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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없으면 (고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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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장은 세개의 문단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3절이 하나의 문단이 되고, 4-7절까지 한 문단이고, 8-13절이 또 하나의 문단이 됩니다.

오늘은 1-3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1-3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없으면 첫째 우리가 하는 모든 말, 모든 대화, 모든 언어가 아무 효력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우리의 대화와 말과 언어에 사랑을 빼면 무엇이 남는지 아십니까 남는 것은 소음뿐입니다. 소리나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만 남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고 다른 모든 동물과 구별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어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다른 동물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고린도 후서 12:2-4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깊은 명상과 기도를 하는 중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간 적이 잇습니다. 넷째 하늘은 낙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사람이 능히 하지 못하는 신비한 언어를 들었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신비한 언어는 천사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사도 바울은 직접 들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언어를 기도 중에 놀라운 은혜를 받아서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여러가지 외국어를 할 수 있고 심지어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죙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 사랑이 바지면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섞여 있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섞여 있지 않는 말은 말이 아닙니다. 사랑이 섞여있지 않는 대화는 하루 종일 주고 받아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간의 대화에 사랑이 섞여 있습니까 자녀들게 하는 말에 사랑이 섞여 있습니까 어머니가 자녀에게 하는 말속에 참 사랑이 섞여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에게 오히려 사랑이 빠져버린 말을 합니다.

이것이 부모가 하는 말의 전부라면 이 말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왜 부모를 거스리고 방탕하고 제 고집대로 하며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합니까 다른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키워 오면서, 자녀에게 한 말에 사랑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자식을 사랑하고 아니면 그 무엇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았지만, 사랑이 빠져 버린 우리의 언어에 아무 효력이 없어서 자식은 귀를 닫아 버리고 듣기 싫어 합니다.

특히 성도님들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있는데 그것이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사랑이 빠지면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8:9이하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종류의 기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성전 복판에 서서 손을 들고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번 금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하고 기도 했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욕심도 안 부리고 부정직하지도 않으며 일 주일에 두번씩 금식하며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금식이 뭡니까 자기 몸을 우상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십일조 떼어 먹어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에 비하면 이 바리새인은 얼마나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바리새인의 기도에 아무 효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성전 한쪽 구석에 멀찌기 앉아서 감히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바라 보지도 못하며 가슴을 치면서 "오 하나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옵소서"하고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세리의 기도는 효력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사랑이 빠진 기도는 이미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빠져버린 대화나 언어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을 하셔요. 우리가 하는 모든 언어에 하나님의 사랑을 섞으셔요. 사랑은 최고의 언어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영적인 이해가 온전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고 은사 많이 받고 뜨겁게 신앙생활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사람은 이 사랑에 대해서 말 할 자격이 없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착각 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믿음이 많고 은사도 많이 받았고 열심이 많아서 문제가 있었던 교회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키우셔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모든 은사와 영적인 이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의 본래 의미는 '앞서서 말한다'는 뜻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남 앞에서 그 말씀을 설교하고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하나님의 사랑=0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신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빼면 역시 제로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은사, 지혜의 은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이 빠진 예언은 사람을 정죄하며 심판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빠진 설교, 사랑이 빠진 말씀은 언제나 저주가 나타납니다. 협박밖에 없습니다.

회교도들에게서 많은 핍박을 받은 한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이해가 안갑니다. 왜 하나님은 기독교들을 박해하는 회교도들을 이렇게 많이 지으셨을까요"라고 물었을 때, 회교도에게 많은 고통을 당한 그리스도인이 말하기를 "지옥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성도님들!
산을 옮길만한 믿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영적인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믿음을 자랑하지 마셔요. 믿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사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두 사람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 좋은 사람, 예수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예수님을 잘못 잘 믿는 사람, 잘못 믿음 좋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잘 믿는 못된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런데 잘못 예수 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빠진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믿음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대부분이 종교싸움이며 종교 전쟁입니다. 사랑이 빠진 믿음으로 인간들은 무섭고 잔인한 일들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사랑이 빠진
믿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번째로 무서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의롭게 산다는 사람입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빠진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은 언제나 의롭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언제나 불의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심판자인 것처럼 양과 염소를 나눕니다. 자기는 의인의 반열에 서고 다른 사람은 모두 죄인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때 긍휼없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긍휼있는 심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심판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사랑이 빠진 정의를 주장하지 마십시오. 무섭습니다.

예언의 은사, 지식의 은사, 신비의 은사,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은사를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빠져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남을 위한 희생이 쓸모가 없습니다. 본문 3절 말씀에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사회적인 관심에 대해서 깨달아야 할 말씀입니다.

구제한다고 하는 말은 먹을 것을 조금 준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잇는 구제는 대부분 주머니속에 돌아다니는 동전 몇닢 던져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돈 몇 푼 정도 나가도 우리의 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것을 구제라고 생각합니다. 하긴 그것도 구제는 구제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가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내어 준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것에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없이 우리는 남에게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지않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남에게 주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구제하는 일을 결코 소가히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기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구제처럼 사람에게 모욕감을 주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마음에도 없이 의무감으로 구제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을 경멸하면서 동전 몇푼을 던져 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우월감에 만족하면서 보잘것 없는 것을 마치 개에게 던져 주듯이 던져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사랑없는 구제만큼 잔인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교회에 구걸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고정적으로 교회를 돌면서 500원, 1000원을 받아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500원이나 1000원을 주면 달다 쓰다 말없이 그냥 받아 가지고 갑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굳이 목사를 만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을 만나게 되는데, 저는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나름대로의 몇가지 원칙을 정해 두고 있습니다.

첫째는 와서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그들에게 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그 사람이 기대하고 온 돈의 갑절을 준다는 원칙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우리 교회가 한꺼번에 당신에게 많이 줄수 없지만 언제든지 어렵거든 또 오십시오"하는 말을 꼭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람에게 구제하면서 너무 많은 설교를 합니다. "왜 나가서 일하지 않느냐" "돈 벌
수 있는데 왜 돌아 다니느냐"는 등 여러가지 설교를 합니다. 우리의 구제에 사랑이 빠져버리면 그것보다 더 잔인한 것이 없으며 사람의 감정을 뒤집어 놓고 모욕감을 주는 게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책속에 이러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더 많이 주면 그만큼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만큼 더 많이 주게 될 것이다.]

오늘 교인들의 착각은 자기가 좀 많이 남에게 주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면 그만큼 더 많이 주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냐의 결과이며 남에게 줌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리라고 믿어서 남에게 주는 것은 사랑없는 사랑입니다. 초대교회에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였지만 너무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모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가장 가난했던 마케도니아 교회가 제일 많은 구제를 제일 먼저해서 예루살렘교회에 보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5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쫓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구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빠져버린 구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잔인하게 되어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살아온 모든 일의 결과가 시끄러운 문제가 되고 수포로 돌아가고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랑에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사랑이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작년에 노사분규가 일어나고 정치문제가 어려웠을 때 젊은 학생들이 자기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랑이 빠지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가 것입니다. 예언은 못해도, 방언은 못해도, 신비를 체험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헤아려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대화가 울리는 징과 꽹과리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영적인 이해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남을 위한 희생도 쓸모가 없고 아무런 유익을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것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사랑을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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