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긍휼한 자 (마 05:7)

첨부 1


산상보훈 가운데 8복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인격을 이루는 주춧돌이 될 뿐만 아니라 주께서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초석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구나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8복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두 부분은 양상 적으로 외형적인 표현에 있어서 서로 조금씩 다르나 내용상으로 반복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두 부분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전반부 4가지는 인간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즉 내향적인 변화라면 후반부 4가지는 외향적인 즉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변화이며 현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전반부 4가지가 마음 속에서 내적으로 변화 작용하며 다시 외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후반부 4가지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후반부 4가지 복 가운데서 첫 번째 복을 상고하려는데 바로 그것이 긍휼한 복입니다.
이 긍휼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병행합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나 가난하고 하나님을 몹시 필요로 하게 되는데 마침내 하나님으로 가득해서 천국을 맛본다고 했습니다. 즉 내적으로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너무나 필요로 하는 자는 마침내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다시 적극적으로 긍휼을 베풀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1.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긍휼의 개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헬라어 단어는 다시 히브리 단어로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데 긍휼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번역하기 참으로 힘든 단어입니다. 그 뜻이 너무나 함축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대중적인 의미의 동정한다 거나 단순히 곤경에 처한 사람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의 눈으로 버러진 일들을 보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해보고 그의 느낌으로 느껴보는 능력을 뜻합니다.
긍휼이란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에서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의지의 구체적인 노력을 요구합니다.
긍휼이란 가능한 모든 단계의 사랑(우정)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한 인격의 다른 인격에 대한 신비로운 관계의 완성입니다.
이것은 감정뿐 아니라 지적이고 동적인 차원에서 최상의 사랑의 상태입니다.
반면에 긍휼이란 반드시 義를 포함하고 의와 항상 동반합니다. 원래 이 히브리 단어는 사랑과 의로움을 동시에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긍휼한 자는 상대방의 영혼을 꿰뚫어 보고 먼저 그 영적인 상태의 비참함을 불쌍히 여기고 불의한 면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책망해 줄 수 있습니다.
왕하 8:7이하에 보면 아람왕 벤하닷이 병들어 그의 신하 하사엘을 엘리사 선지자에 보내어 자기 병의 완쾌 여부를 물었습니다.
10절 이하에 보니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왕이 정녕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가 정녕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저가 부끄러워하기까지 쏘아보다가 우니 하사엘이 가로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저희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어차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등의 내용이 나오는데 진정으로 긍휼한 엘리사의 일면을 보여 줍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백성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또 우셨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고 동시에 불의한 자들을 책망하는 부분도 자주 나옵니다.
주님은 참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였습니다.
공의가 없는 긍휼은 백성을 방자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패해 있기 때문에 치우친 사랑은 결국 그 부패를 부채질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긍휼이 나타나는 가자 뚜렷한 例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리가 만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와 같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의 비극을 알지 못하며 또한 긍휼히 여길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가족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고 있음에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긍휼한 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던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삶과 의의에 대하여 눈을 뜬 사람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상태와 파멸을 절실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 엄청난 영광과 은혜에 대하여 눈이 떠지자마자 그 마음 속에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불타오릅니다. 미국의 R. Rice 목사는 “기도와 응답”이라는 책은 썼는데 우리 말로는 “능력 있는 기도”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살아있는 실화가 많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미국 어느 곳에 어떤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기관사이고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그 아내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부인 비보를 받고 읽어보니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즉시 울부짖으며 내 남편은 죽을 리가 없다고 하면서 시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분명히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즉시 무릎을 꿇고 3시간 동안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는데 내가 25년 동안 남편을 구원시키기 위해 기도했는데 왜 예수 믿지 않은 체로 데려갔느냐 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곧 예수 믿고 다시 주님께로 갔습니다. 초대시대 교부인 크리소스통은 말하기를 의인의 기도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릴 뿐만 아니라 하늘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고 했는데 과연 약 5:16-18에 보니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약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약5:18)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영혼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없었다면 그것은 긍휼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긍휼의 능력은 육적인 차원의 헐벗고 배고픔 상태보다 찌그러진 그 영혼의 불쌍한 처지를 꿰뚫어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왜냐 육체인 비참함은 영적인 비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긍휼의 근원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성경에 보면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무수히 많이 나옵니다.
고후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시 86:15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의 섬기는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긍휼, 은혜라는 말과 계약이라는 단어 사이에 가까운 관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긍휼이라는 말의 어의론적 근원을 깊이 들어가 보면 헌신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긍휼하심 때문에 그가 맺은 계약에 헌신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이 계약을 깨고 하나님을 떠났지만 변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계속 그 계약을 지키시고, 헌신하시고 긍휼을 베푸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긍휼함은 메시아 왕국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나타났는데 이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 속으로 들어와 인간처럼 느끼시고 생각하시므로 인간에 대한 자기의 긍휼하심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히 4:15-16
“(히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긍휼의 근원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하나님의 긍휼에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하신 피조세계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십니다. 태양계가 정한 시간까지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계절이 바뀌며 대자연이 때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열매를 맺는 것은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다면 십자가는 없습니다. 긍휼없는 곳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표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하나님의 긍휼을 봅니다.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 십자가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내가 다른 영혼에 대하여 완악한 마음을 가지면 십자가는 나의 수치를 폭로합니다.
십자가 없는 긍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형제에게 참된 의미의 긍휼의 생각을 가졌다면 나의 모든 것이 십자가에 올라갔습니다. 따라서 나의 긍휼을 받는 형제는 나에게서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긍휼은 값싼 휴머니즘과는 다릅니다. 십자가 없는 긍휼은 가난한 자 앞에서 부자가 자기의 행복을 자랑하되 더 고상하게 자랑하기 위해 동정을 베푸는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주님이 없는 자연인에게는 긍휼이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긍휼의 빛과 비슷한 낌새는 보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긍휼이 아닙니다.
잠 12:10에 보면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고 말씀했는데 주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의 긍휼이나 동정은 그 자아 자신이 포기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오기 때문에 긍휼이나 동정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해치게 됩니다. 서양속담에 “동정은 최대의 모욕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남의 동정을 받는 것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긍휼이 얼마나 잔인함을 보여줍니다.
우리 속에는 원래 긍휼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일으켰을 때에 긍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가 긍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긍휼을 받은 사실에 근거합니다.

