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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요 19: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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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으로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때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부르며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르고 또 주님께서 고난 당하셨기 때문에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키케로라고 하는 학자는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하고 소름을 끼치게 하는 사형방법이었 다고 말합니다. 본래 십자가 사형방법은 페르시아라고 하는 나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땅은 신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죄인이나 악한사람들의 시체로 땅 을 더럽힐 수 없다고 생각하여 죄수들을 사형시킬 때는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서 극한 고통 가운데 죽게 하고, 독수리와 까마귀들이 날아들어 나머지 시체를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이 십자가 사형제도는 노예에게만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는 판 결을 받은 죄수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어깨에 매고 가야 합니다. 그 앞에서는 빨리 따 라오라고 군인들이 채찍으로 때립니다.,뒤에서는 몽둥이로 몹니다,.이렇게 하면서 가급적 많 은 사람들이 보도록 여기 저기 돌아서 형장에까지 가도록 합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죄인 들을 난장 돌렸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은 가장 큰 죄인이며, 그리고 노예와 같이 여긴바 되 었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세푸스 라고 하는 역사가의 기록에 보면 예수님 당 시에 갈릴리에 큰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유다라고 하는 사람이 로마제국을 반대해서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리우스라는 로마 장군이 군사를 몰고 와서 이 조그만 갈릴리 지방에서 무려 2천명을 붙잡아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습니다. 2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십자가에 죽여 길거리에 쭉 세워 놓았을 때 그 비참한 죽음의 모습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같이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못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듯 십자가는 고통스럽고 무섭다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이 십자가를 자원해서 지기 위해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 니다.

첫째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죄짐을 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 물과 ,인생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모든 일에 전 책임을 지십니다.

진정한 부모는 그 사랑하는 자녀들의 모든 문제를 책임집니다. 그들을 낳으시고 기르시는 일만 아니라 그들의 일생을 통하여 자녀들의 모든 문제를 책임지시고 염려하고 지도하여 주 시며 자녀들의 질병과 고통과 잘못까지도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의 허물과 실수까지도 책임을 지고 도와줍니다.우리 나라 대통령을 모셨든 분 가운데 한 분은 대통령의 잘못 까지도 자기가 책임을 지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하나 님 앞에서 지은 배은 망덕한 모든 죄까지 책임지시고 해결하여 주시기 위하여 자신이 친히 인생을 찾아 오셨습니다. 이처럼 찾아오신 예수 님을 세례요한 은'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의 제물로 피를 흘리심으로 인하여 우리 인생은 사유함을 받는 길이 열렸으며 공로 없이 의로워지는 길이 열렸으며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게 되었 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요한 계시록 1장5절에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이 피로 우리 죄 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즉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난 을 당하셨습니다. 내가 지은 모든 죄, 그야말로 알면서도 일부러 지은 죄, 몰라서 지은 죄,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하시려고 조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다려 돌아가셨습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우리 인류의 고통을 담당하셨습니다.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마음에 큰 고통을 줍니다. 얼마전에 자식의 잘못 때문에 대통령께서 국민 앞에 사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통령은 자식의 잘못은 바로 이 아비의 잘못이라 고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인류의 죄는 쏘는 화살이 되어 하나님께 큰 고통과 상처를 끼쳐 드렸습니다. 해마다 고난 절이 오면 로마의 바티칸 시에서는 교황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걷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많 은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서 눈물도 흘리고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교황이 지고 가는 십자가는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지고 가는 십자가입니다. 이런 교황의 권위를 갖고 십자 가를 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금관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높 은 자리에 앉아 낮은 자들에게 '네 죄를 용서한다'아니라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또한 육체의 고통도 담당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더없이 수치 스럽고 부끄러운 정신적 고통입니다. 채찍에 맞으면서 침 뱉음을 당하고 모진 조롱을 받았 습니다. 사람들이 옷을 벗겼습니다. 그 이상 수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이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위에서 우리의 고통을 담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4,5에 서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 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질고라는 말과 슬픔이란 말 이 나옵니다. 