히 벗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나아만이 계급장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그냥 아람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자존심 상하지만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든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도 이런 것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의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확실하게 나의 교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한 번은 혹독한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지금 나아만은 굉장히 중요한 시점에 왔음에도 자기의 감정, 자존심을 움켜쥐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는 거칠게 몰아가시며 온전히 순종하여 무릎 꿇게 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멋집니다. 일국의 장관이 왔는데도 쳐다보지도 않고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했습니다. 한번만 해도 낫게 할 수 있었는데 일곱 번 씻으라고 한 것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 것입니다. 확실히 죽으라는 것입니다. 한두 번으로는 우리의 자아가 쉽게 죽지 않습니다. 인간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이론들이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이 사라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며 하나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일곱은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일곱은 인간의 타협을 거부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넣거나 자기 마음대로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언제나 부분적인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반쪽 순종,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나아만은 결국 엘리사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 5:14)」 아주 간단합니다. 말대로 했더니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문제는 14절까지 오지 못하게 방해하는 교만과 고집, 내 생각입니다. 순종의 자리까지 나가기가 어렵지만 순종하기만 하면 확실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복잡해지는 것은 내 생각이 많고 자아가 죽지 않아서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순종만 하라, 그러면 그다음은 내가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순종의 테스트만 통과하면 그다음은 일사천리입니다. 인생의 해답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문제를 푸는 열쇠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일어난 기적들을 보면, 모두 동일하게 심플한 방법으로 일어납니다. 

문제는 우리가 못 풉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푸시는데 그 방식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겉으로 보면 물에 들어가는 것과 나병이 낫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했더니 낫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특이한 방법이 아닙니다. 가나의 혼인집에서 예수의 어머니가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심오하게 고민해야 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도한 방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순종입니다. 

모든 길은 순종을 통해서 열립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순종하는 삶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가장 쉽게 그리고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순종입니다. 삶이 굉장히 어려운 것 같지만,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이 쉽게 사는 비결입니다. 하라고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 하면 됩니다. 사랑하라면 사랑하고, 섬기라면 섬기고,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것입니다. 순종하려고만 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진리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운 것은 내 자아, 내 생각, 내 이론, 내 자랑이 어렵게 합니다. 가장 지혜롭고,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능력 있고, 가장 빠른 길은 순종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결함이 주어질 때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연결되는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결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의외의 일이나 만남을 통해 뜻밖의 은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어떤 것도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원수라도 우리를 돕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진지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사실은 거추장스러운 옷, 십자가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옷을 벗어 던지고 온전히 순종하면 오늘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은혜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도 순종, 둘째도 순종입니다. 그리스도가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 것처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과 기적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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