3. 다음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긍휼한 자입니다.

긍휼한 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피조물 속에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특성을 보여줍니다. 이를테면 그 존재의 독립성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도움을 받아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존재하심을 뜻하는데 이것은 하나님 고유의 속성입니다. 또 하나님의 불변성과 무한성, 영원성, 무변성 곧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 고유의 속성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피조물 특히 理性的 피조물이 부분적으로 또 유사하게 공유할 수 있는 속성인데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은혜 등등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죄로 부패한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긍휼한 자로부터 흘러내리기 때문입니다. 긍휼한 자는 또한 너무나 삶 깊이 하나님을 만나 어루만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계속해서 선물이 주어지지만 그 자신은 그 선물을 조금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여기는 겸손한 자입니다.
R. Tasher는 주석하기를
“긍휼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조금도 없는 자임을 절감하는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자기는 죄인일 뿐 아니라 정죄받은 죄인임을 의식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즉 긍휼한 자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긍휼조차 받을 자격이 없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휼한 자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그 긍휼하심을 반사해 반영해 내려고 애씁니다. Tasher는 계속 주석하기를 긍휼한 자가 계속 그렇게 하면 할수록 즉 자기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다른 사람에게 점점 더 많이 반사할수록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들에게 더 많이 흘러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긍휼한 마음이 메말라 버렸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반사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긍휼한 자는 물고기가 바닷물에 잠겨 있듯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둘러싸여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대자연, 공기, 물 이 모든 것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을 호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긍휼한 자는 창세 전부터 있었고 우리의 짧은 시간을 거쳐 영원무궁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바다에 계속 잠겨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긍휼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4. 마지막으로 긍휼한 자가 받을 복입니다.

주님은 “긍휼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엔 현재적인 뜻과 미래 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긍휼한 자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속에서도 긍휼을 받습니다. 또 복을 받습니다.
시 41: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잠 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그리고 다시 신약으로 나아가면 영적인 측면에서 긍휼이 강조되고 현재에도 하나님의 긍휼을 계속 맛봄을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미래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긍휼을 받는 다는 사실은 앞으로 주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는 어마어마한 날을 겨냥합니다.
계 6:15-17
“(계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계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계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약 2:13
“(약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 말씀은 마지막 그 날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암시해 줍니다. 긍휼없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십자가 없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채는 인간의 어떤 의로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삼하 22:13
“그 앞에 있는 광채로 인하여 숯불이 피었도다”라고 말씀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광채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만 의지하는 긍휼한 자는 그 날에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시 18: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말씀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긍휼한 자로 살기 위해 긍휼이 무엇인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동정이 아닙니다. 영혼 속을 꿰뚫어 보면서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긍휼을 베풀어야 되겠습니다. 이 긍휼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어야겠습니다. 동시에 긍휼은 義를 포함하기 때문에 긍휼의 방향과 표준이 뚜렷하며 의분과 더불어 책망할 수 있는 긍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긍휼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되 십자가가 그 표지임을 다시 상고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베푸시는 긍휼하심이 무엇이며 나아가 구원의 백성들에게 임하신 그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무엇인지 알아야 되겠습니다. 긍휼한 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그 긍휼하심을 다른 사람에게 반사시키기 때문에 더욱 큰 긍휼의 바다에 잠길 수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동시에 이 긍휼은 마지막 심판과 연관되어 있음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