질고는 육체의 병을 말하고, 슬픔은 정신적 질병을 말합니다. 이 두가지 고통 을 예수님께서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육체와 정신에 평화와 안식을 주시기 위함입 니다. 여러분! 참된 평화가 없어 언제나 불안합니까? 주님 앞에 나가기만 하면, 예수님을 믿 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이 평안을 값싼 평안이라고 생각지 마세요. 찔 림과 상함과 십자가의 고난을 치르고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우 리에게 나음을 주셨습니다. 나았다는 것은 우리가 병들었는데 고쳐주셨다는 말입니다. 암보 다 더 지독한 병도 주님께서 낫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대한 신비로운 전설이 있습니다. 주후 3세기경,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헬레나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습니 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 형틀을 찾고 싶었습니다. 많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를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직접 찾기로 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애쓴 나머지 십자가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찾은 십자가가 세 개 였습 니다. 이 셋중에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헬레나는 지혜롭게 하 였습니다. 헬레나는 예루살렘에서 병들어 다 죽어 가는 여인 하나를 데려와서 세 개의 십자 가에 몸을 대어 보도록 했습니다. 그 여인은 십자가에 몸을 대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 병든 여인이 마지막 십자가에 몸을 댔습니다. 그 순간 여인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아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모든 고통을 담당하신 것을 믿 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죽음을 대신하셨습니다. 죽음은 우주와 인류 의 가장 슬픔 일입니다. 영과 육이 갈리는 것이 육신의 죽음인 것과 같이 우리 인간이 하나 님과 영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죄 값으로 오게 되었고 아무도 해 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음을 해결하시고 생명을 주셨습니 다. 사실 십자가 무엇입니까?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잃어야 얻는 것이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사랑 이전에 희 생이 먼저 있었습니다. 부활 이전에 십자가의 죽음이 먼저 있었습니다. 먼저 수고가 있고 희 생이 있고 그 다음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죽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죽은 것이 십 자가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죽음이 전 부가 아니고 끝이 아닙니다.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 살아 나셨습니다. 죽음을 정복 하신 것 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고전 15:55-57 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 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하면서 십자가로 승리의 개선가를 불렀습니다. 십 자가는 죽음을 이기게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가 십자가 하면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가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 자가는 의인의 죽음이요 대속적인 것이요 속죄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 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어디까지나 계시적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십자 가는 우리의 것입니다. 내 십자가입니다. 성격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와 네 십자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둘째는 일반적으로 당하는 고통을 십자가라 생각하면 안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다든지 병들어고생을 한다든가. 혹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해 가난으로 고생을 한다 든가. 아니면 정치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십자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 기 실수로 남에게. 비난을 받고 욕을 먹거나, 자식들이 속을 썩이는 것을 보고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싸구려 십자가는 없습니다. 이런 것을 십자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별로 좋은 얘기가 아닙니다. 슈퍼스타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이러한 기도문이 있습니다.'주님 내가 십자가를 지면 그 보상이 무엇입니까?'십자가는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보상이 없습니다. 보상을 묻지 않는 희생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절대순종 입니다. 절대 충성입니다. 절대 사랑입니다. 이 충성 속에 죽어 갑니다. 믿음으로 죽어 갑니 다. 사랑으로 죽음을 영광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와,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 혀 죽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 죄를 대속 하시고 우리 고통을 당당하시며 우리의 죽 음을 대신하신 십자가위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어 12장 2절에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벌레 같은 죄인 영죽을 나를 살리려 그 영광 버리고 쓰리고 아픈 십자가를 날 위해 지신 그 은혜, 그 공로, 그 사랑, 그 희생을 믿음으로 죄와 고통과 사망에서 구원을 받으시는 동시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사랑에 감사 감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말과 행동과 생활로 십자가의 충성된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와 고통과 사망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의 모든 죄와 고통과 사망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여 주시기 위해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기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죄와 고통과 사망에서 해방을 받으시는 귀한 축복이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006-02-2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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